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박정희 정권 핵개발 책임자 오원철 전 수석, 30년 만에 입 열다

여동활 2010. 1. 12. 18:38

[주간조선] [최초 공개] 박정희 정권 핵개발 책임자 오원철 전 수석, 30년 만에 입 열다

 

photo 이경호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核 봉투 2개 봉인해 최규하에 전달… 신군부가 美에 넘겼을 가능성”

한국전력이 총 건설비 200억달러에 달하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원자력발전소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원자력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정부가 원전 개발에 착수한 지 40여년 만에 프랑스 등 원전 선진국의 기술력을 따라잡은 것은 물론이고 세계에서 6번째 원전수출국이 되는 쾌거를 이뤘기 때문이다.

한국이 ‘원전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출발점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마련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미국의 감시와 견제 속에 원전 기술 확보에 주력했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이 원전 기술을 확보해 핵무기를 개발하려 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아직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지만 실제 박정희 정권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과 관련 문서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노력은 박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중단됐다. 핵무기뿐 아니라 원전 개발 노력도 중단됐다. 한국이 다시 원전 개발에 뛰어든 것은 이후 10여년이 지난 노태우 정권 때였다.

‘원전 강국’ 한국의 초기 원전 개발사에는 상당한 우여곡절과 비밀스러운 사연들이 담겨있다. 박정희 정권 당시의 핵무기 개발이 실제 어느 정도까지 이뤄졌는지, 관련 성과물과 기록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원전 개발의 총괄 책임자는 오원철 전 청와대 제2경제수석이다. 오 전 수석이 당시 핵무기 개발 비사(秘史)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주간조선과의 수차례 인터뷰에서 “우리는 당시 핵무기 기술과 관련해서 일본 정도의 기술력을 확보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임무를 수행했다”며 “그러나 국가기록원에 있어야 할 핵무기 관련 문서는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사라져 버렸다”고 주장했다. 오 전 수석과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원전 초기 개발사와 핵무기 개발에 관련된 숨겨진 이야기들을 정리했다.

1972년 초 “핵무기 기술력 확보하라” 주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핵무기와 관련된 구상을 한 것은 1970년 중반 무렵이었다. 미군 철수 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부상하자 안보 차원의 대안을 모색하다 ‘결단’을 내렸다. 박 전 대통령은 1972년 초 김정렴 비서실장과 오원철 경제수석을 집무실로 부른 뒤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 기술을 확보하라”고 주문했다. 당시 국내에서도 중수로형 원자로 건설이 가능한 수준의 기술력은 확보된 상태였다.

총괄 책임은 오원철 전 수석이 맡았다. 방위산업 분야 총괄 책임자였던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등 기존 연구기관을 동원해 핵무기 개발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한 극비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국방과학연구소 등 전문 인력을 갖춘 7개 연구기관에 각각의 연구과제를 지시했다.

당시 연구진은 국내에서 우라늄 조달이 가능한지, 플루토늄 재처리 설비를 갖출 수 있는지도 검토해 기초 자료를 만들었다. 국방과학연구소를 비롯한 여러 연구 기관에 과제를 분산해 맡긴 것은 미국의 감시와 견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핵무기를 만들려고 한다’는 강한 의구심을 품고 ‘정보원’을 동원해 청와대와 유관 연구시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청와대의 가장 큰 고민은 보안 문제였다. 국방과학연구소에 연구를 통째로 맡길 경우 다수의 연구원들이 핵무기 개발을 인지하게 되고 결국 보안을 유지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청와대가 지시한 연구 과제가 핵무기 개발을 위한 용역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여러 곳으로 분산해 진행했다. 7개 프로젝트를 하나로 연결하는 청와대의 컨트롤 타워에서만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하게끔 운영했다.

오 전 수석은 “미국은 1975년 우리가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와 교섭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국내로 들여오는 국방 관련 기자재를 일일이 검색했다. 하지만 여러 파트로 쪼개서 진행되는 연구개발 방식으로 인해 미국이 핵무기 개발의 확실한 물증을 잡아내는 데는 실패했다”고 말했다.

핵무기 관련 연구 과제가 진행되는 동안 각 연구소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는 모두 박 전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보고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됐는데 기술진들이 직접 올린 기술적 보고서와 오 전 수석이 작성한 추진 계획 및 진행 상황에 대한 보고서였다.

안보에 관심이 높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오른쪽에서 세 번째)은 방위 산업 현장을 수시로 시찰했다. / photo 조선일보 DB
“핵무기 거의 완성 단계까지 갔다”

1972년 9월 8일 오 전 수석이 작성한 보고서 중 일부는 국가기록원의 정보공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된 바 있다. 2급 비밀문서로 분류된 이 문건에는 ‘핵무기의 종류 및 우리의 개발 방향’ ‘우라늄 탄두와 플루토늄 탄두에 대한 장·단점 비교’ 등 개괄적 내용과 함께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으로 보아 플루토늄탄을 개발한다’는 잠정적 결론이 담겨있다. 이 문건은 박정희 정권 당시 핵무기 개발이 추진됐던 결정적인 근거 자료 중 하나다. 그러나 연구 실무진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현재 국가기록원에서도 찾을 수 없다. 보고서에는 핵무기 개발의 기술 관련 내용이 담겨있다. 이들 보고서는 일종의 ‘실종’ 상태라는 것이 오 전 수석의 주장이다.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청와대의 대통령 개인금고에 보관 중이던 핵심자료들이 어디론가 유출됐다는 것이다. 오 전 수석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박 대통령 서거 직후 수석비서관들이 청와대에 모였다. 대통령의 서재 뒤편에 있던 풍금 크기만한 금고를 열었다. 거기에는 여성 월간지 크기의 노란 봉투 2개가 들어 있었는데, 핵무기 관련 보안 문서가 담긴 봉투였다. 문서가 더 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담당자였던 나는 해당 문서를 봉인해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넘겼다. 이 문서들은 나중에 신군부에 전달됐다고 들었다. 내가 작성했던 핵무기 관련 일부 문서가 보통 문서로 분류돼 (국가기록원을 통해) 일반에 공개된 것을 알고 다른 핵무기 관련 문서들을 영구 비밀문서로 바꾸기 위해 국가기록원에 갔을 때는 노란 봉투 속에 담겨 있던 문서들이 보이질 않았다. 외부로 유출된 것 같다. 그게 미심쩍은 대목이다.”

오 전 수석은 “당시 핵 관련 문서는 미국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폈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금고에 항상 일정 금액 이상의 현찰과 함께 핵 문서를 보관해 왔는데 박 대통령 서거 후 수석비서관들이 금고를 열었을 때는 금고 안에 단 한 장의 지폐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 전 수석은 “노란 봉투 속 문서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질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 누군가가 먼저 손을 댔다는 의구심을 품었지만 더 이상 금고에 대해서는 재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라늄 농축용 ‘옐로 케이크’ 박 대통령에 전달"


우라늄 농축에 사용되는 ‘옐로 케이크(정제우라늄)’.
당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는 완성단계까지 진행됐다. 박 전 대통령은 10·26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우라늄농축용 분말로 노란색인 ‘옐로 케이크(yellow cake·정제우라늄)’를 선물받았다고 한다. 당시 정부는 핵연료 재처리를 금지한 미국과의 원자력 협정에도 불구하고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 개발도 이어갔다. 박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 우리 기술진은 우라늄이든, 플루토늄이든 핵연료를 100% 확보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 전 수석은 “KIST 출신의 한 인사가 노무현 정부 시절 과거 우리 기술로 만든 ‘옐로 케이크’를 보관하고 있다가 미국에 들켜 큰 변을 치른 적이 있었다”며 “당시 정부가 떳떳하게 대응하기는커녕 그걸 (미국에) 설명하느라고 쩔쩔매 한심하게 느껴졌다”고 지적했다.

핵무기 기술 개발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던 1970년대 말 박 전 대통령은 핵을 무기화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 위해 김정렴 비서실장, 오원철 경제수석, 서종철 국방장관, 국방과학원(ADD) 책임자 등 4명을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당시 상황에 대한 오 전 수석의 설명이다.

“이날 (핵무기 관련) 결정은 아주 중요한 내용이었다. 핵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의지가 담겼고 거기서 나눈 대화와 결정사항은 문서로 남겼는데 이 문서도 사라진 노란 봉투 속에 들어 있었다. (당시 대화) 내용은 기자분이 아무리 물어봐도 공개할 수는 없다. 다만 아주 긍정적인 내용이었다는 점만 알아 달라.” ‘긍정적인 내용’에 대해 오 전 수석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오 전 수석은  “박 대통령은 북한과 달리 평화를 지키기 위한 핵 이용을 줄곧 강조해 온 분”이라며 “핵무기만을 고집하는 지금의 북한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접근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런 의미를 강조하듯 상징적 차원에서도 핵무기 관련 문서에 일절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자력 기술 국산화 놓고도 미국과 신경전

오 전 수석은 이명박 정부가 나서 성사된 UAE 원전 수주와 관련 “이번 원전 수출은 박정희 대통령이 토대를 잡아 놓은 원전 기술이 진정한 ‘무궁화 꽃’을 피운 결과”라고 말했다. 오 전 수석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이 원전 기술을 확보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국내 원자력 역사는 이승만 대통령 당시인 1956년 2월 한·미 간 체결된 ‘원자력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쌍무협정’에서 출발한다. 이후 한국은 1957년 8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했고 1958년 3월에는 원자력법을 공표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원자력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이러한 의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 3월 차관 도입을 통해 마련한 재원으로 국내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원전 개발과 관련된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은 수시로 발생했고 갈수록 농도도 짙어졌다.

1970년대는 국제사회에서 핵무기 등 대형 살상무기를 제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던 시기다. 1975년 인도에서 핵실험 성공 사실을 공표하자 미·소 열강의 핵무기 개발 확산을 막기 위한 압박은 한층 강화됐다. 당시 한국도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핵무기 개발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를 간파한 미국은 한국 원자력 기술개발 전 과정을 철저히 통제했다.

미국의 견제 속에서도 한국은 1970년 6월 국내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1호기’ 계약을 미국과 성사시켰고 1972년에는 프랑스와 플루토늄 재처리기술 및 시설도입에 관한 교섭도 추진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의 재처리 시설 도입은 반대했다. 미국은 유사 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서전트(Sergeant) 미사일부대를 철수시키겠다며 압박을 가했다. 미국은 한국이 캐나다로부터 농축우라늄을 활용하는 원자로 수입을 추진할 때도 캐나다에 압력을 가해 무산시켰고, 고리 2호기 건설을 위한 차관 도입 승인조차 보류했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197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 인준함으로써 미국의 압력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원자로 개발을 둘러싼 대미 외교전은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방한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오 전 수석은 “경남 창원에 건설되는 대규모 원자로 생산 시설에 대해 미국이 강한 의구심을 품었고 카터 대통령까지 직접 현장을 방문하려 했었다”고 말했다. 카터 대통령의 창원 방문은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수십 명의 백악관 의전비서관이 카터 방한에 앞서 창원 현지를 찾았다고 한다. 오 전 수석은 “카터는 박 대통령을 만나고 난 후 야당 총재를 만났다. 당시 우리 정치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이 야당 총재를 만난다는 것은 ‘나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카터의 방한 4개월 뒤 박 대통령은 핵심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알에 사망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미국의 견제와 감시 속에서도 원자력 개발과 관련된 적지 않은 성과를 남겼다. 미국의 반대로 중도 폐기된 재처리시설을 제외하고 고리 1·2호기, 월성 1·2호기, 핵연료봉 공장 등의 원전시설은 모두 착공됐다. 원자로와 원자력 발전기기의 국산화 계획을 위한 연구소도 활성화됐고 창원기계공업기지 내에 원자로 가공공장도 건설됐다.

1972년 9월 8일 오원철 전 수석이 작성한 핵무기 개발 관련문서.
신군부 집권 후 원자력 기술개발 ‘올스톱’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국내 원자력 분야 기술개발은 사실상 중단됐다. 오 전 수석은 그 배경에 대해 “신군부가 정권 창출의 명분을 얻기 위해 미국의 눈치를 보며 각종 요구를 수용한 탓”이라고 분석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원자력이라는 명칭조차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원자력연구소를 에너지연구소로 바꾸고 한국핵연료㈜도 나중에 한국원전연료로 변경했다. 국방산업의 핵심이던 ADD 소속 연구원은 800명(당시 ADD 연구원은 총 1000명 규모)이나 잘랐다. (미국과) 뭔가 딜(Deal)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신군부가 집권한 시기에 원자력 산업은 최소한의 동력마저 상실했다. 핵 관련 주요 문서는 사라졌고 당시 연구자들과 기획자는 대부분 일자리를 잃었다. 박정희 정부 때 청와대 핵심 인사들은 철저하게 격리됐고 보안당국의 감시 속에서 10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다. 당시 핵 관련 일부 담당자에 대해서는 ‘포살해야 한다’는 의견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원전 건설의 핵심 부품공장이던 창원 소재 현대양행㈜도 정권과 여론의 비판에 밀려 사실상 공중 분해됐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동생이 일군 현대양행은 전두환 정권 시절 현대가의 손에서 떠났고 이후 한국중공업을 거쳐 지금은 두산중공업으로 탈바꿈해 있다.

이후 ‘원자력’이라는 단어가 다시 부활하기까지는 13년의 세월이 걸렸다. 노태우 정권은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국내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자 다시 원자력 발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수 에너지 확보 차원의 접근이었을 뿐 ‘핵주권’과는 거리가 있었다.

특히 핵무기에 대해서는 이후 어느 정권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일본이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을 확보하고 기술개발에 나선 것과 달리 우리는 관련 시설을 도입하지 못한 채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와 관련 오 전 수석은 “원전수출국 반열에 오른 것을 계기로 우리도 ‘핵주권’을 확보할 때가 됐다”는 주장을 폈다. 미국과의 원자력협정 시한이 오는 2014년 완료되면 우선 재처리시설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처리시설이 없는 탓에 현재 국내 원자로에서 나온 핵연료 수만 톤은 고스란히 저장고에 보관돼 있다. 저장고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매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야 하는 게 우리 원자력산업의 가장 큰 골칫거리다. 쓰고 남은 핵연료는 재처리를 통해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전문가들도 재처리시설 도입의 필요성에 입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