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기억의 정치] [2] [5·16과 산업화 50년] "5·16 기점으로 원조받는 나라서

여동활 2010. 6. 22. 09:25
(왼쪽부터)김용환씨, 오원철씨.

'산업화 설계자' 김용환·오원철씨가 말하는 대한민국 산업화… 초기엔 경공업 위주로 개발, 산업 고도화와
안보 차원서 70년대엔 중화학공업 육성

1961년 5월 16일 새벽, 육군 소장(少將) 박정희는 '혁명공약'으로 "민생고를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하겠다"고 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청와대 1·2 경제수석을 지낸 김용환(78) 전 재무부장관과 오원철(82) 전 경제2수석은 "5·16은 한국식 산업혁명의 출발이었고 10여년 만에 민생고 해결 '혁명공약'을 완수했다"고 했다.

오원철 전 수석이 기억하는 5·16 이전의 한국 경제는 빈곤 자체였다. 그는 5·16 직후 상공부에 들어와 1971∼79년 경제2수석으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정책을 담당한 박정희 정부의 대표적 테크노크라트다. 그는 "5·16 공약으로 경제 재건을 내걸었지만 사실 당시 우리 경제는 재건하고 말고 할 게 없는 '거지경제'였다"고 회고했다.

박정희의 초기 구상은 다른 3세계 국가들이 걸어간 '민족경제론'적 성격을 띠었지만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1962∼1967년) 계획의 골자는 원조자금이 줄어든 만큼 수입물량을 줄이고 대신 국내 생산으로 이를 충당하는 수입대체산업 육성이었는데 국내 산업기반이 전무(全無)해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돌파구를 찾지 못한 박 대통령의 고민은 61년 7월 경제기획원 창설 이후 3년간 장관이 7번이나 바뀐 데서도 알 수 있다.

1970년 7월 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 대전 인터체인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전~대구 구간의 마지막 준공 테이프를 끊고 첫 시험주행을 하고 있다.

정부는 결국 수입대체형 '민족경제론'을 버리고 1963년 말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63년부터 재무부 이재(理財)과장·국장을 거쳐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용환 전 장관은 "가진 게 없는 우리에게 대안은 노동력에 기반을 둔 수출주도형 경공업개발 전략뿐이었다"고 했다. 오 전 수석은 이 대목에서 "여공(女工)들이야말로 대한민국 산업화의 의용군이었다"고 회고했다. 낮은 기술 수준을 가진 우리가 할 수 있는 산업은 섬유·운동화·가발 제조와 전자제품 조립 정도였고 이는 여공들의 몫이었다. 오 전 수석은 "정부는 64년 원화가치를 2배 절하시킴으로써 사실상 여공들의 국제 노임을 반으로 깎았다"고 했다.

이런 전략은 1964년 11월 30일 1억달러 수출을 이룩하면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64년 말엔 1억2000만달러를 수출해 43.2%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해마다 40∼50%의 수출 성장세를 이어간 우리 경제는 1968년엔 3억5859만달러를 수출, 1960년(3283만달러)의 10배를 넘어섰다.

우리 경제는 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 집중 육성에 나섰다. 여기에는 '경공업→중공업'으로의 산업고도화 전략뿐 아니라 안보 문제가 깔려 있었다. 닉슨 미 대통령이 1970년 2월 '아시아인의 안보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박 대통령은 위기감에 휩싸였다. 오 전 수석은 "전략물자로 전환되기 쉬운 중화학공업을 육성해놓으면 미국이 한국에서 쉽게 손을 떼지 못할 것이란 게 박 대통령의 판단이었다"고 했다. 김 전 장관은 "최근 원전(原電) 수출이 빛을 본 것도 당시 중화학공업 우선 정책으로 기틀을 다졌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