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박정희대통령,우리 군 독자적 전력증강 계획 수립

여동활 2010. 2. 8. 21:35

철모에서 미사일까지] K-21 보병전투장갑차 (4) 70년대 상황과 연구개발

우리 군 독자적 전력증강 계획 수립
신인호 기자 idmz@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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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호국훈련 중 도시방어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육군수도방위사령부 소속의 KM900.             국방일보 사진 DB.

1978년 대한민국 최초 유도탄인 백곰의 시험발사를 지켜보는 박정희 대통령.                             국방일보 사진 DB.


 1968년 1월 북한의 1·21 청와대 기습사건과 미 해군 푸에블로함 납치사건, 그리고 1969년 7월 미국 닉슨 대통령의 이른바 ‘닉슨독트린’ 등은 한국으로 하여금 자주국방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됐다. 이에 70년 1월 19일 국방부를 연두 순시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력을 배양하기 위해 방위산업 육성과 국방과학기술의 연구발전이 시급함을 강조했다. 이어 2월 2일 방위산업 육성을 전담할 부서 설치를 국방부장관에게 지시함에 따라 70년 8월 6일 무기체계 연구개발 사업을 수행할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창설됐다.

 박 대통령은 71년 1월 다시 국방연구개발 및 방위산업 육성에 관한 70년대 목표를 제시한다. 70년대를 통해 방위산업육성과 국방연구개발 업무수행의 포괄적인 기본지침이 되고 병기 국산화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제3차 경제개발 5***계획이 끝나는 76년 말까지 최소한 이스라엘 정도의 자주국방태세를 갖출 것을 목표로 총포·탄약·통신기·차량 등 기본 병기를 국산화한다는 것이며 이어 제4차 경제개발 5***계획이 끝나는 80년대 초까지 전차·항공기·유도탄·함정 등 정밀무기의 국산화 능력을 보유한다는 것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박 대통령이 제시한 목표에 따라 그해 연구개발목표를 ▲현 전력 최대 유지를 위한 병기 장비 및 물자의 연구개발 ▲대간첩작전 수행에 최적의 병기·장비·물자의 연구개발 ▲자주국방올 위해 장기간의 연구개발이 요구되는 병기 장비 및 물자의 연구개발 등에 두고, 총 23개의 과제를 선정했다. 그러나 같은해 11월 번개사업이 개시됨으로써 이 같은 연구개발과제의 일부는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번개사업은 박 대통령의 병기 국산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기 때문에 이에 연구개발 우선순위가 주어졌던 것이다.

 번개사업은 박정희 대통령이 71년 11월 9일 청와대 비서실장을 통해 신응균(申應均) 국방과학연구소장에게 긴급병기개발 지시를 구두로 전달한 것이 그 시작이다. 국방과학연구소는 71년 11월 17일부터 개발 대상 장비를 선정, 그 대상 장비의 기술자료묶음(TDP)을 미국으로부터 도입해 이를 한국화하는 방법, 견본장비를 역설계하고 이를 시험제작한 후 기술 및 운용시험을 거쳐 양산하는 전형적인 모방개발방식으로 진행했다.

 비록 모방개발 방식이라 해도 당시 우리나라 여건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국방과학연구소는 72년 6월 말까지 3차에 걸쳐 번개사업을 추진하면서 박격포·로켓발사기와 통신장비 등을 군사원조품 못지 않게 개발함으로써 기본 병기의 국산화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방부도 박 대통령의 의지에 발맞춰 72년 12월 29일 국방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있는 ‘국방목표’를 처음으로 제정한다. 이때까지 국방목표라는 것이 없었던 까닭은 6·25전쟁 후 60년대 말까지 우리 군의 전력이 미 군사원조에 의해 크게 운영 유지된 까닭에 연도별로 국방부의 기본시책에 따라 국방 목표와 방침을 설정하고 업무를 추진했던 것이다.

 제정된 국방목표는 ①국방력을 정비 강화해 평화통일을 뒷받침하고 국토와 민족을 수호한다 ②적정 군사력을 유지하고 군의 정예화를 기한다 ③방위산업을 육성해 자주국방체제를 확립한다는 내용이다. 이 국방목표에 따라 수립된 73년도 국방시책에 비로소 연구개발과 방위산업에 관련한 사항이 나오는데 ‘국방 기술을 발전시켜 무기체계, 장비 및 물자의 연구개발과 군수물자 국산화를 위한 잠재 역량을 배양하고 유사시 민수 산업을 방위산업으로 신속히 전환할 수 있는 체계를 연구개발’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한편 주한 미7사단이 철수하고 이에 따른 전력 보완책으로 한미 간 합의로 이뤄졌던 71~77년까지의 ‘한국군 현대화 5*** 계획’이 73년부터 지원상태가 부진해졌다. 이에 박 대통령은 73년 4월 19일 ‘을지연습’ 중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를 순시하면서 ▲자주국방을 위한 군사전력 수립과 군사력 건설 착수 ▲미군으로부터 작전지휘권 인수에 대비한 장기 군사전력 수립 ▲고성능 전투기와 미사일 등을 제외한 주요 무기·장비의 국산화 ▲독자적인 군사전략과 전력증강 계획 수립 등을 지시했다. 이는 우리 군의 독자적인 전력증강계획을 수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합참은 당시 합참본부장인 이병형 장군을 중심으로 7월까지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군사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합동기본군사전략 ’ 초안을 작성하고 이어 육·해·공군에서 건의된 군장비 현대화 계획(안)을 종합해 최종안을 수립, 74년 1월 16일 합동회의에서 의결했다.

 국방부는 다시 이 안을 토대로 제1차 전력증강계획을 수립, 2월 25일 박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최초의 자주적 전력증강계획을 확정했다. 이것이 바로 율곡사업으로 당초 74년부터 80년까지 7년간을 계획했으나 제4차 경제개발 5***계획과 연계성을 유지하고자 81년까지로 1년 연장했다. 이를 계기로 군과 국방과학연구소는 연구개발사업에 대한 관리체제도 확립하게 된다. 번개사업 후인 73~74년에도 국방과학연구소는 청와대 하달 업무계획, 국방부 하달 연구개발목표 및 과제 우선순위, 그리고 합동참모본부의 합동연구개발목표계획서(Joint Research & Development Objective Directives)에 의한 사업계획과 예산편성지침에 따라 수행됐으나 74년 이후에는 합동연구개발목표계획서만이 연구개발과제를 선정하는 지침이 된 것이다.

 율곡사업은 한미 연합 억제전략을 기본 바탕으로 삼고 대북 방위력 확보에 역점을 뒀다. 조기경보 방공강화, 항공 및 해군 전력 증강, 보병사단 개편 및 무기·장비 교체, 포병화력 증강, 공중기동 능력 확보, 국방연구개발과 방위산업 육성 등이 주 내용을 이루었다.

 육군은 이 시기에 사단전력을 전투사단·예비사단 개념에서 전투사단, 전투준비(교육)사단, 후방경비사단 개념으로 개편하고, 화력과 기동력을 증강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개인화기를 M1에서 M16소총으로, 공용화기는 M60으로 교체하고 M48계열의 전차는 한국형으로 개조하며, 야포도 신형 개량포로 장비하는 등의 사업을 진행했다.

 전회에 언급했던 차륜형 장갑차 KM900(CM6614)이 국산화에 돌입, 배치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이탈리아의 피아트 사와 오토브레다 사가 공동 개발한 이 장갑차는 승무원 2명을 포함해 총 11명이 탑승할 수 있다. 차체에 총안구와 관측구가 설치돼 보병이 승차한 상태에서 관측과 사격이 가능토록 돼 있다.

하지만 운용성 면에서 적 특수부대의 침투에 대비해 대(對) 게릴라 작전용으로 도입된 만큼 후방부대와 공군기지방어용으로 운용되는 데 그쳤다. 차륜형 장갑차가 갖는 단점, 즉 야지에서 기동력이 떨어지고 방어력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같이 산지가 많은 전방 지역에서는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음으로써 이후 우리 군 장갑차의 주류(主流)에서 비켜서는 존재가 됐다.

 다만 연구개발 측면에서 국방과학연구소는 KM900장갑차의 면허생산 과정에서 전술타이어 등 부품 국산화율을 65% 정도 이룬 가운데 고강도 재질의 압정장갑판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는 성과를 거뒀다.

KM900 차륜형 장갑차 제원
제 원 특 징
중 량 8.4톤 엔 진 6기통 디젤
전 장 5.86m 변 속 기 전진 5단 후진 1단
전 폭 2.5m 중간변속기 2단
차 고 1.78m 차 축 4륜 구동식
출 력 145hp 무 장 7.62mm 기관총
최고 속도 100km/h 승 무 원 2명
수상 속도 4.5km/h 탑 승 원 9명
항속 거리 700km 총안 및 관측구 설치
등판 능력 60% 생 산 아세아자동차
2010-02-08 09:5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