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담당관 맡았던 고건 前총리가 말하는 새마을 운동

여동활 2010. 6. 22. 09:27

담당관 맡았던 고건 前총리가 말하는 새마을 운동
"초기엔 냉소주의 팽배, 자율적 참여·경쟁 유발… 의식개혁·소득증대 꾀해"

"농촌의 80%가 초가집이었고 전기조차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농촌 절반에는 자동차는 물론 경운기가 들어갈 길도 마땅치 않았어요."

1970년 4월 박정희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제창할 무렵 한국 농촌은 산업화의 뒷길에서 빈곤의 악순환에 허덕이고 있었다. 1971년 초대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에 부임한 고건의 눈에 비친 농촌의 모습은 막막했다. 더욱이 60년대 정부가 추진한 국민 재건운동 등이 실패로 끝나면서 농촌엔 패배주의와 냉소가 팽배해있었다.

1972년 4월 농촌주민들이 새마을 깃발을 세워 놓고 도로 확장공사에 참여해 마을 길을 넓히고 있다.

새마을운동은 공업화를 목표로 한 경제개발계획의 성과로 재정적 여유가 생긴 정부가 전국 3만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5부대를 지급해 환경 개선사업을 추진하면서 시작됐다.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인정받아 75년 최연소(38세) 도지사에 발탁된 고 전 총리는 "새마을운동이 단순히 물자와 돈만 투입하는 방식이었다면 실패했을 것"이라며 "공동체 의식을 기반으로 한 협동과 농민의 자율적 참여, 경쟁을 유발하는 의식개혁과 소득증대를 동시에 꾀하는 전략을 택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정부는 마을에 물자를 지원하면서 마을 공동사업에만 쓰도록 제한했다. 대신 사용 명목을 정하지 않아 주민 스스로 사업의 종류를 선택하게 했다. 그는 "성과가 있는 마을에만 다시 지원하는 '자조(自助)'의 원칙을 고수해 마을 간의 경쟁적 참여를 유도할 수 있었다"고 했다. 농촌도 서서히 바뀌었다. 정부 추산으로 1971~78년 5519억원을 투자해 1조9992억원의 성과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8만5000㎞의 농로가 건설돼 트랙터가 들어갔고 정부의 지원이 거의 필요없는 자립·자조 마을이 5년 사이 90%에 육박했다. 농한기에 새마을사업에 집중하면서 음주와 도박 풍조도 상당히 사라졌다. 고 전 총리는 "당시 마을마다 화투 화형식이 열릴 정도로 잘살아보자는 열망이 강했다. 경제운동이자 정신개혁 운동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