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박정희대통령 지시 후 한달만에 소총, 박격포를 만들다

여동활 2013. 6. 17. 10:43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48>국산 무기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에 “1976년까지 최소한 이스라엘 수준의 자주국방 태세를 목표로 총포, 탄약, 통신기, 차량 등의 기본 병기를 국산화하고, 1980년대 초까지 전차, 항공기, 유도탄, 함정 등 정밀 병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이 긴급 지시한 중차대한 사업인 만큼 청와대에서 직접 감독하고 통제했다. ‘매일매일 진척 상황을 보고하라’는 청와대의 독촉에 과학자들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듯 쫓기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도 틈날 때마다 연구소를 방문했다. 무기 국산화 프로젝트에 참가한 이경서 구상회 홍재학 박사 모두 당시 박 대통령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2006년 12월호 신동아 인터뷰).

“늘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셨죠. 시험장, 기계창 건설현장을 둘러볼 땐 일꾼들이 먹는 임시 식당에 들러 ‘밥 한 그릇 부탁합니다. 그냥 있는 대로 가져오세요’ 했어요. 대통령이 불쑥 들어와서 밥을 달라고 하니 다들 기절초풍했지요. 대통령은 밥 한 그릇에 숭늉을 뚝딱 비우면서 그저 ‘무기 만들어야 힘 있는 나라가 된다’고만 강조했습니다.”

70년 7월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김학렬 부총리는 경제협력차관보 황병태를 팀장으로 경제기획원과 한국과학기술원(KIST) 엘리트로 특별전담팀(TF)을 꾸린다. 주물 특수강 중기계 조선 등 네 개 공장을 건설하는 것과 차관을 가져오는 작업이었다. 경제기획원은 4개 공장을 전략적 우선 사업이라 하여 ‘4대 핵(core) 공장’ 건설이라 불렀다. 탄피와 총알을 만드는 구리공장 건설도 비밀리에 함께 추진했다.

하지만 중소기업 수준의 주물공장이나 주방용기 만드는 구리공장 정도 갖고 하루아침에 무기 생산은 불가능했다. 기술, 기술자, 경험, 기본 설비조차 없는 한국이 갖고 있던 것은 의욕뿐이었다. 우선 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비즈니스 모델도 없는 막대한 투자에 돈을 대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경제기획원이 1년여를 애쓰는 동안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이가 바로 오원철 상공부 차관보였다.

그는 기존 작업을 뒤엎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처음부터 완제품 무기 공장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모든 무기도 결국 분해하면 부품’이라는 점에 착안해 일단 부품 공장들을 세우자는 안(案)을 낸 것이다.

박 대통령은 “돈도 적게 들면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동시에 건설하는 일석이조 전략”이라고 찬성했다. 대통령은 “모든 일을 직접 챙기겠다”면서 1971년 11월 10일 오 차관보를 경제 제2비서실 수석비서관에 임명한다. 없던 자리를 새로 만든 것이었다. 오 수석은 오로지 대통령에게만 보고할 책임이 있었다. 오 수석은 임명장을 받던 날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그의 책 ‘한국형 경제건설’).

‘박 대통령은 선 채로 세 가지 지시를 내렸다. 첫째, 안보 상황이 초비상 상태다. 둘째, 우선 예비군 20개 사단을 경장비 사단으로 무장시키는 데 필요한 무기를 개발 생산하라. 60mm 박격포까지를 포함한다. 셋째, 청와대 안에 설계실부터 만들어 직접 감독하라. 나도 수시로 가 보겠다. 처음 나오는 병기는 총구가 갈라져도 좋으니 우선 시제품부터 만들라. 차차 개량해 나가면 쓸 만한 병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우수한 인재를 동원하라. 넷째, 북한군의 최근 동향에 대해서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만나 설명을 듣도록 하라.’

오 수석은 “완전히 군대식 명령 하달이었다. 지금도 그 광경이 눈에 선하다”며 “나는 직립부동자세로 명령을 수행했다. 하마터면 과거 군대생활이 되살아나 거수경례를 할 뻔했다. 다시 군대에 입대한 기분이 들었다”고 썼다.

오 수석은 그 길로 궁정동으로 갔다. 이후락 부장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최일선에서는 위기촉발의 분위기요. 언제 사건이 터질지 모르겠소. 북한은 각 부대를 최일선으로 대이동을 시키고 있으며 탱크들도 휴전선 바짝 가까이까지 이동시키고 있소. 그런데 우리 측에서는 충분한 대비책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이 정보부의 해석이오. 우선 소총만 하더라도 우리 M1소총은 북한의 아가보 소총(AK총)보다 성능이 떨어진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니오.”

이 부장은 캐비닛을 열더니 총 한 자루를 꺼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서독군에서 쓰고 있는 총이오. 아주 간단한 구조인데 참고로 해서 만들어보시오. 지금 일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탄약이오. 탱크가 공격해온다면 대전차 지뢰를 깔아놓아야 하는데 태부족이야. 심지어 탱크가 쳐들어 왔을 때 결사대가 지뢰 한 개씩을 메고 탱크에 뛰어드는 육탄전이라도 해야 할 판인데 지뢰조차 없다는 보고요. 북한은 최근 들어 ‘김일성 환갑을 서울에서 열자’는 구호를 전 국민에게 내걸고 있는데 6·25사변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말 아니겠소?”

그는 오 수석의 눈을 뚫어져라 쏘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 동지! 나를 위해 사력을 다해주시오.” 다시 오 수석의 회고다.

‘나는 전신에 전율이 흐르는 긴장감을 느꼈다. 내가 전쟁터에 나와 있구나 하는 현실감이 들었다. 나는 직립부동자세를 취하고 “예, 알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뛰겠습니다” 대답했다. 명령하는 사람과 명령받는 사람의 관계가 아니었다. 서로 목숨을 거는 전우로 생각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부장도 상급자이지만 나를 동지라고 호칭했을 것이다.’

일주일 뒤인 71년 11월 17일 박 대통령으로부터 병기 시제품 긴급개발 지시(번개사업)를 받은 국방과학연구소는 24시간 쉬지 않고 일하며 한 달 만에 소총과 박격포를 만들어냈다. 마침내 12월 16일 청와대 대접견실에는 대한민국 유사 이래 M1카빈, M19, A4 기관총, 60mm 박격포 등 무기 8종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빨간 카펫이 깔려 있는 대접견실에는 샹들리에 불빛이 찬란했다. 여기에 국산 초유의 각종 병기가 진열된 것이다. 60mm 박격포, 로켓포, 기관총, 소총류 등이었다. 박격포는 카펫 위에, 총기류는 진열대 위에 놓여 있었다. 새로 칠한 국방색 병기는 병기라기보다는 예술품이었다.…박 대통령은 환히 웃으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우리가 만들어낸 병기들이야”라고 했다. 연구진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금년도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어. 우리도 이제는 이런 정도로는 발전된 거야”라고 기뻐했다.’(오원철 ‘한국형 경제건설’)

우리 손으로 최초로 만든 무기를 바라보며 박 대통령과 참석자들이 얼마나 감격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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