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서독에서 흘린 박정희대통령의 눈물

여동활 2011. 5. 13. 23:06

[수암칼럼]  43년 전의 ‘코리아 엔젤' (2006.12.04 매일신문)

43년 전 1963년 초겨울, 북한보다도 못살고 가난했던 시절, 한국의 젊은이들이 줄을 이어 서독으로 떠나갔다.

閑暇(한가)한 해외관광이 아니었다. 부모 돈으로 가는 어학연수도 아니었다. 한 달 월급 100달러를 벌기 위한 품팔이 길이었다.

청년들은 탄광의 막장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시간 외 작업을 자청하며 몸이 부서지도록 괭이질을 했다. 어린 간호사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시골병원으로 파견돼 시체를 닦고 수의를 입히고 병자들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가난한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 젊은이들의 살려고 몸부림치는 근면과 헌신적인 모습은 금세 독일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어느새 서독국민들은 한국의 광부와 간호사를 ‘코리아 에인절(Korea Angel 천사)’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 천사들에게 감동받고 신세진 서독 국회의원들이 모여 한국의 경제 협력을 위한 ‘대정부 건의서’를 채택, 박정희 대통령을 정식 초청하게 된다.

그때가 파견 이듬해인 1964년 12월 6일. 내일모레면 꼭 42주년째가 된다. 당시 박 대통령과 ‘코리아 에인절’의 만남과 서독경제원조를 이끌어낸 사연을 수행 통역관의 회고를 통해 되돌아보자.

 

…박 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와의 회담 내내 손을 꼭 잡고 ‘돈(차관) 꿔 달라’는 얘기만 하고 또 했다. 2시간에 걸친 정상회담 중 1시간 30분 동안 박 대통령은 계속 차관 부탁만 했다.

 

“우리가 공산주의를 이기려면 경제를 발전시켜야 합니다.(당시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 남한은 87달러였다) 믿어주십시오. 우리 군인들은 절대 거짓말 안 합니다. 꼭 갚겠습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튿날엔 뤼프케 대통령과 함께 루르지방 탄광에서 광부들을 만났다. 탄광 막장에서 갓 나온 500여 광부들이 박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탄가루와 때에 전 작업복을 입은 광부들을 보자 대통령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아린 가슴을 진정시키던 대통령이 울음 섞인 말을 토해냈다. 그것은 연설이 아니라 痛哭(통곡)이었다. “여러분 이게 무슨 꼴입니까. 여러분의 새까만 얼굴을 보니 내 가슴에 피눈물이 납니다. 여러분, 아직까지 우리는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통령 先唱(선창)으로 모두가 애국가를 불렀다. 광부들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끝내 ‘대한사람 대한으로’ 구절에선 눈물바다를 이뤘다. 젊은 광부들은 ‘어머니’를 외치며 통곡했다.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고,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뤼프케 대통령도, 수행원들도 모두 다 같이 울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뤼프케 대통령은 눈물을 감추려 애쓰는 박 대통령을 위로했다. “각하, 울지 마십시오. 잘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뤼프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꺼내 박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 후 42년, 세상이 바뀌었다. 고인이 된 박대통령은 광부들에게 ‘후손들에게 잘사는 나라를 물려주자’한 약속을 지켰다. 지금 우리는 해외여행에 몇억 달러를 쓰고 힘들고 험한 일은 필리핀과 베트남 외국 노동자들에게 내맡기고 부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시체를 닦고 막장을 파면서도 애국가를 부르며 통곡할 줄 알았던 삶의 겸허함 대신 작은 불만에도 폭력시위로 끝장을 보려 드는 강퍅해진 이기주의와 좌파적 의식이 세상을 다시 거꾸로 바꾸려 하고 있다. 새삼 43년 전 ‘코리아 에인절’들의 눈물 어린 과거사를 회고하는 것은 철학이 빈곤한 지도자와 나의 성에 차지 않으면 남의 것은 물론 모두의 것조차도 부수고 깨고 불태우는 메마른 가슴을 추슬러 보자는 뜻에서다.

 

지금 우리는 너무 거칠고 메말라 가고 있다. ‘껍데기 이념에 함몰된 자들의 무능과 허세에 절망한 反動(반동) 탓인가.

’ 이제라도 다 같이 마음부터 추스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