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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는 답하라 ]

여동활 2009. 11. 6. 23:03

[ 민족문제연구소는 답하라 ]

 민족문제연구소에서 15년에 걸쳐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와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친일인사 선정을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인사에 대하여 편향적이고, 애매모호한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편찬의 취지와 당위성을 잃고 말았다.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국가적 대업을 추진 함에 있어 편향된 시각으로 인물을 선정했다면 국민들이 결코 납득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2005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이 발표도 되기 전에 “만화 박정희” , 왜곡된 신화 영웅인가 기회주의자 인가를 기획하고 출간하였다. 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의 숨겨진 목적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를 잡기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증폭시켰고, 친일인사 선정과 수록에 문제점이 많을 것임을 시사했다.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와 시대적 배경이나 상황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과에 대한 부분을 더 부각시켜 수록대상에 포함시킬 것임을 암시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인물선정 사유를 보면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만주군 경력 1년 남짓과 언론에 보도된 혈서가 포함된 만주신문 사본이 결정적 자료라고 한다. 하지만 이 신문의 사본이 신빙성과 조작설까지 대두되고 있으니, 민족문제연구소는 즉각 신문의 원본과 박정희가 보냈다고 하는 편지와 혈서를 찾아 그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에하나 이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어떤 목적과 동기로 만들어 졌으며, 친일 행적을 판단할 결정적 자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검토와 판단이 면밀히 이루어졌는지가 중요한 문제다.

한일병합 후 7년이 지난 1917년에 태어나고 자란 22살 청년 박정희가 만주군을 지원한 이유는 “일본놈들이 꼴보기 싫어서" 였다고, 만주 신경군관학교 선배인 '방원철'씨가 증언을 했다. 그런 박정희가 정말로 혈서를 작성했다면, 이는 목적 달성을 위한 하나의 속임수 일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가 근무한 만주군은 독립군을 때려잡는 부대가 아니었다. 독립군을 때려 잡았다면 임시정부와 독립군이 가만히 있었겠나. 임시정부는 만주군에 대하여 한 번도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고, 일본군 또한 중요한 작전에는 거의 함께하지 않을 정도로 비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만주군에 대하여 친일의 책임을 묻지 않고, 중공군에 그대로 편입시킨 것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만주군 근무시절 박정희가 몰래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 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할 정도로 강직한 분이다.

하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면목동 백강선생의 집으로 찾아 간 적이 있다고 한다. 백강선생께 큰 절을 올리며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 입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백강선생은 조선인 병사들을 비밀리에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매우 놀랍고도 반가웠다고 한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소좌의 도움이 컸다고 하는 증언까지 있다.

또한, 박정희는 정식으로 광복군에 적을 올리고 훈련을 받다가 귀국했다. 그 사실조차 부끄럽게 여기고 평생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지않고 수록했다면, 한일병합 후 남작을 받은 김가진, 김사준, 자작을 받은 김윤식, 이용직, 이용태 선생까지 모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이 분들이 독립운동가 이나 이전의 행적은 친일파로 분류해야 할 관직을 가졌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분들이 수록대상자에서 제외 된 것은 친일 이 후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5000년 대물림 가난을 이기고, 선진국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적은 왜 인정하지 않는가? 이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인정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이 인정하고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익히 알고 있는 진암 이병헌은 어떠한가?  조선의 독립운동가를 “불량선인”  “강도배”라 하고,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는 방법까지 저술해 총독부와 일본정부에 건낸 사람이 아니던가? 독립신문에서 한 면을 거의 다 할애해서 대문 짝 만하게 보도까지 했는데, 왜 수록명단에 빠져 있는가? 조선을 통치하는 방법이 혈서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또한, 좌익계열의 친일인사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가? 학도지원 권고문을 발표하고, 총독부와 밀접하여 김태준 등을 전향하게 한 여운형은 왜 수록 대상에서 제외가 된 것인가?

또한, 열린우리당 출신 국회의원 부친들에게는 왜이리 관대한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정동영, 신기남, 유시민, 이미경, 김희선 의원의 부친 친일이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정동영 의원의 부친은 일본제국주의 조선 착취 최일선기관인 ´금융조합 서기´를 무려 5년이상 하며, 황국신민으로써 충성을 다하고, 소작 농민의 피를 빨아먹지 않았던가? 신기남 전 대표의 부친은 독립운동가 고문과 심문으로 악명을 떨치던 일본군 헌병오장으로 판명이 났고, 유시민 전 장관의 부친은 황국신민화를 의식화시키는데 앞장 선 훈도가 아니었나? 이미경 의원의 부친은 조선인으로서는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어렵다는 일본군의 핵심 사찰요원인 황군 헌병오장으로 최고의 호사를 누리지 않았던가? 환부역조에 부친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한 김희선 전 의원의 부친은 알고보니 독립운동가 때려잡던 만주국 경찰이 아니었나? 왜 이 사람들의 부친은 모두 빠졌는지 해명하기 바란다.

과연 어떤 사람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하는지 국민들께 묻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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