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06일
박정희考...박정희 혈서 증거자료라는 것을 보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주신문의 "血書, 軍官志願"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인용, 박정희의 혈서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떠들고 있다. 과장과 왜곡이 난무한 일제시대 어용신문들의 기사에 대해 이렇듯 전폭적인 신뢰를 보이면서 작두날을 타는 무당처럼 신명난 살풀이를 하고 있다. 그런 기준이라면 학도병 궐기를 촉구한 기사가 무려 3번이나 나간 여운형은 왜 친일인명사전에서 뺐는지 모를 일이다.
일단 이 신문기사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라는 부분을 보자.
여기서 29일이란 1939년 3월 29일을 뜻한다. 하지만 제1기 신경군관학교 예과생도의 합격자 발표는 그보다 앞서 1939년 2월 24일날 이미 만주국『政府公報』1459號를 통해 종료가 된 상태다. 그런데 합격자 발표일보다 한달이나 늦게 3월 29일날 박정희의 지원서가 송부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언제 이 혈서편지를 보냈단 말인가.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유증선이 1938년 5월에 혈서를 썼다고 한다. 만주까지 우편이 송달되는데는 1주일이면 충분하다. 그렇다면 모집공고는 1938년 5월 이전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1기 채용시험은 1938년 10월에 있었고 모집공고는 그 전에 있었을 것으로 추론한다면, 설령 유증선이 날짜를 착각했다 하더라도 이 신문기사의 신뢰성은 심히 의심이 간다. 또한 몇가지 문제가 더 보이고 있는데, 이 신문을 보면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신경군관학교 제1기 모집시에는 만계(滿系)만 모집했으며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이란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조선계는 만주계에 속해 일본계 모집요강과는 해당사항이 없으며, 일본계가 신경군관학교에 최초에 입학한 것은 1940년 1월이다. (滿洲國軍刊行委員會, 滿洲國軍, 蘭星會, 1970, 619쪽). 그런 고로 이 신문기사는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덧, 일단 반론 자료가 나왔으므로 이전에 올렸던 "박정희 혈서설 떡밥은 여전히 유효한가"는 근거를 좀더 보강하여 재포스팅하고자 한다.
일단 이 신문기사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라는 부분을 보자.
여기서 29일이란 1939년 3월 29일을 뜻한다. 하지만 제1기 신경군관학교 예과생도의 합격자 발표는 그보다 앞서 1939년 2월 24일날 이미 만주국『政府公報』1459號를 통해 종료가 된 상태다. 그런데 합격자 발표일보다 한달이나 늦게 3월 29일날 박정희의 지원서가 송부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언제 이 혈서편지를 보냈단 말인가.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유증선이 1938년 5월에 혈서를 썼다고 한다. 만주까지 우편이 송달되는데는 1주일이면 충분하다. 그렇다면 모집공고는 1938년 5월 이전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1기 채용시험은 1938년 10월에 있었고 모집공고는 그 전에 있었을 것으로 추론한다면, 설령 유증선이 날짜를 착각했다 하더라도 이 신문기사의 신뢰성은 심히 의심이 간다. 또한 몇가지 문제가 더 보이고 있는데, 이 신문을 보면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신경군관학교 제1기 모집시에는 만계(滿系)만 모집했으며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이란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조선계는 만주계에 속해 일본계 모집요강과는 해당사항이 없으며, 일본계가 신경군관학교에 최초에 입학한 것은 1940년 1월이다. (滿洲國軍刊行委員會, 滿洲國軍, 蘭星會, 1970, 619쪽). 그런 고로 이 신문기사는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덧, 일단 반론 자료가 나왔으므로 이전에 올렸던 "박정희 혈서설 떡밥은 여전히 유효한가"는 근거를 좀더 보강하여 재포스팅하고자 한다.
# by | 2009/11/06 00:59 | 인.물.평.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