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5.16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정권 나와야

여동활 2011. 5. 8. 00:21

5.16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정권 나와야
〈그리운 나라, 박정희〉 유럽3국 수교50년 의미가 공허한 이유
2011-05-03 김인만 작가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강국을 만든 ‘땀과 눈물’의 반세기 배경설명이 없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대통령 특사로 유럽을 방문 중이다. 수교 50년을 맞는 네덜란드, 포르투갈, 그리스를 차례로 방문하고 있다. 이들 유럽 3국과의 수교 50년을 기념하는 행사다.
청와대는 지난 4월 28일 박근혜 특사 출국에 앞서 “3국 지도자들에게 양국 관계의 지속적인 발전에 대한 우리 정부와 국민의 기대와 의지를 전달하고, 양국간 협력 제고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예정”이라고만 밝힌 바 있다.
얼핏 듣기론 그럴 듯하지만 단지 50년을 기념해 그렇게 하는 것뿐, 왜 무엇 때문에 기념행사를 하는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50년 세월에 대한 배경 설명이 없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식민통치했고, 포르투갈은 브라질과 동티모르를 지배했으며, 터키의 케말파샤는 그리스군의 침공을 막아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네덜란드와 그리스는 6.25전쟁에 참전해준 인연이 있다.
이들 3국은 지난 20세기 유럽의 강국들이다.

이들 3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진 것은 1961년.
네덜란드와는 그해 4월, 포르투갈은 11월, 그리스는 12월에 각각 수교했다. 이웃 나라의 주재 대사를 겸직 발령하는 방식으로 수교라는 명색을 갖추었다. 

당시 우리는 참으로 비참했다.
1961년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로 세계 121개국 중 101위의 최빈국인 반면, 북한은 360달러로 50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해마다 춘궁기에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제때에 들어오지 않으면 2백만 이상이 대책없이 굶주려야 했던 나라, 외국의 전문가들이 보기에 도저히 자립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나라로 처량하게 낙오되어 있었다.  
그런 나라가 불과 반세기만에 국민소득 2만달러에 주요 공산품으로 세계시장에서 선두를 다투는 경제강국으로 변모했다. 언필칭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바뀐 대한민국을 자화자찬할 것도 없이 외국 논평가들이 현대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성공국가라고 일컫는 찬사는 결코 의례적인 입발림소리가 아니다.

지금 우리 처지가 옛날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은 지지궁상이라면 어떤 나라와의 수교를 기념할 것도 없다. 당당해졌으니까 대접을 받고 서로가 수교를 기념하는 것이다.

1961년 이후 50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의미라면 당연히 최빈국에서 경제강국으로의 환골탈태가 핵심 배경이 되어야 함에도 이명박 정부는 아무 말이 없다.
이를테면 공부가 꼴지였던 낙제생이 우등생이 되어 졸업을 할 경우 그동안의 면학 노력을 기념하게 마련이거늘 단지 졸업만을 언급하는 것처럼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근대화의 격렬한 발진, 5.16혁명

보자.
유럽3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진 1961년은 근대화 원년이다. 그해, 가난을 숙명으로 여겨 절망으로 흐느적거리는 민생에 충격을 가한 근대화의 격렬한 발진이 있었다. 5.16혁명이다. 그래서 근대화 원년이다.

군사혁명으로 역사에 돌발적으로 등장한 지도자 박정희.
그의 두려운 적은 북한이 아니었다. 오만한 미국도 아니었고, 어떤 야당 인사도 아니었다. 가장 두려운 적, 그래서 결연히 맞써 싸웠던 적은 바로 필리핀보다도, 말레이시아보다도, 버마보다도, 대만과 태국보다도 아득히 뒤떨어져 아시아에서도 바닥을 기는 나라, 산업구조의 7할이 농업이면서 해마다 춘궁기를 겪는 나라 대한민국의 가난, 굶주림, 그리고 희망없음이었다.
 
1961년 3월 전남도청이 공식집계한 도내 절량(絶糧)농가는 16만4천42호로 총94만6천명이 대책없이 굶고 있었다. 당시 언론은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실업자가 수백만을 헤아리는 가운데 서울시내 각 병원에 피를 팔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참담한 민생 현장을 보도하고 있다.

굶주림이란 어떤 것인가.
백범(白凡)의 일화가 있다. 일제말기 인천감옥에 갇혀 있었던 백범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지옥은 밥 굶는 것이다. 감옥에서 매맞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굶주림이 얼마나 지독한 고통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정치적으로 5.16은 군사정변이라 하지만, 굶주림과 무기력, 절망과 허무주의가 만연한 시공(時空)을 뒤흔드는 굉음이었다. 5.16은 가난과 절망에 반기를 든 역사 빅뱅이었다.

박정희 혁명정부가 맞딱뜨린 것은 흉년이었다.
-6월 22일(토) / 어젯밤부터 호우. 전국적으로 풍수해가 심하다. 보리 흉년에 벼 흉년이 겹칠 듯. 혁명정부 지도자 박정희 의장도 운이 나쁜 편이다. 내리 2년을 흉년이니.
1963년 여름날의 풍수해 상황을 기록한 방송작가 박서림의 공개된 일기 대목이다.


▲1963년 6월 27일 식량대책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는 박정희 의장. ⓒ KBS-TV가 방송한 대한뉴스 화면.

관공서마다에는 ‘기아 퇴치’ ‘절량농가 근절’이라는 국정지표를 써붙인 현수막이 내걸렸지만, 가혹한 흉년의 고통 앞에 민생고 해결은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 다급한 것이 식량난이었다. 그해 6월 27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식량난 해결에 관민이 함께 협력할 것을 호소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하면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국민을 굶기지 않을 것”이라고 울먹이며 다짐했다.

1967년 청와대 초청으로 모친과 함께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온 도산 안창호의 막내아들 안필영은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 만찬에 초청을 받았는데 박 대통령이 밀과 쌀을 섞어 지은 밥을 먹더군요. 깜짝 놀랐죠. 박 대통령은 국민들이 가난에 고통받는 게 마음 아프다고 했어요.”

그의 딸 박근혜는 어린 시절 가까이서 지켜본 아버지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60년대 가뭄이 심했던 어느날, 아버지께서 지방순시를 다녀오신 후 저녁식사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식사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왜 식사를 안하시냐고 물으시니까 한참동안 천장만 바라보시다가 말씀하셨습니다. 지방에 가서 만난 아이들이 얼굴에 온통 버짐이 피어 있었고, 빡빡 깎은 머리마다 기계충이 옮아 있었고, 그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먹지 못해서 얼굴과 손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고 하시고는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리셨습니다. 나가시는 뒷모습에서 아버지 어깨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저희 식구들은 그날 아무도 저녁밥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 속에 배어 있는 배고픔과 삶에 찌든 아이들 어머니의 슬픈 눈동자를 아버지께선 외면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 외면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렇게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2004년 3월30일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된 후 제17대 총선 방송연설에서) 

지도자 박정희의 일념이 무엇이었던가를 알 수 있는 얘기들이다.
그렇게 정말 열심히 일한 결과, 박정희 시대(1961~1979)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에서 1647달러로 20배 이상 급증했고, 61년 21억 달러에 불과했던 국내총생산(GDP)은 79년 616억 달러로 30배 가까이 늘었으며, 교역규모는 3억6천만 달러에서 354억 달러로 100배나 증가했다.
그동안 치약과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만들던 업체가 오늘의 LG가 됐고, 수원에서 비단을 짜던 영세기업 선경이 SK그룹으로 성장했으며, 대통령 박정희는 전자업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익을 위해 비호감의 기업인 이병철에게 반도체 사업을 허가, 오늘의 삼성전자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정주영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자동차, 조선, 건설을 아우르는 거대 왕국을 만들었다.
5.16혁명으로부터 50년, 주지하다시피 2011년 지금도 이들이 세계시장을 누비며 한국경제의 간판 역할을 하고 있다.


▲1979년 10월 8일 세종문화회관 전시장에서 개최된 ‘반고호와 네덜란드 명화전’을 관람한 박근혜씨가 반덴버그 주한 네덜란드 대사 등 관계자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 국가기록원


▲1984년 6월 16일 포르투갈의 마리오 소아레스 수상이 경기도 수원에 있는 삼성전자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 e영상역사관


▲1974년 6월 28일 현대조선이 그리스 해운업자 리바노스로부터 주문받은 대형 유조선 애트랜틱 배론호 진수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치사를 하고 있다. ⓒ 자료 사진

5.16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국가정체성 확고한 정권

5.16혁명은 역사의 분기점이었다. 그해 1961년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국민성을 바꾸고, 나라의 운명을 바꾼 대전환의 원년이었다.

하긴 5.16에 동의하지 않는 정치 군상(群像)이 있긴 하다. 전직 대통령 김대중의 예를 들어보면 이러하다.
박정희 시대를 언급한 〈김대중 자서전〉 1권 137쪽부터 386쪽까지를 보면 “5.16쿠데타는 명분이 없었다”, “5.16이 경제발전을 정체시켰을 수도 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민주당 계획을 베낀 것. 장면 정권이었다면 건전한 경제발전을 했을 것”, “경제성장은 조짐이 좋았을 뿐 그나마도 노동자 착취로 이루어진 것” 운운하며 전면 부정으로 일관하고 있다.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의 말을 들어보자.
“5천년의 역사를 바꾼 게 박정희야. 가난에서 가난이 아닌 것으로 바꾼 건 단군 할아버지와 맞먹는 힘이야. 우리나라에 차가 돌아 다니고, 고층빌딩이 서고, 지금 고기를 먹고 있는 것도 그의 덕이야. 그건 사실이고 리얼리즘이야.” (한국일보 2004년 12월29일)

정치와 아무 상관없는 한 작가의 평가가 이러하면, 김대중은 참으로 옹졸하고 궁색한 감정의 골짜기에 빠져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닐까. 김대중의 ‘박정희 시대 부정’은 국민 정서를 아랑곳하지 않는 독선적이고 저질스런 정치감정과 위선이 난무하는 정치판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어쨌거나 박정희 다음으로 대통령들을 모두 합쳐도 국민의 8할이 지지와 존경을 보내는 박정희에게 비교가 안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미당 서정주가 자기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듯이, 5.16혁명 이후 50년 동안 지도자 박정희를 만든 건 8할이 국민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5.16혁명을 “군인이 앞장서고 국민이 이룩한 것”이라고 말했다. (1967년 5.16민족상 시상식 치사)
돌이켜보면 5.16혁명은 단순히 군사정변으로 끝난 완료형이 아니다. 국민이 이루어야 할 근대화 과업의 미래진행형이었다. 모든 성과를 국민에게 돌린다는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해마다 4월이면 진해에 내려와 해군사관생도 졸업식에 참석하고 그 일대를 시찰하는 박 대통령이 1979년 4월 12일 따님 박근혜씨와 함께 진해공관 정원을 산책하는 모습이다. ⓒ 국가기록원

이번 박근혜 특사가 찾아간 유럽3국과의 수교50년을 기념하면서 이명박 정부가
“대한민국의 지난 반세기는 세계 최빈국에서 교역규모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으로 우뚝 섰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상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국민의 위대한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배경 설명과 함께 모진 세월을 가난과 싸우면서 국민이 흘린 땀과 눈물에 감사한다는 발표를 곁들인다면 얼마나 국민에게 위안과 새로운 용기를 주고 자긍심을 높일 수 있을 것인가. 그게 없다.

지난 반세기의 성과를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명박 정부, 왜 그럴까. 이명박 정부의 침묵은 역사의식의 빈곤 내지는 국가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입장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5.16혁명 반세기.
이제는 5.16혁명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국가정체성이 확고한 정권을 만들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때가 저 앞에서 국민을 기다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