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분단 후 30년 가까이 북한에 뒤졌던 부끄러운 역사 때문이다.

여동활 2010. 2. 8. 09:18

[김진의 시시각각] ‘빠른’ 회담만큼 ‘바른’ 회담을 [중앙일보]

2010.02.07 20:56 입력 / 2010.02.08 04:04 수정

동독과 북한은 똑같이 1945년에 분단 공산국이 되었다. 그러나 동독은 여러 면에서 북한과 달랐다. 상대방을 침략하지도, 상대국 장관들을 죽이지도, 지하에서 핵폭탄을 터뜨리지도 않았다. 같은 독재지만 동독에는 세습도 강제수용소도 없었다. 굶어 죽는 인민도 없었다. 동독은 체제의 유연성도 북한과 달랐다. 70년 동독 에어푸르트에서 첫 정상회담이 열렸다. 동독인 수천 명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묵고 있는 호텔로 몰려갔다. 그들은 감격적으로 외쳤다. “빌리, 빌리!” 평양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북한이 동독과 다르기 때문에 남북의 정상회담은 동·서독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90년 통일 때까지 동·서독 정상회담은 네 차례 있었다. 70년 첫 회담은 세계인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닉슨의 중공 방문(72년)보다 2년 앞서 냉전의 동토(凍土)에 싹이 튼 것이다. 하지만 극적인 걸로 따지면 남북정상회담이 더할 것이다. 남북이란 무대 세트(set)가 동·서독보다 훨씬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한쪽에선 산업화·민주화라는 문명의 진보가 이루어졌다. 다른 쪽에선 기아와 탄압이라는 문명의 퇴보가 진행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한국인에게는 더욱 더 드라마틱하다. 분단 후 30년 가까이 북한에 뒤졌던 부끄러운 역사 때문이다. 73년 어느 날 남산 중앙정보부. 박정희 대통령과 장관·수석비서관들이 북한의 선전영화를 보았다. 필름이 돌아가자 제철·석유화학 등 북한 공업의 발전상이 펼쳐졌다. 중화학 담당 경제수석이었던 오원철씨는 이렇게 회고한다. “상영이 끝나고 불이 켜졌는데 대통령의 재떨이에 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더군요. 대통령이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그렇게 줄담배를 피웠겠습니까.” 이날의 우울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남한은 곧 북한을 따라잡았고 격차는 가위처럼 벌어졌다. 지금 자유대한의 국민총소득은 공산북한의 38배다.

50~53년 한국전쟁은 승패 없이 끝났다. 그러나 반세기 체제전쟁은 남한의 일방적인 승리다. 그러므로 남북정상회담은 한국의 대통령이 당당한 전승국 지도자로 패전국의 패장(敗將)을 만나는 것이다. 혹자는 “북한이 핵을 개발했고 막강한 재래전력이 있는데 무슨 패장이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남한의 경제력과 한·미 연합전력을 고려하면 전쟁은 북한의 멸망을 의미한다. 무슨 수단으로도 생존의 길이 어려운데 그런 것이 역사의 패전국 아닌가.


체제전쟁의 승전국 남한의 지도자는 남북정상회담에 당당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정권의 두 차례 회담은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 정권은 거액의 뒷돈을 주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무너져 내린 권위의 파편 더미 속에 있었다. 남한의 다수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한 대통령을 북한 권력자가 존중했을까. 회담이 성사되면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 지도자를 만나는 최초의 보수정권 대통령이 된다. 이승만·박정희가 다져놓은 보수정권이 국가의 틀을 닦고 공산침략을 막아내고 경제발전을 이뤘다. 이 대통령은 이런 정신을 이어받아 당당하고 기품 있게 북한 권력자를 만나야 한다.

정상회담은 북한을 변화시키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지금처럼 북한이 ‘선택의 순간’에 몰릴 때엔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김정일이 회담을 존중하고 남한 대통령을 두려워하도록 해야 한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북한이 회담에 더 적극적이라고 한다. 그만큼 사정이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북한을 원칙으로 다루니 북한이 변하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바로 얼마 전 핵·국군포로·납북자가 회담의 중요 조건인 것처럼 국민에게 얘기했다. 그런데 최근 여기에서 후퇴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혹시 대통령의 마음이 내용보다는 속도 쪽으로 기우는 건 아닐까. 대통령은 속도만큼 실질과 모양도 중시해야 한다. 시기를 놓치지 않는 ‘빠른 회담’만큼 ‘바른 회담’도 중요하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