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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 21일.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에서 북한의 기습 남침용 땅굴이 발견되자 한반도는 서릿발 같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설상가상, 그 해 4월 30일에 월남전에서는 장기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남(南)베트남 정부가 항복을 선언하고, 인도차이나반도가 완전 공산화되며, 우리나라에서도 북한과 공산정권에 대한 불안감과 긴장감은 커질 수밖에 없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자주국방’이 최대의 국정 현안으로 떠올랐던 이 무렵, 남부지방에 위치한 방위산업체를 시찰한 박정희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나라도 80년대 중반에는 최신예 전투기를 생산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대통령의 발표라고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적 수준으로 향후 10년 내 최첨단 기술의 집합체로 불리는 전투기를 우리 손으로 만든다는 얘기는 국민들이 쉽게 믿을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일제시대인 1944년 설립된 조선항공공업(주)이 일본에서 부산으로 시설을 옮겨 공장을 설립하고 항공기 제조에 착수한 적도 있었고, 화신산업의 박홍식씨도 안양에 조선비행기동업ㄜ를 설립해 시험제작에 손을 대기도 했으나, 해방과 함께 미 군정에 의해 이러한 시설들이 강제 해체됨으로써 당시 우리나라의 항공기 생산에 관한 기술이나 시설은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림 1> 김해 첫 공장건물에서 생산중인 500MD 헬기
기자회견 며칠 뒤 대통령은 한진그룹 창업주인 조중훈 회장과 만남을 갖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항공기 생산사업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나마 국내에서 유일하게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던 공군과 대한항공을 놓고 고심한 끝에 대한항공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조중훈 회장은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막대한 투자비용과 불확실한 수익성을 감안하면 항공기 제조사업은 한진그룹 전체의 사운을 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익을 얻기 위해 항공기 생산사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항공기 제조사업은 국가의 소명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물질적인 손실은 개의치 않았다.”
대통령으로부터 항공기 제조를 부탁 받은 조중훈 회장은 국가안보라는 사명감 하나로 대한항공의 정관을 고쳐 사업목적에 ‘항공기 제조 및 판매사업’을 추가했다. ‘수송 외길’을 고집했던 조중훈 회장이 처음으로 제조업에 뛰어드는 순간이었다.
1975년 10월 대한항공은 ‘군용 항공기 정비, 조립, 생산 군수업체’로 지정되었고, 당시 700억 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하여 김해공항 인근의 늪지대를 메우고, 항공기생산공장(현 대한항공 테크센터)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76년에는 자주국방 실현과 선진 항공산업국으로의 도약을 목표로 항공우주사업본부를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 최초의 국내생산 헬기 500MD
항공기 산업은 통상 정비, 수리 단계에서 시작해 조립생산 및 부품 국산화, 하청 제작, 국제 분업에 의한 고유모델 개발로 발전해 나간다. 대한항공은 먼저 헬기 조립생산에 착수했다. 당시 북한은 수 백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는 헬기 도입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우선, 육군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한 미국 벨(Bell)사의 UH-1 모델이 검토대상이 되었으나 도입 가격이 턱없이 높았다. 조중훈 회장은 아들인 조양호 현 한진그룹 회장을 미국 휴즈(Hughes)사로 보내 500 계열 헬기 도입을 검토할 것을 지시한다.
<그림 2> 대한항공에서 제작된 최초의 국내생산 헬기 500MD
“500 계열은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소음이 적고, 기체가 작아 기습 공격용으로 적합했습니다. 특히, 기동성이 뛰어나 산악지대에서 강점이 많았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이 모델을 국내로 들여와 군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시연회를 열었습니다. 시연회에 참석한 수 십명의 장성들은 실망스럽게도 시큰둥한 반응이었습니다. 다들 벨사 제품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오원철 청와대경제수석이 시연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서 박정희 대통령께 보여드렸습니다. 장성들은 관심조차 갖고 있지 않은 터에 대통령이 회의시간에 ‘휴즈 모델이 어떠냐’고 묻자 발칵 뒤집어졌죠.”(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회고록)
조중훈 회장은 1976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의 낙점을 받은 500 계열 헬기 생산을 위해 휴즈사와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한다. 마침내 항공기 제작의 두 번째 단계로 꼽히는 조립생산이 시작된 것이다. 대한항공은 15개월간의 준비를 거쳐 양산체제를 갖추고, 이듬해 7월 ‘솔개’로 명명된 500MD 헬리콥터를 우리나라 육군에 인도하게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항공기 조립기술과 기체 제작기술을 체계적으로 쌓아가게 되었다. 최초의 국내 생산 헬기인 500MD 헬기는 그로부터 1988년 9월까지 13년에 걸쳐 200여 대가 생산되어 군에 공급 되었고, 더불어 대한항공은 22대의 500D 헬기를 생산하여 산림청, 소방대 등 공공기관과 민간 기업에도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그림 3> 국산 헬리콥터 200호기 출고 기념식
■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전투기 “F-5 제공호”
기술이전에 의한 첫 헬기 생산이 시작될 즈음 국제 정세는 냉전을 끝내고 화해 분위기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1978년 5월, 중국이 ‘죽(竹)의 장막’을 걷어내고 전쟁 상대국이던 일본과 수교를 맺으며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78년 국군의 날을 이틀 앞두고 회장님께서 갑자기 저를 불러 메모 한 장을 건네 주셨습니다.
태평양 지역의 미군 전투기 정비를 위한 사업계획서를 만들라는 지시였죠. 당시 팬텀기 한 대를 정비하는데 꼬박 120일이 걸렸는데, 직원 여섯 명이 이틀 동안 밤샘작업에 매달려 국문과 영문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회장님께서는 이 보고서를 미군에 제출해 태평양 지역 미군용기의 정비 계약을 추진하셨다”고 사업계획서 기획에 참여했던 서상묵 전)대한항공 항공우주사업본부장은 회고했다.
당시, 미군 군용기의 정비기지는 대만에 있었다. 그러나 중/일 수교로 죽의 장막이 걷히자 미국은 중국과 수교를 서둘렀고, 그에 따라 대만의 정비기지를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었다. 국제정세의 긴박한 흐름을 읽고 있던 조중훈 회장은 그 동안 대한항공이 쌓은 정비 노하우와 500MD 생산 경험을 내세워 대한 항공을 새로운 정비기지로 지정해 줄 것을 미군에 요청하게 되었다.
대안을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던 미군은 조중훈 회장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이듬해 1월 조중훈 회장의 예상대로 미국과 중국은 수교를 맺으며, 1979년 2월 23일 대한항공을 미군의 태평양지역 창급 정비기지로 선정하게 되었다.
항공기 제조사업을 시작한 대한항공으로서는 천운이었다. 항공기 정비는 일반 자동차 정비와는 달리 분해, 결합은 기본이고, 수리를 위해서는 생산하는 것 이상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항공기 제조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안정적인 거래선을 확보함으로써 경영 개선은 물론 외화획득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항공기 제조사업이 기반을 다지고 있던 1979년7월, 한국방위산업진흥회 회장을 맡고 있던 조중훈 회장은 청와대로부터 연락을 받고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만난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진에 항공기 제조사업을 맡길 때 제조업종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소. 하지만 나는 한진을 믿었소. 수익성도 보장되지 않는 헬기 사업을 이렇게 성공적으로 해낸 데 대해서도 감사하게 생각하오”라며 치하했다.
조중훈 회장도 돈을 벌고자 시작한 사업은 아니었다. 방위산업은 국민들로부터 걷어 들인 방위세로 진행하는 사업이기에 본전이면 족하다는 것이 그의 한결같은 소신이었다. 특히, 자주국방이라는 국가적 대의에 기업이 동참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던 터였다.
“나는 80년대 중반까지 최신예 전투기를 우리 기술로 생산하겠다고 국민과 약속했소. 자주국방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오. 조 사장이 이일을 해 줄 수 있겠소?”
당시 최신예 전투기는 곧 국방력의 상징이었다. 조중훈 회장도 항공기 제조업을 시작하면서 최신예 전투기 생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이제 그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3년 안에 반드시 전투기를 출고시키겠습니다.”조중훈 회장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대통령을 대신해 국민과 최신예 전투기 생산을 약속한 것이다. 조중훈 회장은 곧바로 대한항공에 ‘FX계획반’을 구성했다. 도입 전투기의 기종은 미국 노드롭(Northrop)사의 F-5 모델. 1979년 9월부터 노드롭사와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협상이 한창이던 그 해 10월 26일 운명을 달리하고 만다.
불안한 정국 속에서 1년을 넘게 끌던 협상은 이듬해 11월에야 타결점을 찾는다. 국방부와 노드롭사 간에 F-5 E/F의 판매 및 면허생산 계약이 체결되고, 대한항공은 전투기 생산업체로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조중훈 회장은 기술을 전수할 전문가들을 노드롭에 파견하고, 공장 건설과 설비 확보에 박차를 가했다. 기술인력만 600여 명에 달했고, 생산과 품질보증, 시험비행, 성능평가에 필요한 모든 체제를 하나 하나 갖춰 나갔다.
1982년 9월 9일 대한항공 항공우주사업본부 김해공장. 마침내 첫 국산 전투기 ‘제공호’가 위용을 드러냈다. 활주로 끝에 대기하고 있던 제공호는 관제탑의 지시가 떨어지자 긴 활주로를 가뿐히 차고 올랐고, 날카로운 금속음을 남기며 북쪽으로 솟구쳤다가 다시 식장 상공에 나타나 한차례 멋진 곡예 비행을 펼쳤다. 대통령 석에는 박정희 대통령 대신 전두환 대통령이 앉아 있었지만, 조중훈 회장은 ‘3년내 전투기를 출고하겠다’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었다. 제공호는 고성능 초음속 전투기로 당시 북한 공군의 주력기였던 ‘미그-21’보다 성능이 뛰어났다.
<그림 5> 1982년 9월 9일, 국산전투기 “F-5F/제공호” 출고 기념식
■ 차세대 다목적 헬리콥터 UH-60 생산
대한항공은 500MD 헬기의 국내 생산 성공과 제공호의 성공적인 제작에 힘입어 병력수송, 긴급구난, 지휘 등을 목적으로 하는 우리 군의 다목적 중형 헬기 국내 생산 계획에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대한항공은 미국 시콜스키사의 18인승급의 UH-60 Black Hawk 중형헬기 생산 계획서를 군과 정부 유관기관에 제출해 1988년 6월 차세대 중형헬기 사업의 주사업자로 선정되었으며, 1990년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UH-60 헬기는 UH-60P로 명명되어 3단계의 계획에 따라 생산 되게 되었다. 1단계에서는 미국의 시콜스키사로부터 완제 헬기를 직도입해 대한항공에서 최종조립 및 성능시험을 거쳐 군에 납품되었고, 2단계에서는 세부부품을 부분품(Kit) 형태로 도입하여 조립 생산하여 납품하게 되었다. 마지막 3단계 이후부터는 UH-60 헬기 동체의 대부분을 국산화하여 제작 납품하는 단계로 진행 되었다. UH-60P 헬리콥터 국내 생산 1호기는 1992년 출고하여, 초도 비행을 실시한 후 우리 군에 납품되었다.
<그림 6> 납품전 최종 점검을 받고 있는 외부연료탱크를 장착한 UH-60P Black Hawk.
대한항공은 차세대 중형헬기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 헬기 기체뿐만 아니라, UH-60P에 사용된 T700 엔진까지 일괄 생산하여 국산화율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으며, 보기류를 비롯한 탑재장비 등을 국내 전문업체들과 함께 국산화하여 향후 국산 헬기 독자 설계 개발 및 생산 기반을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대한항공은 1991년 차세대 전투기 도입사업과 국산 고등 훈련기 개발사업 등 방위산업분야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여 왔으며, 군용항공기의 정비 및 성능개량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 태평양 지역 최대, 최고의 방산업체로 발돋움 하였다.
<그림 7> 대한항공은 UH-60 헬리콥터를 생산함으로써 자주국방 실현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 글로벌 항공우주종합기업으로의 도약
● 현대전의 필수요소인 무인 항공기 개발
대한항공은 최근 아프간 및 이라크 전쟁을 통해 현대전의 필수 요소로 주목 받고 있는 무인항공기 분야의 기술 축적에도 힘써 왔으며, 2007년에는 반경 50km 영역을 주야간 정찰, 감시할 수 있는 근접 감시용 무인기 KUS-7 개발에 성공하였다. 이 기종은 차기 고급 기종 개발을 위한 기술 시현기임에도 불구하고, 수십 차례의 장거리시험 비행을 거치면서 단 한 차례의 고장이나, 궤적 이탈없이 비행 임무를 수행하여 완벽한 안전성과 성능을 입증하였다. 그리고 2009년에는 모사비행 등 첨단 기술을 적용하여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고성능 무인기인 KUS-9을 개발하였다. KUS-9은 사단급으로 운용 가능한 전술 무인기로 반경 80km 이상의 영역에서 8시간 체류 성능을 갖춘 첨단 무인 항공기이다.
대한항공은 이와 같은 경험을 토대로 2008년부터 대형 전략급 무인항공기, 2010년부터 군사용 전술급 무인항공기를 개발 중에 있으며, 차기군단 무인기 개발 사업에도 참여하여 무인기 분야 국제 경쟁력 제고 및 국방력 강화에 일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최근 핵심기술 개발에 성공한 스마트 무인기의 60% 축소형 실용화 모델인 틸트로터 무인기(TR-6X) 개발사업에 있어서도 2011년부터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함께 공동개발에 참여하고 있으며, 향후 틸트로터 기술 실용화를 통해 국내외 신시장 창출 및 선점으로 무인기 전문업체로서의 입지를 한층 강화해 가고 있다.
<그림 8> 대한항공이 개발한 첨단 전술 무인항공기 KUS-9
● 차세대 민항기 국제공동개발, 위성체/발사체
국내 최초의 헬기 생산으로 시작한 대한항공은 항공산업 분야에서 기술력과 품질의 우수성을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차세대 민간 항공기 국제공동개발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한항공은 미국 보잉사의 787 항공기 동체 및 날개 구조물, 유럽 에어버스사의 A350 항공기의 Cargo Door, A320 항공기의 날개 구조물을 설계, 제작 사업에 참여하는 등 민간 항공산업 분야에서도 그 사업영역을 넓혀 나아가고 있으며, 발사체와 인공위성 개발 등 우주 개발사업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여 명실상부한 글로벌 우주 항공기업으로 세계시장에 그 명성을 각인하고 있다.
● World’s Best 항공우주 종합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는 대한항공
항공기 개발에서 운용까지의 Total solution 제공능력을 보유한 국내 유일의 업체인 대한항공은 해외에서도 높은 인지도를 보유하고 있다. 또한 민간항공 분야 MRO 능력과 방산 부문 제작/정비 능력에서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0년 우리나라 항공산업을 “글로벌 Top 7”으로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항공생산 200억 달러를 기본으로 하는 “항공산업 발전 기본계획(2010~2019)”을 발표하며, 이를 위한 “4대 실천 전략”으로 완제기 개발을 통한 시장 선점 및 기술 확보, 핵심 부품 및 MRO 수출 활성화, 항공기술 R&D 투자 효율화, 선진국 수준의 인프라 구축 등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대한항공 항공우주사업본부가 지향하는 “세계 수준의 항공우주 종합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비전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대한항공 항공우주사업본부는 항공기 국제공동개발을 통해 관련 핵심기술을 확보하고 완제기 개발에도 적극 참여하여 글로벌 시장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동시에 항공기 수명연장, 성능개량 등 실용적이고 친환경적인 MRO 사업도 더욱 확대하고 있다. 아울러, 지역 중심의 항공산업 클러스터를 구축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등 합리적이고 적극적인 경영을 통해 “2020년 Global Top 7 항공 선진국 진입”이라는 국가 비전과 “World’s Best 항공우주종합기업”이라는 대한항공 항공우주사업본부의 비전을 모두 달성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투자와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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