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볼 정도로 수척해진 얼굴, 퀭하니 촛점 잃은 눈빛, 예전의 당당하고 잘생긴 선배의 얼굴이 아니었다.
아직 일흔이 안된 나이에 여든살은 더 들은 듯, 장성한 아들이 껴안아 부축해도 한발조차 채 내딛기 힘든 걸음.
떠나며 차창가로 내미는 손을 잡자, 차가운 마른 나무등걸 같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또 보자는 미소 속에, 우리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악수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십여년 동안 그리 친하게 지내도, 선배가 처음으로 악수를 청했고 나는 그 손을 기다린 듯 움켜잡았다.
오늘 서울에서 먼 길 천리를 내려와, 제 얼굴 잠시 보고 뜨거운 장작불 구둘장에 몸 좀 누이고 가시라는 제 뜻을 끝내 뿌리치고 황급히 다시 떠나는 촉촉한 눈가에서, 슬프디 슬픈 우리네 삶의 현주소를 본다.
선배는 과거 우리나라에서 자주국방을 처음 시작하던 시절에 첫 작품으로 박격포 포탄을 우리 손으로 만들고 개발한 책임 연구원이었다.
누구라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시 박 대통령의 혁명동지 중 한 분이 설계대로 박격포탄을 만들어 군에 납품을 해야 하는데, 선배가 계속 클레임을 걸어 납품을 하지 못하게 되자, 그 큰 회사가 부도가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한다.
하루는 박 대통령께서 부르셔서 황급히 쫓아갔더니, 무척 화나신 표정으로 “자네는 무엇 때문에 계속 거절하는가?”하고 물으셨다고 한다.
당시 혈기 왕성하던 선배가 보고 드리길 “각하, 박격포는 적군을 향해 쏘아야 하는데, 현재 납품을 하려는 박격포탄은 열발 중 한발은 회전날개 부실로 제 거리를 가지 못하고 떨어지고 있습니다. 전시에 아군이 있을 자리에 박격포탄이 떨어지는 셈이니 그런 포탄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라 판단했습니다”라고, 덜덜 떨면서 보고 했다고 한다.
사실 각하 앞이라 너무나 긴장되어 오줌을 쌀 정도가 되었는데, 그때 1, 2분 지나가는 적막의 시간이 마치 저승길 같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박 대통령께서 껄껄 웃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그래, 자네 같은 사람이 진정 애국자야. 물건 백퍼센트 똑바로 들어올 때까지 자네가 책임지고 챙기게“하면서 어깨까지 두드려 주셨다는 것이다.
각하의 최측근의 일을 거부했으니 이제 죽는구나 생각했던 선배는 평생 그때처럼 벅차고 기쁘고 행복했던 때는 평생 다시는 없었다고 하였다.
결국 박격포탄을 납품하려던 회사는 끝까지 거부한 그 일로 부도가 났지만, 선배는 승승장구하여 국방연구소에서 포탄을 만드는 책임실장이 되었고, 이후 155밀리 포탄까지 만들어 걸프전 때 수출까지 하여 한국의 포탄산업을 굳건한 반석 위에 세운 우리 국방의 숨은 큰 인재였다.
세상에서 오직 포탄밖에 모르고 살다가 큰 교통사고로 퇴직하여, 강원도에서 광산을 개발하여 석회질 비료를 생산하며 오직 국가가 필요로 하는 분야라면 그게 무엇이든 밀알이 되겠다던 선배가 사업을 하면서 찾아온 스트레스와 과로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간암 말기에 대장암 말기가 되고 말았다.
배에 복수가 가득찬 무거운 몸으로, 천리 먼길 통영까지 찾아와 부탁하고 가는 건, 자신의 아들이 광산을 맡았고 자신의 생애 어쩌면 마지막으로 멋진 유기질 비료를 개발했으니 앞으로 자기처럼 어린 아들을 조언해 주고 잘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선배 앞에서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위로의 말이 무엇이 남아 있을까?
결국 한 시간여의 만남 끝에 선배는 차에 몸을 누이고 서울로 올라갔다.
떠나며 내 손에 쥐어준 것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개발한 화훼용 유기질 비료 두포와 시험 성적서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선배는 떠나기 전에 자신의 주변을 한사람 한사람 챙기며 인사를 나누는 중이라는 것을.
인생을 치열하게 살며 먼저 떠나는 자가 있으면, 뒤에 남아 또 그 일을 계승하다가 떠나가는 게 인생이다.
비록 서로 말은 없어도 굳게 잡은 마지막 악수에 그의 눈시울도 애써 참은 내 눈시울도 붉어지는 건 마찬가지이다.
선배의 차가 떠나가면서 젊디 젊은 아들의 씩씩한 포부에서 우리는 새로운 다음 세대를 기약해 본다.
선배님, 그동안 감사드리며 제 남은 생애 안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