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국산 미사일 개발사-3

여동활 2009. 2. 8. 10:32


한국 미사일 개발의 산 증인 구상회 박사 회고 3
아웅산에서 당한 全統 “‘현무’ 빨리 개발하시오”
2009-01-03 구상회

-전두환 대통령은 보안사령관 재직시부터 “백곰 유도탄은 미제 NH 유도탄에 페인트칠만 한 가짜”라고 믿고 있었다. 이런 오해 때문에 백곰 개발에 참여했던 연구인력 대부분은 숙청돼 거리로 내쫓겼고, 연구소는 풍비박산이 났다. 그러나 83년 10월 아웅산 사건이 터지자 5공 정권은 다시금 한국형 유도탄 ‘현무’ 개발을 지시하는데….

한국의 ‘백곰’ 유도탄 개발 성공은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또 외제무기에 의존해오던 우리의 안보를 자주적으로 고양하는 데에 획기적으로 공헌했다. 되돌아보면 내가 1972년 12월27일 대통령의 유도탄 개발지시를 받고 공개행사를 치르기까지 6년에 불과한 기간에 전문가 한 사람 없고, 연구시설 하나 변변히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유도탄을 개발해냈다는 것이 우리 스스로도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유도탄 개발계획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최종 재가가 1974년 5월에 이뤄졌지만, 연구·시험 및 생산시설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유도탄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76년부터였다. 비록 미국의 나이키 허큘리스(NH) 유도탄을 모방한 것이지만 유도탄의 외형만 같을 뿐 유도용 소프트웨어, 유도조종장치, 기체, 추진기관 및 탄두 등은 모두 개량하거나 새로 개발한 것들이었다.

그 짧은 기간에 유도탄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박 대통령의 절대적인 지원도 있었지만 휴일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쓴 연구원들의 피땀어린 노력이 무엇보다 컸다. 정부는 각종 훈포장과 포상으로 연구개발에 기여한 연구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선진국의 전유물처럼 생각됐던 유도탄을 우리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백곰 공개시험 후 국방부로부터 새로 창설될 시험 포대를 위한 실용개발 지시가 국과연에 하달됐다. 군과 국과연은 80년까지 수행된 실용개발기간 중 모두 8회에 걸친 운영비행시험을 통해서 백곰 유도탄의 성능 및 실용성을 확인했다. 그 후 생산에 들어가 80년 말에 새로 창설된 시험포대에 1개 포대분의 국산 유도탄이 배치됐다. 유도탄 추적 레이더를 제외한 국산화율은 90%를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곧 부메랑이 돼 국과연 연구진을 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상처뿐인 영광

79년 10월26일 박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고, 강력한 후원자를 잃어버린 국과연도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됐다. 5공정부 출범과 함께 박 대통령이 직접 추진하던 방위산업은 국방부와 상공부(현 산업자원부)에 위임되고, 방위산업에 사령탑 역할을 했던 청와대 제2 경제비서실도 폐지됐다. 박 대통령의 이른바 ‘기술주권에 의한 자주국방정책’은 5공 정부에 의해 근본부터 바뀌게 됐다.

5공정부의 군 당국은 시간이 걸리는 국내 연구개발에 의한 전력증강보다는 외국에서 첨단무기를 도입하거나, 핵심기술 이전이 수반되지 않는 명목상의 기술도입 생산을 통해서라도 북한에 비해 현격히 떨어져 있는 전력을 하루 속히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국과연이나 방산업체들은 단기간에 걸쳐 최첨단무기를 개발하라는 군의 요구에 부응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80년에 불어닥친 유류파동 때문에 중화학공업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돼 방위산업체들도 대폭 정리됐다.

전력증강을 위한 율곡예산이 해외도입과 기술도입 생산 위주로 집행됨에 따라 국내 연구개발사업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국과연의 연구개발 예산도 70년대의 국방예산 대비 4%에서 1.3%로 대폭 감축됐다. 이와 더불어 새 정부의 숙청 한파가 국과연에도 불어닥쳐 두 차례에 걸쳐 약 1000명의 인원이 감축됐고, 조직도 대폭 축소돼 서울의 연구소 본부와 서울사업단이 폐쇄되고 대전기계창으로 통합됐다.

이 와중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불과 3년 전에는 유도탄 개발 공로로 정부로부터 각종 서훈과 포상의 영예를 한몸에 받던 연구원들이었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박 대통령 당시 제2경제수석비서관이었던 오원철씨가 <신동아>에 이미 밝혔기 때문에(‘유도탄개발, 전두환과 미국이 막았다’ 1996년 1월호) 여기서는 간단히 그 결과에 대해서만 기록하고자 한다.

새 정부의 방위산업정책 변화로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지대지 유도탄 체계 개발이 중단됨에 따라 백곰의 후속사업이었던 K2, K3 및 K5 유도탄 개발계획도 완전 중단됐다.

유도탄 개발에 참여했던 연구원들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보안사령관 재직시부터 “78년 9월26일에 공개 시험한 백곰 유도탄은 국산이 아니라 미제 NH 유도탄을 페인트칠로 위장한 것이다. 국과연은 만들지도 못할 유도탄을 개발한다면서 수천억원의 예산을 낭비했을 뿐 아니라 대통령까지 기만했다”고 믿고 있었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공식석상에서 수차례 그런 말을 했다.

한 예로 전 대통령이 대전기계창을 방문해서 국산무기 전시실을 둘러보는 자리에서도 당시 소장이었던 서정욱(徐廷旭) 박사에게 그런 의혹을 제기해 서소장을 당혹케 했다. 전 대통령뿐 아니라 당시 군의 최고위직이었던 김윤호(金潤鎬) 합참의장도 같은 견해를 밝힌 적이 있었다.

졸지에 ‘죄인’된 유도탄 개발 주역들

이러한 오해는 백곰을 개발할 때 유도조정장치, 추진기관 및 기체 등 주요 국산 구성품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서 미제 NH 유도탄을 10여발 구입해다가 시험한 데서 생긴 것 같았다. 이런 오해는 또 유도탄 개발이 극도의 보안 속에 진행됐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당시 연구소 안에서도 유도탄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일부 직원들 사이에서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다. 대통령과 군의 최고위 인사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됐으니 국과연, 특히 유도탄 개발연구 부서의 운명은 불을 보듯 뻔했다.

두 차례에 걸친 숙청작업으로 연구소를 떠난 1000여명 중에서 절반 이상이 대전기계창 소속이었다. 유도탄 개발에 참여한 부장급 이상 간부는 이경서(李景瑞) 창장을 포함해서 전원이 숙청됐고, 실장도 상당수 포함됐다. 특히 해외에서 유치한 과학자들의 퇴직이 많았다. 문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이로 인해 국과연의 유도탄 개발능력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됐다.

특히 수백만 달러를 들여가며 외국에서 핵심기술을 배워온 간부들이 전원 그만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개중에는 유도탄 개발에 전념하느라 건강과 가정까지 희생한 사람도 있었다. 전문인력은 하루 이틀에 양성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을 하루 아침에 국가의 죄인으로 치부해 숙청해버린 것은 국가안보상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은,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권국가로서 기술집약형의 자주국방을 확립하려면 정밀무기체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유도탄 개발에 매진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책무일 텐데 5공 정부는 어떤 이유 때문에 하루 아침에 핵심 연구요원들을 숙청하고 체계개발을 중단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이 오원철 전 제2경제수석이 추정하는 것처럼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든, 아니면 그릇된 보고에 따른 전 대통령의 오해 때문이었든 간에 유도탄 개발사업의 중단과 연구요원들의 대대적 숙청은 결과적으로 국가안보에 큰 손상을 끼쳤다. 그러나 뒤에 설명하겠지만, 정부의 그런 조치는 잘못이었음이 그로부터 1년도 채 되지 않아 사실로 입증됐다.

이 기회를 빌어 필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대지 유도탄 개발을 위해 정열과 혼신의 힘을 바쳤던 수많은 연구 주역들의 명예를 위해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78년 9월26일 공개시사회에서 발사된 백곰은 비록 미국의 NH유도탄을 모방하여 제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유도탄 전 분야에 걸쳐 성능을 개량했을 뿐 아니라 90% 이상 국산품으로 구성된 ‘국산’ 유도탄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1982년 9월, 나는 지상무기(육군)를 개발하는 1사업단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로부터 두 달 뒤에는 새 소장으로 김성진(金聖鎭) 박사가 부임했고, 나는 소장을 대신하여 한미안보회의(SCM) 산하 기술협력위원회(TCC)의 공동위원장을 맡게 됐다. 양국 국방장관을 의장으로 하는 한미안보회의에서는 안보·군수·기술 및 공동성명의 4개 실무위원회를 운영했다. 안보 및 군수협력위원회는 국방부 차관보, 공동성명위원회는 외무부(현 외교통상부) 차관보, 그리고 기술협력위원회는 국과연 소장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김소장이 부임한 후 1983년부터 국과연 소장 대신 내가 맡게 된 것이다.

1983년 10월, 한미기술협력 실무위원회에 참석차 워싱턴에 머물던 나는 그 곳에서 경천동지할 소식을 접했다. 바로 북한이 한국의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저지른 아웅산 사건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위기를 모면했지만 부총리를 비롯해 정부고관 17명이 사망했고, 15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참사였다.

급거 귀국한 전 대통령은 대대적인 개각을 단행했고, 이때 국과연 소장이던 김성진 박사는 체신부장관으로 영전했다. 이에 따라 국과연에도 후속 인사가 단행돼 박덕호 부소장이 소장직을 맡게 됐고, 나는 한미기술협력회의에서 귀국 후 연구개발단장직을 맡게 됐다.

구사일생 생환한 합참의장 병실에서

새 보직으로 업무파악에 정신이 없을 때 윤성민(尹誠敏) 국방장관의 호출을 받았다. 한미기술협력 실무위원회의 결과를 묻는 호출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장관실로 가니 윤장관은 “함께 갈 데가 있다”며 급히 문을 나섰다. 그런데 국방부 청사 현관에 대기한 승용차가 장관 전용차가 아니라 흰색 외제차였다. 장관 행차에는 항상 따라붙는 수행 부관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무엇 때문에 가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장관이 일절 말씀을 안 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청사를 빠져 나온 차는 김포공항 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렸다.

차는 김포에 있는 국군통합병원 앞에서 멈추었고, 나는 윤장관을 따라 5층의 한 병실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병실 안에는 이기백(李基百) 합참의장이 머리와 얼굴에 온통 붕대를 감고 양 다리에도 발 끝까지 깁스를 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웅산 사건 때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진 후, 필리핀의 클라크 미군기지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귀국한 직후였다. 신문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합참의장의 처참한 모습을 직접 대하니 북한의 만행에 다시 한번 몸서리가 쳐졌다.

병실에 들어서고 잠시 후에 윤장관이 유도탄 얘기를 꺼내 비로소 나를 이 곳에 데려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합참의장이 윤장관의 말을 받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북한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나로서는 국가대사인 88올림픽이 개최될 수 있을지, 설령 예정대로 개최된다 해도 무사히 끝날 수 있을지 극히 의심스럽다. 북한은 수단방법을 다해서 88올림픽 개최를 방해하려 들 것이 뻔한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를 막아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국과연은 늦어도 88올림픽 전 해인 87년 말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 실전 배치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이라. 이것은 각하의 명령이다.”

합참의장의 목소리는 자못 흥분과 결의에 차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작년 말 국과연이 800여명을 감원했을 때 유도탄 개발요원이 가장 많이 옷을 벗었고, 나를 제외하고 부장급 이상 간부들은 전원 퇴직했다. 뿐만 아니라 금년(83년) 1월1일을 기해 유도탄이 연구사업으로 바뀌면서 K2 사업팀도 완전 해체된 상태다. 따라서 종전의 절반도 안 되는 연구원을 데리고 87년까지 유도탄을 실전 배치하라는 지시는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지금 예상으로는 87년까지 유도탄을 개발하기도 지극히 어려울 것 같은데, 한 걸음 나아가 실전배치까지 완료하려면 유도탄을 양산하고, 종합 군수지원체계에 대한 분석을 해야 하고, 또 각종 교범을 만들어 유도탄 운영 요원을 교육·훈련하고, 진지공사에 대한 규격도 만들어야 하는데, 그 때까지 이런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나는 솔직하게 나의 심경을 토로했다. 이기백 합참의장과는 미국에서 열린 안보회의 때 같은 호텔에 묵으면서 여러 차례 접해봤기 때문에 솔직하게 내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당시 합참의장은 기술분야에 대한 이해가 깊어 한미안보회의 때 기술협력 내용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여주곤 했다. 나의 자신없는 답변에 합참의장은 붕대를 감은 손으로 내 손을 붙잡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해내야 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할 수 있다고 약속하라”고 명령 겸 부탁을 했다.

윤장관도 “유도탄 긴급개발 지시는 국가안보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중대사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완수돼야 한다. 이른 시일내에 개발계획서를 국방부에 제출하라. 필요한 예산은 전액 배당할 것이고, 증원이 필요하다면 승인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지난 연말에 있었던 국과연의 대폭적인 기구축소와 인원감축을 승인한 사람으로서 사업을 기간내에 추진하는 데에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결국은 다시 한 번 한없이 높아 보이기만 하는 벽에 부닥치게 됐다. 그래, 지난 72년 말 유도탄 개발지시를 받았을 때에도 결국은 백곰을 성공리에 개발해내지 않았던가! 비록 지금은 많은 과학기술자들을 잃어버렸지만, 불모지에서 시작했던 그 때보다는 그래도 여건이 나은 편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최선을 다해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나 결과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전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를 호출해 합참의장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데려와 유도탄 개발을 지시한 것은, 아마도 국과연의 현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윤장관이 나로 하여금 결의를 다지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북방을 지키는 신’ 현무사업

생각할수록 참으로 묘했다. 국과연에 입소해 로켓 개발실장을 맡은 것이 계기가 돼 박 대통령의 지대지 유도탄 개발지시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전 대통령의 유도탄 개발지시를 다시 받게 됐으니 유도탄과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는지 참으로 이상했다. 그러나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고, 이제는 모든 일이 성공하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그것이 우리 역사상 처음 열리는 올림픽대회를 성공리에 마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 이상 큰 보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국과연에 돌아와 소장에게 보고하니 소장도 크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87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실전 배치를 해야 한다는 엄명을 받은 터라 한시가 급했다. 유도탄과 관련된 부·실장을 소집해서 대책회의를 열었다. 유도조종부장 박찬빈 박사, 탄두부장 윤여길 박사, 추진기관부와 추진제공장을 맡고 있는 이채우 박사와 사업관리실장 및 각부 관련실장들에게 유도탄 긴급개발에 대한 국방부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사업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유도탄사업의 실무책임을 맡을 체계실장으로 문신행 박사(文信行. 현 항공우주연구소 사업본부장)를 임명 건의하기로 하고, 유도탄체계는 중단됐던 K2를 기본으로 각 구성체계의 개발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유도탄사업 명칭은 현상공모를 통해서 ‘북방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 담긴 ‘현무(玄武)’로 결정됐다.

83년 11월29일, 현무사업계획에 대한 국방부 승인이 나왔다. 그러나 정상적인 율곡사업 집행절차에 따라 사업이 승인된 것이 아니라 긴급지시에 의한 것이었고, 사업의 긴급성 때문에 사업집행절차를 생략하고 선행개발, 실용개발 및 생산에 대한 예산이 일괄 승인됐기 때문에 사업을 착수하는 데에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현무사업에 대한 군 실무자들의 준비가 부족해 현무에 대한 작전·운용·성능(ROC)의 세부사항을 합의하는 일이었다.

현무의 연구개발 및 생산뿐 아니라 현무를 정비·유지하는 데 필요한 부대요원 교육, 30권이 넘는 정비교범 및 정비부품 준비 등 종합군수지원 문제도 적지 않은 일이었다. 82년 말 유도탄 연구원들이 대량 감원된 터라 부족한 연구인력을 60명 충원하도록 국방부의 승인을 받았지만, 새로 보충한다 해도 유도탄 지식이 전혀 없는 연구원들이 사업수행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정상적인 무기개발 과정은 선행개발, 실용개발을 거쳐 부대시험에 합격한 후 생산 배치하는 순서를 거치지만 현무사업은 완료시기를 엄수해야 했기 때문에 연구개발 및 생산계획을 정상적인 순서에 따라 추진하기에는 시일이 너무 촉박했다. 이에 따라 사업계획은 현무의 부대배치시기(IOC)로부터 역산해서 연구개발 및 생산계획을 작성하고, 선행개발, 실용개발 및 생산기간이 중첩되는 비정상적인 사업계획이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시간 제약과 연구인력의 부족으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연구원들과 방산업체 요원들은 불철주야로 사업에 매달렸다. 이들의 열의와 헌신적인 노력은 ‘번개사업’ 때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드디어 84년 9월22일 시제한 현무 유도탄을 시험(DT-I)하게 됐다. 안전을 고려해서 첫 비행시험은 사정(射程)을 단거리로 계획했다. 과거 ‘백곰(K-1)’의 비행시험을 10회 가까이 했지만, 긴장감은 그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시험 전날인 21일은 참으로 긴 하루였다.

유도탄의 최종 점검결과도 이상이 없었고 시험평가단과의 안전회의 및 해역과 공역에 대한 해공군의 협조도 원만하게 이뤄졌다.

유도탄 발사 후 유도탄에는 아무 이상이 없더라도 추적 레이더의 문제로 3초 이상 유도탄을 추적하지 못할 때에는 안전을 위해서 유도탄을 자동 폭파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긴 토의가 있었다. 현무는 백곰과는 달리 레이더 지령 유도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비행하는 유도탄을 단순히 추적 레이더의 잘못 때문에 폭파시켜야 하느냐에 대해서 이의제기가 많았다. 딴은 일리있는 얘기였지만 사업책임을 맡은 나로서는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인명피해를 생각해서 자동폭파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시험비행 성공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 이번 시험은 본디 9월1일로 계획돼 있었는데 늦장마가 계속돼 유도탄을 발사대에 장착한 채 3주일을 야외에서 대기했다. 또 이번 시험은 백곰시험 때와는 달리 고정 발사대가 아닌 이동형 발사대에서 발사하는 첫 시험이었다. 나는 78년 4월29일 백곰의 첫 시험이 실패했던 일과 81년 K-2 유도장치시험 때 발생한 사고가 뇌리를 떠나지 않아 시험발사 전날 밤을 거의 뜬 눈으로 지샜다.

특히 81년 8월21일 K-2유도탄 비행시험 때의 악몽 같은 사고가 자꾸 떠올랐다. 당시 K-2유도탄사업 책임자였던 최호현박사는 백곰의 레이더 지령 유도방식을 관성유도장치로 대체한 새로운 유도탄의 비행시험을 하고 있었다. 백곰사업 때 확보한 미제 NH 잉여탄이 있어 새 유도장치를 시험할 때 NH 유도탄을 사용했다.

NH 유도탄의 1단 추진기관은 추진기관 4개를 한데 묶은 클러스터(Cluster)형이다. 이는 추진제만 다를 뿐 북한 노동미사일의 1단 추진기관과 유사한 방식이다. 새 유도장치를 탑재한 NH유도탄은 10시 정각에 발사됐는데, 발사 순간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했다.

발사명령이 떨어지면 4개로 된 1단 추진기관이 일제히 점화돼야 하는데, 이번 시험에서는 그중 하나가 점화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간 10차례 시험하는 동안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발사대는 해안가에 설치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점화되지 않은 추진기관이 육지 쪽에 있었다. 발사 순간 균형을 잃은 유도탄은 육지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낮은 고도로 비스듬히 날아갔다. 그 쪽으로는 40여호의 농가가 있었고 그 너머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탄두는 비활성이었지만 1단 및 2단 추진기관에는 폭약이나 다름없는 추진제가 다량 들어 있었고, 기체 및 유도조종장치의 무게도 수t에 달하기 때문에 지상과 충돌하면 피해가 얼마나 클지 몰랐다.

모두가 망연자실해 있는 가운데 언덕 너머에서 폭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솟구쳐 올랐다. 대기중이던 소방차와 구급차가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유도탄은 발사장에서 1.5km 떨어진 시험장의 경계선 밖 언덕에 추락한 뒤 일부 파편과 불붙은 추진제가 농가에 떨어져 불이 번지고 있었다. 농가 5동이 파손됐지만, 천만다행으로 인명피해는 없었다.

피해가 크지 않은데다 사고수습반의 신속한 피해보상 조치로 사태를 원만히 해결했으나 해저유물탐색 취재차 인근에 와있던 방송국 취재팀을 납득시키느라 혼이 났다. 지금도 당시 보도관제에 적극 협조해준 취재팀에 고마움을 느낀다.

점화되지 않은 추진기관을 비롯해서 잔해 대부분은 회수했으나 문제의 열쇠인 점화장치는 경비대 병력까지 동원해서 3일간 정밀 수색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불량부품 하나가 이렇게 큰 실패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부품 하나하나의 신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 사고 이후 추진제 연구팀은 자체 기술로 미제에 비해 성능이 월등한 단일 추진기관을 개발해 이런 사고를 근원적으로 제거하는 쾌거를 올렸다.

이번 현무 발사시험에는 1단 추진기관이 단일 추진기관이어서 그런 사고는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81년의 사고에 대한 기억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9월22일은 구름 한점 없이 맑아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발사예정시각은 오전 10시. 그러나 어선통제 때문에 11시50분에 발사할 수 있었다.

초읽기가 끝나자 추진기관이 점화됐고, 현무는 엄청난 굉음과 불기둥을 내뿜으며 힘차게 비상했다. 초조와 불안 속에서 진행된 첫 비행시험은 성공적이었다. 내심 걱정했던 이동형 발사대에도 이상은 없었지만 화염반사판을 더 가벼운 내열 복합재로 대체하기로 했다.

제2차 비행시험은 1차 비행시험 자료를 심층 분석하고 군과 세부적인 ROC 협의를 위해 85년에 실시하기로 했다. 비행시험자료를 분석해본 결과 모든 구성품이 설계대로 작동돼 곧바로 장거리 비행시험으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2차 비행시험은 85년 5월25일, ○○○km 떨어진 무인도를 향해 발사됐는데, 공산오차보다도 목표지점에 훨씬 가깝게 명중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국방부를 통해 현무 시험결과를 보고받은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현무 개발현황을 이른 시일 안에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청와대 보고

유도탄 보고는 85년 6월27일 11시에 청와대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는 윤성민 국방장관, 정진권 합참의장 및 박덕호 국과연 소장이 배석했다. 김용래 의전수석비서관이 보고 요령을 설명해줬다. 보고는 백곰 유도탄의 개발경위, 국산화 내용 및 예산내용에 이어 현무의 차이점, 구성품을 시제하는 방산업체 및 국산화율과 2차 시험내용, 향후 사업계획의 순서로 보고했다. 앞에도 말했지만 전 대통령은 보안사령관 재직 때부터 백곰 유도탄이 국산품이 아니라 미제 NH 유도탄에 페인트칠만 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이날 보고에서는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주요 구성품의 제작장면을 담은 앨범을 준비했고, 비디오로 현장 화면을 곁들여서 설명했다. 전 대통령은 이미 군 정보기관을 통해서 현무의 시제업체와 국산화 현황뿐 아니라 탄착지점까지 보고를 받아 현무사업에 대한 주요 내용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보고는 예정시간 20분을 훨씬 넘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마침 그 날은 전 대통령이 국빈방문중인 방글라데시 대통령과 12시에 오찬약속이 돼 있던 날이었다. 김용래 의전수석이 방글라데시 대통령이 정문을 통과했다고 알리자 전 대통령은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의 손을 힘차게 붙잡으며 “비행시험 성공을 축하한다. 수고했다. 지난번 것(백곰)은 미제에 페인트칠한 것이었지만 이번 것(현무)은 제대로 된 것 같다. 더욱 열심히 노력해주기 바란다. 다음번 시험 때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참관하겠다”고 말했다.

윤 국방장관과 정 합참의장도 보고 결과에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나는 무거운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연구원들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백곰 시험발사에 성공하는 기적을 이루었을 때, 우리도 이제 독자적인 유도탄 기술기반을 구축하게 됐다고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때가 눈앞에 떠올랐다.

5공정부 수립 이후 유도탄 개발이 중단되고 핵심 연구요원 대부분을 강제 퇴직시킨 지 10개월도 안 돼 거의 처음부터 다시 유도탄 사업을 시작했으니, 그 과정에 치러야 했던 국가적인 손실은 또한 얼마나 컸던가. 그런데 그런 손실이 전 대통령의 백곰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나로서는 이런저런 상념으로 가슴이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와대 보고 후 곧 현무 비행시험에 전 대통령이 참석할 것이니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다시금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얼마 전 서독에 배치된 미육군의 퍼싱(Pershing) II 유도탄이 사격훈련 중 공중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 현무는 그 때까지 두 차례 비행시험을 했다고 하지만 장거리 시험은 단 한 차례밖에 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튼 다음 시험이 계획된 9월에 대통령이 참관하는 시험비행 행사를 갖기로 결정됐다. 예비설계 단계에 대통령을 모시게 됐으니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전 대통령의 현무 시험 참관

현무 비행시험을 준비하는 한편, 행사준비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가장 시급한 일은 78년 9월26일 백곰 공개시험 때 MCC 옥상에 급조했던 관람대가 너무 낡아 새로 보수하는 일이었다.

시험은 백곰 때와는 달리 비공개로 결정됐다. 행사일자는 9월18일(수). 그러나 측후소의 기상예측과는 달리 9월14일부터 시작한 늦장마로 연일 비가 내렸다. 측후소에서는 21일에나 비가 그칠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장마는 참으로 괴상했다. 낮에는 하루종일 비가 내리다가도 밤에는 별이 보일 정도로 구름이 걷히는 날씨가 일주일이나 계속됐다.

청와대에서는 날씨만 허락하면 대통령께서 꼭 참석할 것이니 주말까지 시험준비 상태로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비는 20일(금) 오후부터 멎기 시작하여 석양 무렵에는 실로 오랜만에 햇빛을 볼 수가 있었다. 드디어 행사가 21일로 결정됐다.

전 대통령은 11시50분 국방장관 및 합참의장을 대동하고 안흥시험장에 도착했고, 각군 참모총장, 2군사령관 및 보안사령관 등 군수뇌 다수도 참석했다. 비행시험은 오찬 후 오후 2시에 실시됐다. 현무의 시험절차와 초읽기는 백곰 행사 때와 똑같았다. 비행시험은 대성공이었다. 시험 후 전 대통령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관계관들을 치하하는 한편 처음 보는 유도탄시험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애초 계획으로는 비행시험 후 대통령은 귀경하는 스케줄이었으나 현무의 성공적인 비행시험에 만족해서인지 예정에 없던 다과회가 열렸다. 전 대통령은 핵심 연구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격려말씀 중에 “지난번 백곰 유도탄은 미제였는데 이번 현무는 진짜 국산 유도탄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대목이 나의 가슴을 무겁게 했다. 전 대통령은 이날 금일봉을 하사했는데, 나는 그 돈으로 국과연 대강당 입구 벽에 우리나라 무기발달사를 보여주는 조형물을 제작해 부착했다.

전 대통령의 격려에 고무된 연구원들은 더욱 연구에 몰두했고, 체계실장인 문신행 박사의 노력으로 현무사업은 차질없이 진척됐다. 전 대통령의 현무시험 참관 이후 육군은 현무사업에 더욱 관심을 보여 86년 5월3일의 5차 비행시험(최종 DT II)에는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이 참관했고, 다음달 4일의 비행시험(첫 OT I)에는 새로 부임한 이기백 국방장관이 육군참모차장, 교육사령관 등을 대동하고 참관했다.
그 날의 시험은 육군 포대요원들이 국과연 연구진에게 운영교육을 받고 처음으로 현무를 발사한 뜻깊은 시험이었다. 모든 것이 원만하게 진행됐다. 이대로 간다면 목표일보다 10개월 빠른 87년 초에는 현무사업이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됐다.

현무 개발사업은 86년 10월17일 마지막 부대운영 시험을 남겨놓고 있었다. 발사는 현역 군인들이 맡았다. 이번 부대운영시험의 성공은 현무사업의 종료를 의미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부대운영시험(OT II)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25달러짜리 불량 부품 하나 때문에

오후 1시 정각에 발사된 현무는 구름 한점 없는 가을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이것이 마지막 시험이라고 생각하며 뿌듯한 성취감과 아쉬움이 뒤범벅된 묘한 감상에 젖어들던 바로 그 순간 사고가 일어났다. 유도탄이 갑자기 정상 탄도에서 왼쪽으로 벗어나 육지를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도조종장치에 이상이 발생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추적 레이더는 내륙으로 향하는 유도탄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고, 방향은 전라북도 변산반도 쪽이었다. 모두 이런 일은 처음 겪는 터라 처음엔 어쩔 줄을 몰라 할 뿐이었다. 백곰시험 중에도 몇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전부 시험안전 구역 내에서 일어난 사고였지 이번처럼 정상 탄도를 벗어나, 그것도 내륙으로 향하는 사고는 아니었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린 나는 유도탄이 시험안전 구역을 벗어나는 순간 공중폭파하도록 문박사에게 지시했다. 문박사가 원격폭파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유도탄은 스크린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유도탄은 공중폭파시 3부분으로 폭파되도록 설계돼 있다. 그러나 폭파 당시 유도탄의 고도와 속도를 감안할 때 일부는 육지에 떨어졌을 개연성이 컸다. 폭파된 유도탄의 잔해 가운데는 수백kg 되는 것도 있을 터인데 제발 인명이나 재산피해가 없기를 기원했다.

국방부에 사고 경위를 보고하는 한편 전북 부안군 일대에서 유도탄 잔해에 대한 신고가 있었는지를 의뢰했다. 연구원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내심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광학추적장비로 촬영한 필름과 계측자료 등을 분석한 결과 조종장치(roll loop)에 이상이 발생했음이 분명했지만, 이를 확인하려면 조종장치를 회수해야만 했다. 초조감 속에서 유도탄 잔해를 찾았다는 소식을 학수고대하던 중에 저녁 6시30분경 마침내 비행기 앞부분 같은 것이 전북 부안군 논바닥에 떨어졌으며, 인명 및 재산피해는 없다는 연락이 왔다. 나도 모르게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대기중이던 현무 사고조사팀이 당장 달려가 조종장치가 있는 유도탄 앞부분을 회수해왔다.

유도조종실장인 조규필 박사(현 국과연 부장)와 현무체계의 장명진(현 실장)이 사고 조사에 나섰는데, 예상대로 조종장치의 연결 핀 중 하나가 접속불량으로 유도조종 신호를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명됐다. 이 커넥터는 미 군사규격품으로 FMS를 통해 미국에서 구입한 부품이었다. 유도장치, 추진기관 등 핵심 부품은 유도탄 조립 전에 전수검사를 했지만, 미국에서 구입한 규격품은 미군의 품질검사를 믿고 전수검사 대신 표본검사만 하고 사용한 것이 문제였다. 25달러에 불과한 불량부품 하나 때문에 10억원짜리 유도탄을 망친 셈이었다.

미군 군사규격품임을 믿고 전수검사를 하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전 대통령의 참관하에 실시했던 비행시험 때 이런 사고가 나지 않았던 게 천운이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실전배치되는 유도탄의 모든 부품은 전수검사로 바꿔 신뢰도가 획기적으로 향상됐다.

국방부 및 군당국과는 87년 10월까지 향후 1년에 걸쳐 현무의 신뢰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설계도를 재검토하는 한편 모든 부품을 전수검사하기로 했다. 또 조기에 완료하기로 했던 현무사업을 다시 수정, 향후 1년에 걸쳐 부대운영시험(OT II)을 두 차례 더 실시한 후 부대배치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체계실장과 연구요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군 포대요원들의 협조로 현무체계에 대한 장거리 주행시험과 두 차례에 걸친 부대운영시험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정비유지를 위한 교범 및 부품 등 종합군수지원체계도 차질없이 완료됐다. 현무포대는 마침내 87년 말 예정대로 작전 개시됐다. 나는 두 차례의 부대운영시험은 한미안보회의 및 SDI 조사사업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이로써 72년 12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유도탄 개발지시를 받으면서 시작된 나의 유도탄 여정은 15년 만에 대미를 맞게 됐다.
 
에필로그

89년 5월, 국과연에는 또 한 번의 대대적인 기구개편이 있었다. 2개의 연구개발단을 기술분야에 따라 5개 연구개발본부로 편성, 82년 대폭 축소되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나는 지난 4년간 부소장 업무 외에 현무 유도탄 개발, 한국형 전차 개발 등 두 개의 주요 사업과 한미 기술협력위원회 등의 일로 건강에 무리가 생겨 부소장직을 벗게 됐다. 참으로 오랜만에 격무에서 벗어나 그간 읽지 못한 책 속에 묻혀서 재충전 기회를 갖게 됐다.

그러나 1990년 5월, 나는 소장으로부터 또 한 차례 뜻밖의 지시를 받았다. 미국 정부가 한국의 유도탄과 관련된 모든 부품 및 원자재에 대한 수출허가를 취소, 연구소가 수행중인 사업은 물론 다연장 로켓 생산도 중단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우리 국방부는 미국에 협상단을 보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는데, 그 협상단을 이끌고 다녀오라는 지시였다.

미국에서 수입해야 할 품목들은 전자부품과 추진제원료 등이었다. 유럽으로 구입선을 바꿀 수도 있지만 시장조사에 따른 사업 지연과 가격 문제가 있었다. 또한 부품 규격이 달라지면 설계도 보완해야 하는 등의 문제도 예상됐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문제를 풀어야 했다.

상황을 알아보니 93년에 대덕에서 열리는 엑스포 박람회의 일환으로 제주도에서 인공위성 발사를 검토한다는 신문보도가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에 대한 미국 정부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당시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정책을 한층 강화하던 시점이어서 한국의 언론보도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방부와 국과연 요원으로 구성된 협상단 7명을 이끌고 6월10일 출장길에 올랐다. 출발 전 미 군사고문단으로부터 “한국정부가 과거 미국과 유도탄 개발과 관련해서 합의한 유도탄 사거리와 탄두 중량에 대한 규약을 지킨다는 확신을 보여주기 전에는 문제 해결이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사전에 이상훈 국방장관에게 두 가지 사항을 건의했다.

첫째는 현무 유도탄이 미국과 합의한 내용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하여 군사 II급 비밀로 분류된 현무 추진기관의 지상연소시험 및 현무의 비행시험 결과를 한미간 회의에서 설명할 수 있게 해줄 것, 둘째 미국측이 현무에 대한 현장 확인을 원할 경우 이를 수용하도록 승인해달라는 것이었다.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이 정도가 아니면 협상은 별무소득이 될 게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국방부 장관의 결단으로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승인을 받고 출국하게 됐지만, 그래도 걱정이었다. 나와 유도탄의 인연은 참으로 질긴 것이었다. 유도탄 사업에서 떠난 지 얼마 안돼 또 이렇게 유도탄과 관련된 문제를 떠안게 되다니….

정식 회의에 들어가기 앞서 미국 쪽 상황을 알아보니 역시 엑스포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보도된 인공위성 발사계획이 문제였다. 차가운 인상의 미 국무부 여성 차관보는 이 내용이 실린 한국의 영자신문을 내밀면서 “미국의 비확산 대상은 군용 유도무기뿐 아니라 민간의 비행체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한국의 몇몇 연구기관에서 실행하지도 못할 황당한 계획을 멋대로 신문에 발표해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됐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결론만 얘기하면, 우리 일행은 결국 미국의 유도탄 부품 수출을 재개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과정에 국방장관에게서 특별 허가를 받아온 현무 유도탄에 대한 기술 설명과 미국측 검사요원의 현무 생산현장 확인을 보장해준다는 두 가지 카드를 다 사용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수모를 겪은 것은 자주기술이 없기 때문임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던 자리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눈을 감고 지난 일들을 반추했다. 72년 12월27일 박 대통령의 청천벽력 같은 장거리 유도탄 개발지시를 받은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주마등처럼 망막을 스쳐 지나갔다. 정권의 부침과 더불어 영광과 오욕을 오간 나날들….

북한은 비록 우리보다 늦게 유도탄 개발에 착수했지만, 꾸준한 사업 추진으로 지금은 동북아는 물론 멀리 미국의 안보까지 위협할 정도가 됐다. 물론 이런 무모하고 도전적인 북한의 군사정책이 옳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비해 우리는 어땠는가. 기술주권에 의한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유도탄 개발사업이 한 정권의 판단 실수로 엄청난 차질을 빚지 않았던가. 앞으로는 현대무기체계의 핵심인 유도무기 연구·개발이 어떤 이유로도 중단되는 일이 없기를 기원하면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 

출처 : [신동아]1999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