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기억의 정치] [2] [5·16과 산업화 50년] "24시간 풀가동… 불도저에 기댄

여동활 2010. 6. 22. 09:26
정태수씨

현장소장 정태수씨가 말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노무자 12시간 2교대 강행군…
77명 목숨 잃기도 했지만 조국 근대화 초석 일궈"

"제가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달력에 표시를 했어요. 그런 날이 워낙 드물었거든요."

1968년 집에 들어간 날이 모두 22일이란 걸 정태수(79)씨가 기억하는 이유다. 그의 귀가를 막은 것은 그해 2월 1일 시작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사였다. 당시 현대건설 부장이었던 그는 현장관리 부소장(1968년)에 이어 소장(1969년)을 맡아 2년 동안 거의 매일 본의 아닌 외박을 해야 했다.

"공사 진척 상황을 점검한다며 정주영 사장과 건설부 도로국의 고속도로 담당인 허모씨가 새벽 5시 반에 교대로 시찰을 내려왔으니 현장을 비울 수가 있나요."

공사 현장은 군대 분위기였다. 현역 육군 장교들이 현장에 파견돼 고함을 질렀고, 정씨 같은 관리직들은 워커(군화)를 신고 공사를 독려했다. 건설부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구간별 개통 일자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현장은 24시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노무자들은 12시간씩 2교대로 일했다. 관리직들은 현장 사무실에서 3~4시간 새우잠이라도 자면 다행이었다. 잘 때도 작업화를 벗지 못하고 며칠씩 신고 있다 보니 발가락 사이가 붙는 일이 다반사였다. 강행군은 사고로 이어졌다.

"야간작업 때 '도자(불도저)'에 기대 야식을 먹던 일꾼이 있었어요. 하루는 그 친구가 피곤을 못 이겨 깜빡 잠이 들었는데 도자 운전기사가 그걸 못 보고 시동을 건 거죠. 도자 굉음이 워낙 요란하다 보니 비명소리도 묻혀버립디다."

2년 5개월간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77명이다.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부근엔 이들의 넋을 기린 위령탑이 서 있다.

이은상 시인이 지은 비문(碑文)엔 '그들은 실로 조국 근대화를 향한 민족 행진의 산업전사요, 자손만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라고 쓰여있다.

정씨는 "공사가 예정대로 추진된 건 이런 고귀한 희생 덕분"이라고 했다. 정씨는 서울 양재동에서 오산까지 약 40㎞ 구간을 1968년 12월에, 오산에서 천안까지 약 40㎞ 구간을 이듬해 9월에, 천안에서 청주 인터체인지 부근까지의 약 20㎞ 구간을 같은 해 말에 각각 개통시켰다. 현대건설을 포함해 총 16개 건설사가 참여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사는 대구~대전 구간이 완공된 1970년 7월 7일 마무리됐다.

"야당에서 고속도로 건설에 엄청나게 반대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걸 만들어 놓으면 하루에 몇 대나 다닐 거냐, 돈도 없으면서 그렇게 넓은 도로를 왜 만드느냐고 했죠."

실제로 개통 직후엔 하루 이용 차량이 1만대도 안 돼 야당의 '경부고속도로 무용론'에 힘이 실렸다.

"경부고속도로는 언젠가는 만들어야 하는 도로였습니다. 포항제철이니 울산의 조선소니 이런 대형 산업단지 건설도 경부고속도로 건설 후에야 가능해진 일이죠."

인터뷰 내내 거의 감겨 있던 노신사의 두 눈이 일순 커졌다.

"경부고속도로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시발점이 된 게 사실 아닙니까. 지금도 건설인들에게는 영원한 자부심으로 남아 있는 공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