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박정희대통령,,바오밥나무를 생각하며 미국을 생각한다

여동활 2010. 2. 17. 20:36

바오밥나무를 생각하며 미국을 생각한다
2010-02-13 정재학(데일리안 편집위원)

필자(筆者)는 TV 프로그램에서 자연과 동물을 다룬 내용, 특히 ‘동물의 세계’를 즐겨본다. 그리고 장면이 아프리카가 되면, 초원 한 가운데 거대한 높이의 바오밥나무를 경이롭게 바라본다. 그리고 그때마다 미국을 떠올린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바오밥나무는 아낌없이 주는 평생친구이다. 초식동물들이 나무껍질을 모두 뜯어먹어 홀랑 벗겨져도 살아남는다. 큰 상채기를 흉물처럼 달고서도 굳굳하게 서있는 늙은 바오밥나무를 보면, 참으로 감탄스럽다. 그래도 때가 되면 엄청나게 큰 열매를 매달고 초식동물들을 부른다.

열매의 과육은 청량음료로, 어린잎은 식용, 종자는 식용 혹은 약용, 나무껍질은 섬유재료로 쓰인다. 넉넉한 그늘은 쉼터가 되고, 껍질은 밧줄과 낚싯줄로 쓰인다. 우기(雨期)엔 몸통 가득 빗물을 품어 두었다가 건기(乾期)엔 물을 내어 갈증을 풀어준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원주민은 바오밥나무를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 부른다.

1961년 5.16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의장은 “불이 난, 폐가(廢家)를 인수하였구나”라고 하였다. 폐가를 연상할 만큼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은 우리 대한민국의 바오밥나무였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고, 돌볼 길 없는 전쟁고아들까지 데려다 길러주었다. 학교에서는 옥수수 빵과 죽, 가루분유와 옷 등이 배급되었다. 그리고 도로확장 공사 같은 공공사업장에서 미국산 밀가루가 노임으로 주어졌다. 우리는 그것으로 허기를 채우고 공부를 하였다. 그렇게 필자(筆者)가 어린 시절 겪은 풍경 속에는 항상 미국이 있었다.


▲박정희 의장의 호소. 최악의 식량난이 닥친 1963년 6월, 구호양곡 긴급방출을 지시한 박 의장은 대국민 담화를 통하여 미국의 잉여농산물 도입 계획을 발표하면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국민을 굶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식량난 해결에 관민이 협력해 달라고 호소했다. ⓒ KBS-TV의 대한뉴스 화면 캡처

좌익들은 일제히 이렇게 미국을 비난한다.
“미국이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를 도와준 줄 아느냐. 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우리를 식민지 취급하지 않았느냐”고 한다.

어이없는 이야기다. 미국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고아까지 길러주었겠는가. 변변한 천연자원 하나 없는 대한민국에 미국이 얻을 이익이라면 그 이익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좌익들 말대로 우리를 식민지 취급했다면, 미국이 총독부를 설치해서 일본처럼 우리를 다스렸다는 말인가.

휴전 후 미국은 전쟁복구사업에 적극적으로 원조해주었고, 막대한 경제원조를 통해서 우리 국민을 먹여 살렸다. 1954년부터 1960년까지 8개년 동안 원조해준 액수는 무려 20억 8,834만 달러에 달한다. 지금의 화폐가치로 본다면 200억 달러가 넘는 액수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제는 암담하기만 했다.

1960년도 나라 살림을 한번 살펴보자. 1960년도에는 3,283만 달러를 수출하고 3억 4,353만 달러를 수입했으니, 우리나라는 10:1의 심각한 무역역조국가였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나라였다.

당시 수출품도 조악하기 짝이 없는 1차 산업 상품들이었다. 심지어 돼지털도 수출하였을 때다.
1)돼지, 어개류(魚介類), 김, 쌀 등 식료품이 970만 달러
2) 흑연(黑鉛), 중석(重石), 철광석(鐵鑛石) 등 광산물과 생사(生絲), 돈모(豚毛), 한천(寒天) 등 비식용 원료가 1,582만 달러
3) 무연탄 등 광물성 연료가 115만 달러 등 천연자원이 대부분이고
4) 공산품으로는 합판, 면직물이 394만 달러 정도였다.

수입 내용을 보면, 더 정확히 당시 우리의 형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 밀, 보리, 원당 등 식료품이 3,156만 달러
2) 원면, 양모(羊毛), 목재, 생고무 등 비식용 원료가 6,850만 달러
3) 석유류 등이 2,296만 달러
4) 비료, 의품, 염료(染料), 합성수지 등 화학제품 등이 7,613만 달러
5) 시멘트, 철판 등 금속제품, 지류(紙類), 직물사(織物絲) 등 원료 및 제품이 4,704만 달러
6) 수송기계, 섬유기계, 전기기계, 통신기계 및 동 부속품 수입이 4,009만 달러 등으로서 국민의 생필품과 밀접하게 관계되는 것뿐이다. 수입하지 않으면 국민의 의식주 문제가 심각해질 때였다.

이 무역역조의 차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다고 보는가. 당시 정부 보유 달러로 지불한 것이 9,717만 달러, 공공원조(구호자금 포함)가 2억 4,636만 달러였다. 즉 우리나라는 71.7%를 미국 원조에 의존했다는 뜻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1960년의 외환 수입을 보면, 수출이 3,280만 달러인데 비해 정부 수입이 7,030만 달러나 된다. 수출액의 2배가 넘은 액수이다. 이 항목은 UN군의 한국주둔으로 인해 벌어들이는 달러 6,260만 달러가 포함된 금액이다. 그래서 1960년도의 달러 수입은 1억 1,690만 달러가 됐고, 수입대금 9,717만 달러를 결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정부는 미국원조(대충자금) 없이는 국가 경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957년에는 원조자금 액수가 3억 8천만 달러까지 됐으나, 1959년부터는 2억 달러 수준으로 떨어졌고, 1961년에는 2억 달러를 밑돌게 됐다. 그래도 우리나라 전체 예산의 52%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원조가 줄어든 결과 우리나라 경제는 곤경에 처하게 됐고, 국민생활은 더욱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국가적 위기감이 팽팽해졌다.

그래서 박정희 의장은 혁명 후 “마치 폐가(廢家)를 인수한 것과 같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가난과 위기를 헤치고 박정희 대통령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이 위대한 영도력에 대하여 지금까지 깊은 사의(謝意)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그 불타는 초원에서 모든 생명들에게 물어뜯기고 껍질을 벗겨내어도, 기어이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고 풍성한 열매를 주는 바오밥나무.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물론 전쟁고아들까지 데려다 길러주었던, 아낌없이 우리를 도와주던 과거 미국의 모습이었다. ◎

출처 : 데일리안 2010-02-13   조회수 :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