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군사관학교에서 해군본부로 파견근무중이던 1970년 9월1일부터 국방과학연구소(국과연)에서 근무를 시작해 26년이 지난 1996년 9월30일 국과연을 정년 퇴직했다. 국과연 창설요원으로 발령받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언 20여년이 지났으니 새삼 세월의 빠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동안 보안을 이유로 묻혀 있던 국과연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썼다. 그러나 그중 많은 부분이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다분히 편견에 치우친 부분도 없지 않았다. 지난 26년간 영광과 오욕으로 얼룩진 국과연의 역사를 지켜본 나였기에 기회가 오면 이를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해오던 차에, 퇴직 후 주위 분들의 권유로 감히 펜을 들기로 했다.
국과연을 포함해 우리나라 방위산업과 율곡사업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이었던 오원철(吳源哲)씨의 <한국형 경제건설> 제5권에 상술돼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 책과 중복되는 부분은 가급적 피하면서 한국형 미사일 개발에 얽힌 비화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국방과학연구소 창설
본론인 미사일 얘기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국과연 창설 초기에 관한 얘기를 잠깐 해야겠다. 미사일 개발은 70년대 초반 박 대통령의 지시로 국과연이 주도해 이룬 성과였고, 따라서 당시 국과연의 설립 배경과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국과연은 1970년 8월6일 대통령령 ‘국방과학연구소 직제’ 공포와 함께 정원 60명의 국립 연구기관으로 탄생했다. 60년대 북한의 4대 군사노선 채택과 군비증강, 청와대 습격 및 울진ㆍ삼척 공비침투 등 북한의 무력도발 격화와 주한미군 철수 등 국내외의 숨가쁜 정세 변화로 심각한 안보 위기를 느낀 박 대통령이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국과연 설립을 결심한 것으로 안다.
초대 소장에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부소장이었던 신응균 장군이 임명됐고, 우선 육ㆍ해ㆍ공군사관학교에서 이공계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교관으로 근무하던 장교 12명을 창설요원으로 파견 발령토록 했다. 당시 나는 해군본부에서 박철희 박사(현 인하대 교수)와 함께 대간첩선 모형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일단 간판은 내걸었지만 국과연에는 무기를 연구 개발한 경험을 가진 전문가는 한 사람도 없었다. 국방부에도 개발할 무기의 소요 제기에서부터 연구, 개발, 생산, 배치 및 폐기에 이르는 일련의 무기순기관리(武器循期管理)에 대한 규정이나 전문가도 없었으니 문자 그대로 무에서 출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국과연은 우선 연구부서를 총포, 기동, 탄약, 함정, 로켓(유도탄), 통신 및 물자 등으로 나누고, 각 분야에 대한 연구과제, 연구실, 시험장 등을 포함한 중장기 연구개발계획을 작성하는 한편,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군의 공창과 주요 산업시설을 둘러보았다.
미국의 기술지원
경험도 없고 자료도 없는 상태에서 실효성 있는 중장기계획을 세운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신 소장은 미국의 무기 개발에 대한 기술 및 교육 등 지원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특히 미 국무부와 대사관은 “KIST에서 무기를 연구하면 될 텐데 무엇 때문에 국과연처럼 무기를 전문적으로 연구 개발하는 연구소를 별도로 세우려고 하느냐”며 국과연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1970년 8월18일 박 대통령이 초대 국방과학연구소 신응균 소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내가 국과연에 오기 전 해군본부에 있을 때 미 첨단국방기술연구처(DARPA)의 패터슨 대령과 주한 미 해군사령관의 과학고문인 데이비스씨를 사귄 것이 인연이 돼 신 소장은 주한미군과의 기술협력 실무를 거의 나에게 맡겼다. 당시 신 소장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미 국방부로부터 국과연에 대한 지원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패터슨 대령과 주한 합동미군사지원단(JUSMAG-K)을 통해 미국의 지원 가능성을 알아본 결과, 미 대사관측의 부정적인 태도와는 달리 국방부로부터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패터슨 대령 등 미군 실무자들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1971년 6월1일 국과연에 대한 미국의 기술지원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기술조사단이 내한했고, 결국 다음해인 1972년 1월7일 하딘(Clyde D. Hardin)을 단장으로 하는 미 기술지원단이 국과연에 상주하게 됐다. 전자전 전문가인 하딘씨는 국과연에 오기 전까지는 미 육군성 연구 개발 및 획득 차관보의 동남아 담당 특별보좌관이었다.
미 기술지원단 요원들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씩 근무하면서 국과연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국과연이 기본병기 긴급 개발사업인 ‘번개사업’을 통해 육군의 기본병기를 단시일 내에 개발하고 양산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하딘팀의 도움이 컸다. 하딘과 이제는 고인이 된 얼릭(John Ulrich)씨는 미군 당국의 승인 없이 비밀 기술자료들을 무단으로 국과연에 제공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문제가 생겨 1974년 하딘팀은 해산되고 그 역할을 미 현역군인 위주로 편성된 JUSMAG-K에서 맡게 됐다. 이때부터 미국의 기술지원에 대한 통제가 강화됐고 기술지원도 선별적으로 이뤄진 반면, 후에 국과연이 지대지 유도탄 등 민감한 사업을 추진할 때에는 지원보다는 오히려 연구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하딘은 귀국 후에도 국과연에 대한 애정을 잊지 않았다. 은퇴 후 그는 평생 모은 전자학술지를 국과연에 기증했을 뿐 아니라 국과연 창설 20주년 학술대회 때에는 만사를 제치고 참석해 특별 강연을 하기까지 했다.
국과연에 대한 미국의 기술지원을 이끌어내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또 한 사람으로 패터슨 대령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는 한국 방위산업의 육성지원을 위해 국과연에 대한 기술지원의 당위성을 우리보다 더 열심히 미군 당국에 설명해준 분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과연 연구팀들이 기술자료를 복사하고 중장기 연구계획 등 각종 서류의 사본을 만드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제록스 복사기를 무료로 대여해주고 복사용지를 제공하기도 했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엔 미국 제록스사와 우리 정부 사이에 복사기에 대한 임대차계약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기관은 복사기를 대여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을 패터슨 대령은 자신의 사무실이 국과연에 있는 것으로 서류를 꾸며 복사기를 제공한 것이다. 번개사업 중에는 매일 100쪽이 넘는 사업 보고서를 청와대, 국방부 및 관계기관에게 제출해야 했는데, 이 복사기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번개사업
1971년 1월28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부를 연두 순시한 자리에서 70년대에 달성해야 할 국방 연구개발 목표로 첫째, 1976년까지 최소한 이스라엘 수준의 자주국방 태세를 목표로 총포 탄약 통신기 차량 등의 기본 병기를 국산화하고, 둘째, 80년대 초까지 전차 항공기 유도탄 함정 등 정밀 병기를 개발 생산할 수 있는 기술기반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 공업은 한 마디로 가내공업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예를 들면 공작기계 분야는 직조기의 형틀 주조가 고작이었고, 단조기술은 차량정비용 공구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며, 통신산업도 야전 전화기를 겨우 만드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가공 능력도 금성사(현 LG)의 라디오용 금형 제작이 고작이었고, 재봉틀 시계 자전거 및 자동차의 반제품 조립이 공업력의 전부였다.
방산 분야는 더욱 한심한 상태였다. 경남 양산에 미국 지원하에 M-16소총 공장을 건설중이었으나 완공되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태였고, 총열을 가공할 수 있는 설비는 대전의 국제특수금속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브로칭 머신’ 한 대가 전부였다.
나는 소장의 지시로 공사 교관으로 있으면서 2.75인치 로켓을 연구하다가 국과연에 입소한 송문범 중령(순직)과 함께 대전차 및 대함 로켓, 대전차 유도탄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연구실, 시험장, 연구장비, 인력 및 예산 등 중장기 연구개발계획을 세워 보고했다.
이렇게 각 분야에 걸쳐 연구기반 조성에 전력하던 1971년 11월9일 신 소장은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으로부터 대통령의 긴급지시를 전달받았다. 연말까지 소총을 비롯해 기관총, 60밀리 박격포, 수류탄, 지뢰, 소형 고속정 및 경항공기의 7가지 무기를 시제 개발하라는 내용이었다.
곧이어 청와대에서 문서로 시달된 내용은 (1)카빈 M2(10정) (2)M1소총 자동화 MX (2정) (3)경기관총 M1919 A4(5정) 및 M1919 A6(5정) (4)60mm 박격포 M19(4문), 81mm 박격포 M29(6문) 60밀리 박격포 경량화(2문) (5)3.5인치 로켓 포 M20 A1(2문) 및 M20 B1(2문) (6)수류탄 MK2(300발) (7)대인지뢰 M18 A1(20발), 대전차 지뢰 M15(20발)였으며 시제 기간도 1차는 12월30일까지, 2차는 1972년 1월부터 3월 말까지로 돼 있었다.
당시의 형편없는 산업 수준이나 창설된지 1년도 안 돼 기반도 아직 다지지 못한 국과연에 1개월 반 만에 그런 무기를 시제 개발하라는 것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지시였다.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박 대통령의 긴급 무기개발 지시는 당시 국가안보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유관 부처가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탁상공론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대한 경고였으리라 생각된다. 박 대통령은 방위산업을 강력하게 추진키 위해 11월10일 청와대에 방위산업을 전담할 경제제2비서실을 신설하고 수석비서관에 상공부의 오원철 차관보를 임명했다.
40일간 고군분투
초비상사태에 돌입한 국과연은 11월13일 긴급 무기개발 사업을 ‘번개사업’으로 명명하고 개발사업계획을 군의 작전명령 형식으로 작성해 연구부서에 시달하는 한편 상황실을 설치하여 날마다 보고토록 했다. 신 소장은 훈시를 통해 “번개사업은 대통령이 긴급 지시한 중차대한 사업으로 청와대 경제 제2수석이 직접 감독하고 통제할 것이며, 사업 성패가 곧 연구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니 사력을 다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나는 번개사업에서 로켓포의 개발 책임을 맡았다. 도면이나 기술자료가 전혀 없는 실정이라 앞일이 막막했지만 우선 연구팀을 편성하고 40일간의 활동계획을 역순으로 작성했다. 업무를 대충 적어보니 40일 동안 집에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 월요일에 아예 옷 보따리를 한 아름 안고 출근했다.
오수석은 수시로 개발실을 방문해서 사업 진행상황을 직접 파악했다. 연구소에는 밤새워 일하는 연구원들을 위해서 24시간 난방시설을 가동했고, 연구원들은 일하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깐씩 눈을 붙이곤 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M20 A1과 M20 B1의 3.5인치 로켓포 도면을 구하는 일이었다. 육군 병기감실에 자료를 요청했으나 불가능하다는 회신이 왔다. M20 A1과 M20 B1의 주된 차이는 포신의 재료와 제조공법으로, A1은 발사관을 만들 때 알루미늄 합금을 압출하여 만들고 B1은 주조하여 만든다. 할 수 없이 육군 수경사(현 수방사)에서 운영중인 M20 A1과 M20 B1포를 1문씩 빌려와 이를 분해해서 구성을 파악한 후 부품을 스케치하고 치수를 정밀 측정해서 도면을 작성하는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를 시작했다. 재질 분석은 빌려온 장비를 부술 수가 없어 육안 검사와 비파괴 시험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군에서 빌려온 로켓포는 오래 사용한 것이라 마모가 심해 정확한 치수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품 도면을 마무리짓고 조립 도면을 그려보니 서로 치수가 맞지 않아 며칠 밤을 새우고서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잊지 못할 일은 전자 통신을 책임지고 있는 서정욱 박사(현 SK텔레콤 부회장)로부터 뜻밖에도 3.5인치 로켓 포에 대한 미군의 기술교범(TM)을 얻을 수 있어서 부품 및 조립도면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된 일이다.
다음은 시제를 맡길 전문업체를 찾아내 30일 안에 시제하도록 계약하는 일인데, 그 또한 쉽지 않았다. 그간 산업실태를 조사한 자료와 상공부의 도움을 얻어 부품별로 시제 업체를 선정해서 가까스로 계약을 했지만, 그때 겪은 어려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날마다 진척 상황을 보고하라는 청와대의 독촉이 빗발치듯 했고, 접촉한 업체들은 경험도 없는데다 기간도 너무 촉박해서 계약에 응하려고 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수없는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사업체의 기술진과 함께 밤새워 노력한 덕택에 12월14일 드디어 A1 및 B1형을 2문씩 조립하고 검사를 마쳤다. 비록 미 군사규격에 맞는 완벽한 제품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사업기간 내에 시제에 성공한 것이다. 조립과 검사가 끝났을 때 연구원들은 긴장이 풀려서 한동안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국과연으로부터 시제품이 완성됐다는 보고를 받은 오수석은 12월15일 오후 국과연을 방문했다. 시제품들에 대한 보고를 받고는 몇 가지 보완사항을 지시해 다시 밤을 새워 보완작업을 마쳤다.
예상치 못한 사격시험 지시
그런데 다음날 아침 오수석으로부터 개발책임자들에게 시제품을 즉시 청와대로 가져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우리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현역 장교였던 우리는 머리는 장발인데다 수염도 텁수룩하고, 한달 이상 세탁을 못 한 작업복은 기름에 절어 모두들 거지 중에 상거지 꼴이었다.
오수석에게 전화해 난처한 사정을 말하고 이발하고 옷이라도 갈아입게 오후로 미룰 수 없느냐고 양해를 구했더니 오수석은 “지금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무슨 소리냐”면서 “각하께 우리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을 해냈는가를 직접 보여주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정했으니 그대로 들어오라”고 했다.
시제품들을 트럭에 싣고 청와대에 도착하니 오수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화기(小火器)와 로켓포는 접견실에 마련한 테이블 위에, 박격포는 테이블 옆 빨간 카펫 위에 진열한 후 개발 책임자들은 거지꼴을 하고 대통령을 맞기 위해 각자 시제품 앞에 도열했다. 밤새워 닦고 손질한 시제 병기들은 휘황찬란한 불빛을 받아 더욱 멋있어 보였다. 잠시 후 들어온 박 대통령은 시제품을 잠시 응시하더니 미소를 띠며 신소장 앞으로 다가가 악수를 나누었다.
박 대통령은 이어서 도열한 개발 책임자들 앞으로 다가와 개발과정과 시제시 문제점들을 보고받은 후 시제품을 일일이 점검했다. 박 대통령은 약간 상기된 모습으로 “금년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음을 보여줬다”며 격려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간 쌓였던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바로 더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와대에서 돌아온 다음날 아침, 국과연으로 오수석의 전화가 걸려왔다. 시제품으로 즉시 사격시험을 하라는 지시였다. 사격시험은 2차 시제품부터 할 것으로 믿고 있던 우리는 이 지시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오수석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 이것 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사격시험은 1971년도 크리스마스 바로 전날이었다. 미군 군사규격의 로켓 포열재료를 국내에서 구할 수가 없어 강도가 떨어지는 창틀용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해 시제했기 때문에 사격시 혹시나 폭압을 못 이겨 파열되지는 않을지, 파열된다면 인명 피해는 얼마나 클지 등등 온갖 상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전차 로켓탄은 위력이 큰 병기인데다 규격 재료를 쓰지 않은 시제포여서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 충분한 안전 대책을 취해야 했다. 로켓포 주위에 모래가마니를 쌓아 방호벽을 만들고 사수를 보호하기 위해 발사장치를 포에서 분리해 2m 길이의 전선으로 연결한 후 포와 사수 사이에도 모래가마니를 쌓았다. 참관인들은 로켓 발사시 뒤로 분사되는 후폭풍(後暴風)을 피해 로켓포 측방 50m 위치에 자리잡게 했다.
발사준비가 완료됐는데도 사격을 위해 차출된 병사가 겁을 먹고 쏘려고 하지 않아 첫 발은 개발 책임자인 내가 하기로 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기도가 나왔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 채 눈을 감고 격발기를 당겼다. 순간 3.5인치 로켓탄은 “꽝”하는 굉음을 내고 날아가 표적에 명중했다. 이 순간 모두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쳤다. 아무 일이 없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감사 기도가 나왔다. 연구원들과 같이 로켓포를 육안 검사해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머지 시제포 3문에 대한 사격을 연구원들이 차례로 실시했다. 명중률도 높았고 염려했던 포열도 이상이 없었다. 규격 재료만 사용하면 로켓포 국산화는 문제 없을 것 같았다.
제2차 번개사업
제1차 번개사업 결과를 검토한 오수석은 제2차 번개사업 기간을 1972년 1월부터 3월 말까지 3개월로 정했다. 시제 품목은 1차 때와 그리 달라진 것은 없었으나 수량이 훨씬 늘었다.
제2차 번개사업은 양산을 위한 마지막 시제 개발사업이기 때문에 군원품과 동일한 성능과 품질을 보장하려면 각종 도면, 품질검사서, 치공구 및 검사 게이지 등 기술자료 묶음을 갖춰야 한다. 3개월 내에 이를 갖추려면 미국의 지원을 받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1972년에 들어서서 국과연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미 국방부가 1월7일을 기해 하딘 씨를 단장으로 하는 기술지원팀을 국과연에 파견한 것이고, 또 하나는 초대 소장인 신응균 장군이 그간의 격무로 건강을 잃어 소장직을 사임함에 따라 2월1일부로 KIST 소장으로 있던 심문택 박사가 제2대 소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번개사업팀은 때맞춰 내한한 미국 기술지원팀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갈망하던 기술자료들을 적시에 입수했을 뿐만 아니라 기본병기에 대한 생산 도면도 ‘한국군 현대화 계획’에 포함시켜 미국의 대외군사판매(FMS)를 통해 쉽게 구매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연구원들은 아연 활기를 띠게 됐다.
미 국방부가 국과연과 한국의 방위산업을 적극 지원한 배경은 번개사업을 통해 보여준 국과연 연구원들의 열성과, 도면도 없이 역설계로 병기를 제작해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한국이 시제하려는 병기 대부분이 미군에서는 이미 도태됐거나 머지 않아 도태될 구식 장비들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2차 번개사업이 성공하자 오수석은 3월 중순경 시제품에 대한 공개시사회 준비 지시를 내렸다. 시사회는 4월3일 보병 26사단 지역에서 박 대통령을 비롯해 3부요인, 각군 총장, 방산업체 대표, 언론기관 및 연구기관장들의 참관하에 실시하게 돼 있었다. 국과연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국가적인 행사였다.
민간인 과학자로서 부임 두 달 만에 행사를 주관하게 된 심 소장은 누구보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기전문가인 박 대통령에게 경과보고를 해야 하고, 시사회 후 박 대통령이 시제품들을 둘러볼 때는 수행도 하게 됐으니 병기가 아직 생소한 심 소장으로서는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심 소장은 틈나는 대로 시제품 명칭과 제원을 암기했고,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개발 책임자들을 불러 확인하곤 했다.
4월3일 행사에 앞서 3월30일 유재흥 국방장관 임석하에 예행연습을 실시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시사회 때의 해프닝
육군에서는 시사회를 더 실감나게 하기 위해 로켓포와 대전차 지뢰의 표적으로 못 쓰게 된 전차 2대를 준비했다. 폐전차 한 대는 로켓포 전방 150m에 있는 강둑에 설치했다. 국방장관을 모시고 한 예행연습 때 로켓탄 4발이 모두 전차에 명중했는 데도 관람석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경험이 있어 행사일에는 관람효과를 높이기 위해 휘발유 2ℓ를 비닐봉지에 담아 전차 포탑 안에 넣어뒀다.
4월3일 드디어 시사회 날이 밝았다. 날씨는 쾌청했고 사격장 인근 보리밭에는 소담스럽게 자란 보리들이 푸른색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삼부 요인, 각군 총장, 시제업체 대표 및 행사요원들이 대기한 가운데 박 대통령이 헬기로 도착하자 국과연 소장의 경과보고가 있었고 이어서 곧바로 시사회가 시작됐다. 맨 처음 카빈총을 시작으로 기관총, 40mm 유탄발사기, 3.5인치 및 66mm 로켓포, 크레모어 대인지뢰, 대전차 지뢰, 60mm 경량 및 표준형 박격포, 81mm 박격포의 순서로 시험이 실시됐고, 마지막에는 전 박격포의 일제 사격으로 끝을 맺었다. 시사회는 대성공이었다.
로켓포 사격에서는 3.5인치와 66mm 로켓탄 4발이 전부 전차 포탑에 명중했다. 그 순간 폭발음과 함께 전차에서 시뻘건 화염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안에 넣어둔 휘발유에 불이 붙은 것이었다. 효과 만점이었다. 박 대통령 이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1972년 4월3일 박정희 대통령은 보병 제26사단 지역에서 열린 국산병기 시사회를 참관했다. ⓒ 국가기록원
대전차 지뢰시험 때에는 큰 사고가 날 뻔했다. 대전차 지뢰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 폐전차 밑에 지뢰를 매설했는데, 폐전차는 박 대통령이 앉은 관람석에서 약 500m 거리에 있었다. 지뢰가 폭발하는 순간 불기둥이 솟아올랐고 흙먼지가 일어나 전차의 모습은 순식간에 가려졌다. 그런데 공중에서 난데없이 “쉭-쉭-” 하는 파열음이 들리면서 몇 개의 물체가 관람석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모두 “악”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다행히 그 물체는 관람석 옆 개울에 떨어졌다. 전차의 무한궤도 조각이었다.
박 대통령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오수석의 얘기에 따르면 오수석 옆에 조그마한 쇳조각이 떨어져 무척 놀랐는데, 박 대통령은 이런 소동에도 아랑곳않고 쌍안경으로 전차의 피해 상태를 관찰하고 있었다고 한다. 먼지가 가라앉은 후 전차를 보니 전차 포신이 떨어져 나간 채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행사를 주관한 심 소장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심소장에게 “예정대로 진행시키라” 하여 계획된 시험을 모두 마쳤다.
다음 시험은 맨땅에 매설한 대전차 지뢰 3발을 0.5초 간격으로 연속 폭발시키는 시험이었다. 대전차 지뢰가 폭발한 자리에는 지름 2m, 깊이 1m의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대전차 지뢰는 무게 40~50t의 전차를 파괴할 수 있게 만들어졌지만 정말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자 경호실에서는 지뢰개발 책임자인 김직현 박사(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심문했다. 원인은 혹시 지뢰가 안 터지면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지뢰를 하나 더 묻은 것이 화근이었다. 지뢰가 둘 다 폭발하는 바람에 그런 결과를 빚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탄약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두 개가 다 폭발했을 경우의 안전거리 문제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훗날 김 박사는 그 순간 인생이 끝장나는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1972년 4월3일 국방과학연구소 ‘번개사업팀’이 개발한 소총, 기관총, 60밀리 박격포, 수류탄 등 국산병기 시제품을 살펴보는 박정희 대통령. ⓒ 국가기록원
시사회가 끝난 후, 박 대통령은 감개무량한 듯 사격장을 한번 천천히 둘러보았다. 크게 만족한 모습이었다. 박 대통령은 심 소장의 안내에 따라 전시된 국산병기들을 둘러보았다. 연구원들은 모두 조마조마했지만 대통령의 질문에 심 소장은 능숙하게 답변했다.
그 후 ‘개발생산’으로 명명된 제3차 번개사업이 4월1일부터 6월 말까지 이어졌다. 개발 생산 사업은 이미 개발한 병기를 생산함과 아울러 통신기, 탄약 및 개인 장구류를 추가 시제 개발하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의 극비명령
1971년 12월24일 제1차 번개사업 시제품에 대한 사격시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크리스마스 날 오랜만에 귀가한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목욕탕과 이발소를 찾았다. 번개사업이 시작된 지 한달 반밖에 안 됐는데 마치 수개월이 지난 것 같았다.
월요일 일찍 출근해 2차 번개사업 계획을 작성하고 있는데, 오수석으로부터 급히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다른 때는 대개 비서관을 통해서 연락했는데 그 날은 오수석이 직접 전화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오수석 사무실로 들어가니 공군 작전참모부장인 김중보(金重寶) 소장이 먼저 와 있었다.
오수석의 표정이 다른 때와는 달리 굳어 있었다. 오수석은 메모지 한 장을 꺼내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각하의 명령을 하달한다. 극비사항이다. 보고 난 후 즉시 파기하라. 오늘 당신들을 급히 부른 것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서 사전 준비를 위한 것으로 정식 명령은 국방부를 통해 하달될 것이다. 국과연은 국방부의 명령을 받는 즉시 개발계획을 작성해서 청와대에 보고하고, 공군은 유도탄이 개발된 후 작전운영계획을 수립해서 대통령께 보고할 것. 이상”
오수석이 내민 것은 놀랍게도 박 대통령의 친필 메모였고, 메모지 서두에는 빨간 잉크로 ‘極秘’라고 씌어 있었다. 그 내용이 하도 엄청난 것이라 나는 말문이 탁 막혀버렸다. 메모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유도탄 개발지시
극비
⊙방침
(1) 독자적 개발체제를 확립함.
(2)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되, 1단계는 75년 이전 국산화를 목표로 함.
(3) 기술개발을 위하여 국내외 기술진을 총동원하고 외국 전문가도 초청하며 외국과도 기술 제휴함.
⊙추진계획
(1) 비교적 용이한 것부터 착수한다.
유도탄 사거리 : 200km 내외의 근거리
(비행거리가 멀면 투자비가 고가, 기술의 고도화를 요하게 됨).
탄두 : 전략표적 파괴목적으로 파괴효과가 큰 것을 개발하되 탄두의 교환성을 유지함.
(2) 유도탄 기술연구반을 ADD(국과연)에 부설하고 공군에 유도탄 전술반을 설치함.
이상.
당시 우리나라 기술 수준이 3.5인치 로켓탄도 못 만들어 쩔쩔매던 판국에 사거리 200km의 지대지 유도탄을, 그것도 4년 안에 개발하라는 것은 무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기술수준이 어떤지 대통령이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무리 대통령이 적극 도와준다고 해도 의욕만 갖고 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오수석의 숨쉴 틈 없이 밀어붙이는 스타일은 번개사업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것만은 지나치다고 느꼈다. 오수석은 공군에 지대지 유도탄을 작전 운영토록 한 것은 공군이 우리 군의 전략타격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76년까지 장거리 유도탄을 개발하라”
나는 오수석에게 “대통령 명령이시니 최선은 다해보겠지만 미국처럼 모든 노하우와 연구시설이 갖춰진 나라에서도 퍼싱(Pershing, 사거리 600km)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는 데 10년이나 걸린 것을 생각하면 이 명령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국과연에는 엄연히 소장, 부소장이 계신데 나 같은 일개 실장을 불러 이런 중대한 지시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오수석은 “보안 이유도 있지만, 로켓 연구실장의 의견을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방부에서 정식 공문이 하달될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고 지대지 유도탄 개발계획을 구상하고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라”고 말했다.
71년 1월28일 박 대통령의 국방부 연두순시에서 유도탄과 같은 정밀병기 개발은 1980년 초까지 기술기반을 확보하라는 지시에 따라 국과연의 장기연구개발계획에는 유도탄, 그것도 단거리 전술 유도탄 개발을 1970년대 후반부터 착수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런 상황에 그런 엄청난 지시를 받고 보니 참으로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에 국방부(합참)에서 정식으로 하달된 유도탄 개발지시 내용은 한 술 더 뜬 것이었다. 국방부의 유도탄 개발에 대한 정식 공문은 1972년 4월14일 국과연에 시달됐는데 보안을 위해 ‘항공공업 육성계획 수립지시’라는 위장 사업명으로 돼 있었다. 메모지 내용과 다른 점은 “북한의 기동공격무기를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단거리 전술 지대지 유도탄을 1974년 말까지 개발 및 생산하고, 1976년까지 북한의 주요 군사기지를 단시간 내에 파괴 및 무력화시킬 수 있는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되 국과연 소장 책임하에 거국적으로 연구계획단을 편성해 8월 말까지 구체적인 연구개발계획서를 국방장관에게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탄두 개발과 더불어 급속도로 발전해온 유도탄은 그 성능이 하루가 다르게 개량되고 있었다. 유도무기는 이제 무기체계에 핵심이 됐을 뿐 아니라 현대전을 과학기술전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됐다. 또한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은 적 후방 깊숙이 위치한 전쟁지휘본부 등 전략 표적을 강타할 수 있어 전쟁을 억지하는 주요 무기체계가 됐다.
당시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할 경우 예상되는 북한의 공격양상은 1967년 중동의 6일 전쟁이나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처럼 우세한 전폭기, 기계화 부대, 유도탄 및 고속정을 총동원한 기습에 의한 단기 속도전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와 같은 군사적 위협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쟁억지력을 가진 정밀 전술 및 전략 타격무기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시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군은 지대지 유도탄을 단 한 발도 갖고 있지 못했고, 무유도 로켓탄인 어니스트 존(Honest John) 1개 대대가 배치돼 있을 뿐이었다. 미국이 한국군에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과 같은 1급 공격무기를 제공할 리 만무한 상황에 북한의 끊임없는 군사적 도발로부터 국가를 보위할 책임을 지고 있는 대통령의 긴박한 심정을 당시에는 헤아리지 못하고 나는 정책의 무모함만을 탓했다.
유도탄 개발계획 수립
국방부 지시에 따라 국과연 소장은 5월1일자로 국과연, KIST, 한국과학원, 육·해·공군 사관학교의 교관 요원으로 구성된 개발계획단을 설치하고 기본 사업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계획단 요원은 KIST에서 이경서·정선호·손성재·김연덕, 한국과학원에서 김길창·윤덕룡, 육군에서 김정덕, 해군에서 최호현, 공군에서 홍재학, 국과연에서 박귀용·서정욱 박사 들과 필자였는데, 당시 활용 가능한 인원은 모두 동원됐다. 박귀용씨는 공군에서 전역한 후 제2차 번개사업중에 국과연에 입소했다. 계획단장은 심소장이 직접 맡고 간사는 이경서 박사가 맡았다.
여기서 1970년 초 우리나라의 로켓 개발 현황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1970년 국과연이 창설되고 내가 로켓 분야를 맡았을 때 우리나라에는 국과연 외에 로켓을 연구하는 두 그룹이 있었다. 공사 교관들로 구성된 연구팀과 KIST의 특수사업팀이 그들이었다. 공사 로켓팀은 박귀용 중령이 주축이 돼 과학기술처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공군의 2.75인치 공대지 로켓을 개발하고 있었다. 연구원들의 열의는 대단했으나 불충분한 연구비, 연구시설 미비와 국내 산업의 기술낙후로 많은 애로를 겪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로켓 추진제 제조가 가장 문제였는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추진제 제조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복기추진제 대신 아스팔트형 추진제를 실험실에서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로켓을 발사하기 전에 로켓 추진기관(rocket motor)의 추진력을 시험하는 지상 연소시험을 통하여 로켓의 비행성능을 예측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개발단계를 밟았다. 마침내 1971년 10월25일 인천 팔미도에서 발사시험에 성공했는데 비행상태를 계측할 장비가 없어 정확한 탄도를 구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나는 지상 연소시험과 비행시험에 모두 참관했는데 나중에 로켓을 연구 개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KIST에서는 이경서 박사(현 단암전자 사장)가 중심이 되어 대전차 유도탄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단계여서 실질적인 연구활동은 없었다. 1971년 2월16일 로켓 연구의 통합을 위해 과기처 주관으로 KIST 회의실에서 국과연, 공사 및 KIST의 관련 연구원들이 모여 회의를 했으나 결론 없이 헤어졌다. 이런 가운데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가 있자 공사와 KIST의 로켓 연구팀이 모두 국과연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계획단은 구성됐지만 구성원의 소속이 다르고 작업내용 또한 고도의 보안을 요구하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닥쳤다. 국방장관은 이러한 애로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계획단 자문위원으로 국군보안사령관과 합참 정보국장을 지명했다. 일례로 비밀작업을 수행하려면 단원들에게 군사비밀 취급인가가 있어야 하는데, 국과연 직원과 현역 군인들 외에는 비밀취급 인가증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KIST의 일부 박사들은 오랫동안 미국에서 생활하다 온 유치 과학자들로, 주민등록증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민등록이 된 사람도 비밀취급 인가를 위한 신원조회에 통상 한 달 이상이 필요한데 주민등록도 없는 사람을 신원 조회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작업기간은 4개월도 안 남았는데 비밀취급 인가를 받는데 1개월 이상 허비한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민간인들은 과거에 비밀 업무를 취급한 적이 없기 때문에 보안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리가 없었다.
안가에서 비밀작업
설상가상으로 대미(對美) 보안에 만전을 기해야 했기 때문에 미국 기술지원단이 있는 국과연에서의 작업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당시 한국에 대한 미국정부의 군사기술정책이 105mm 곡사포조차도 ‘절대 불가’였음을 생각할 때 사거리 200km의 지대지 유도탄을 개발한다고 하면 미국은 틀림없이 이를 무산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1973년 10월 26일 국방과학연구소의 105밀리 곡사포 시제품 발사시험. ⓒ국방과학연구소 화보집
나는 이경서 박사와 같이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를 방문해 강창성 사령관에게 박 대통령의 지대지 유도탄 개발지시와 계획단의 편성 및 작업계획일정을 브리핑한 후 ▲계획단원의 신속한 비밀취급인가 취득 ▲보안교육 ▲비밀작업장소 확보에 대한 조치를 건의했다. 이에 대해 강사령관은 “그렇지 않아도 각하로부터 ‘항공공업’을 최대한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건의사항은 최단시일 내에 처리하겠다. 이 업무를 전담할 장교를 국과연에 파견하겠으며 앞으로 지원이 필요하면 파견관의 도움을 받거나 나한테 전화하도록 하라”며 흔쾌히 건의사항을 받아들였다.
강 사령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한 달 이상 걸리는 비밀취급 인가가 일주일 만에 나왔고 곧이어 계획단원 전원이 보안학교에서 이틀간 군사보안 교육을 받았다. 현역 군인들에게는 익숙한 내용들이었지만 민간인들은 난생 처음 듣는 보안규정에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보안사에서는 또 작업장소로 모처에 안가를 마련해 주었는데, 상근 작업요원은 계획단원 중에서 학교수업 등 사정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최소한의 핵심 인원만으로 편성했다.
4개월간 안가에서 숙식을 같이하며 작업한 상근 요원들은 김정덕(현 하나로 통신 부사장), 박귀용, 이경서, 최호현, 홍재학 박사(현 단국대 교수)와 필자였다. 그 외에 과학원의 윤덕룡 교수와 김길창 교수, 그리고 KIST의 김연덕 부장은 정기적으로 모임에 참석해 자기 분야에 대해 작성한 계획서를 놓고 토론했다.
본격적인 항공공업계획 작업은 1972년 5월8일 저녁부터 시작됐다. 심 소장은 업무개시 전날인 5월7일(일요일) 저녁에 상근요원 부부를 초청해 최고급 요리로 대접하고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부인들에게 일장 연설을 했다.
“여러분의 남편들은 국가의 중요한 일로 확실한 기간은 예상할 수 없지만 내일부터 상당 기간 해외출장을 떠나야 하니 이해해주기 바란다. 앞으로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아 달라.”
보안문제를 걱정한 소장이 연극을 한 것이었지만, 심 소장의 연기가 어찌나 천연덕스러웠는지 속지 않은 부인이 없었고, 다들 기가 질려 말을 못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옷보따리를 쌌다. 보안상 이유로 밤에 안가로 이동했다. 안가라고 해서 무슨 별난 곳인 줄 알았는데 일반 주거지 안에 있는 평범한 아파트였다. 안가에는 보안사에서 파견된 상사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상사로부터 주의사항이 내려졌다. 24시간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쳐놓을 것, 최대한 정숙을 지킬 것, 낮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바깥 출입을 금할 것, 식사는 집 안에서 할 것, 전화는 업무에 국한하되 지정된 자만 할 것 등이었다.
보안사의 준비도 철저했지만 주의사항도 많아 처음부터 무척 긴장이 됐다. 심 소장은 연구소와의 업무연락은 보안상 국과연 소속인 내가 하도록 지시했다. 안가의 전화번호도 국과연에서는 심소장만 알고 있었다.
작업 일정을 정하고 각자가 맡을 업무를 분담했다. 이경서 박사가 총괄, 박귀용씨는 추진기관, 기체는 홍재학 박사, 유도조종은 최호현 박사, 시험평가는 필자가 맡았다. 원래는 내가 유도조종 분야를 맡도록 돼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시험평가에 대해 생소한 데 비해 그나마 나는 번개사업 경험이 있었고 유도탄 체계문제와도 관련되니 내가 맡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외에 김길창 박사가 연구개발 PERT를, 윤덕룡 박사가 재료, 김정덕씨가 공작을 맡았다.
가장 급한 것은 지대지 유도탄의 개념을 정립하는 일이었다. 즉 유도방식, 기체 형상, 추진기관 및 추진제 등에 대한 개념을 정하는 일이었다. 이런 것들을 정해야만 이에 필요한 연구인력, 장비 및 시설을 결정하고, 각종 지상시험과 비행시험을 어떻게 하고 이에 필요한 계측장비를 어느 규모로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유도탄의 원리에 대한 기본 자료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지대지 유도탄에 대한 자료는 외국에서도 대부분 비밀에 속하기 때문에 있을 리가 없었다. 구체적인 자료들을 확보하지 못해 개발계획을 정확하게 작성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 자료에 근거하지 않은 개발계획을 대통령에게 보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1차 번개사업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었지만, 이번 유도탄 개발사업은 번개사업과는 비교도 안 되는 차원의 일이었다. 필요로 하는 자료들은 거의가 비밀에 속하는 것이라 외국에서, 그것도 1, 2개월 내에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본병기에 관한 것이면 미 기술지원단에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유도탄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합참 정보국장에게 부탁했지만 해외주재 무관들이 유도탄 전문가도 아닐뿐더러 단기간에 그런 자료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대답만 들었다. 그 와중에도 미국과 유럽에 주재하는 무관들이 그곳 잡지와 일간지에 난 유도탄 관련 기사를 보내줬는데, 별 도움은 안 됐지만 그 성의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보다. 이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미 국방부로부터 예상치 않은 군 연구소 방문초청장이 하딘씨를 통해 나에게 전달된 것이다.
뜻하지 않은 미 국방부 초청장
안가로 옮긴 지 얼마 안 돼 심 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국 기술지원단 단장인 하딘씨와 함께 할 얘기가 있으니 소장실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한국 방위산업의 역사가 일천해서 무기 연구개발에 대한 규정 및 순기(循期) 관리절차가 정립돼 있지 않아 미국이 기술 지원하는 데 지장이 많다. 앞으로 국과연이 독자적으로 무기를 개발할 경우 지금처럼 주먹구구식으로 하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나는 국과연에 대한 미국의 기술지원도 중요하지만 국과연에 연구개발에 대한 자생력을 길러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국과연 연구원들과 연구개발 업무를 협조하는 데에도 용어의 정의와 개념이 달라 어려움이 많다. 우리가 국과연 연구원들에게 무기 연구개발에 대한 절차와 용어를 교육하는 문제도 고려해봤으나 그보다는 연구원 한 사람을 미 국방부 및 육·해·공군 연구소를 견학시켜 국과연 직원에게 전수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 생각하여 구 박사를 미 국방부에 추천했는데, 어제 초청장과 여행 일정이 왔다. 항공료와 숙식비 등 모든 경비는 미국 정부가 부담한다”
하딘씨가 이렇게 말하면서 초청 관련 서류와 비행기표를 내놓았다.
지금 들으면 어처구니없는 얘기이지만, 당시 국과연 연구원과 하딘팀 사이에는 용어상의 혼선으로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미군은 연구개발과정을 단계별로 기초연구, 응용연구, 탐색개발, 선행개발(A 및 B) 등으로 나누어 연구 내용과 성격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데 반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위한 기초연구만 하고 귀국한 국과연 연구원들은 이러한 구분을 알 턱이 없어 개발 및 검토사항까지도 전부 연구라고 말하니 미국측으로서는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하딘팀은 주요 무기체계를 새로 개발하려면 개념 형성, 타당성 검증, 실용개발 및 생산단계와 이에 따른 시험평가를 거쳐야 하는데 무조건 미국의 기술자료에 의존하려고 하니 앞으로 국과연의 독자적 연구능력 배양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특히 무기의 품질보증을 위한 시험평가를 소홀히 하는 데에 우려를 나타냈다.
나의 방미 일정은 5월16일부터 6월28일까지 44일간에 걸쳐 육ㆍ해ㆍ공군의 연구개발을 관리하는 사령부와 산하의 화포, 탄약, 신관, 유도탄 등의 연구소뿐만 아니라 휴즈(Hughes) 및 필코-포드(Philco-Ford) 등 방산업체도 방문하도록 짜여 있었다. 방위산업 전반을 이해할 수 있게끔 작성됐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날 밤 상근 계획팀은 안가에서 심소장과 모임을 갖고 천재일우의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하고 연구소마다 2∼3일로 돼 있는 대부분의 방문 일정을 대폭 조정, 유도탄연구소에서 가급적 오래 머물도록 수정했다. 즉 전체 방문일정의 반인 3주를 육군 유도탄연구소에서 체재하도록 했다.
다음날 하딘씨를 만나 로켓과 유도탄 연구를 책임진 나로서는 유도탄연구소 위주로 방문일정을 바꾸고 싶다는 말과 함께 수정된 일정을 제시했다. 하딘은 난색을 표하면서 “구박사, 넘버 원 말썽꾼!(Dr. Ku, you, No. 1 trouble-maker!)”이라고 소리쳤으나 결국은 나의 간청에 육군 유도탄연구소에서 2주일간 머무는 것으로 일정을 수정해줬다. 그 후부터 하딘팀에서는 툭 하면 나를 “넘버 원 말썽꾼”이라고 불렀다.
미 육군 유도탄연구소에서
72년 5월16일 오후 2시15분 나는 김포공항을 출발하는 미국의 NWA 006기에 몸을 실었다. 출장 일정은 워싱턴에서부터 시작됐다. 미 국방당국은 내가 미국 방문 일정을 마칠 때까지 안내장교를 붙여줘 여행에 불편함이 전혀 없도록 배려해줬다. 방문기관마다 오전 9시부터 점심시간 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후 4시까지 브리핑이 계획돼 있어 날마다 6시간씩 브리핑을 들었다. 도저히 전부 소화할 수 없어 양해를 구하고 녹음을 했다.
5월21일, 육군 유도탄연구소가 있는 앨라배마주의 헌츠빌에 도착하였다. 육군 유도탄연구소는 육군 유도탄사령부(MICOM) 산하 연구기관이다. MICOM (Army Missile Command)은 전에 레드스톤 조병창(Redstone Arsenal)으로 불리던 곳으로 그 면적은 3000만 평이 넘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폰 브라운 박사가 이곳에서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을 개발했고 지금도 NASA의 주요 연구시설이 이곳에 있다. 말하자면 미국 우주개발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도시의 자랑인 우주박물관에는 미국이 개발한 각종 로켓과 우주선이 실물로 전시돼 있는데 아폴로 로켓은 너무 커서 눕혀서 전시해 놓았다.
5월22일 아침 유도탄 연구소에 도착하니 체계연구실장인 웜불씨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보안검사가 퍽이나 까다로웠다. 웜불씨는 나를 곧바로 소장실로 안내했다. 소장인 맥다니엘 박사는 30년 가까이 이곳에서 근무한 유도탄 전문가였다. 나는 준비해간 브리핑 자료를 토대로 우리나라의 군사정세, 국과연의 설립 배경, 임무와 기능을 간단히 언급하고 내가 담당하고 있는 로켓 개발 현황과 앞으로의 연구개발계획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2주간 머무는 동안 한국에 유도탄 연구소를 세우는 데 필요한 ▲연구 및 시험장비 등의 내역, 제작회사 및 예상가격 ▲추진제, 유도조종장치 및 기체 등을 시제하는 데 필요한 원료, 부품의 공급회사 및 단가 ▲연구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인력과 조직 등에 관한 모든 자료를 지원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내가 생각해도 엄청난 부탁이어서 맥다니엘 소장의 반응이 어떨지 초조함을 금할 수 없었다. 얼마 동안 눈을 감고 있던 소장은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자기가 젊었을 때 겪었던 비슷한 경험이 떠오른다면서 나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가슴 졸이던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감사기도가 나왔다.
맥다니엘 소장은 곧바로 각 연구부장들을 소장실로 집합시켰다. 체계연구실장, 추진기관부장, 비행탄도(기체)부장, 유도조종부장, 지상장비부장, 시험평가부장 및 기술지원(공작)부장이 모이자 나를 소개한 후 “각 부장들은 구박사가 연구실을 방문할 때 연구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며 2주 안에 필요한 자료들을 최대한 준비할 것과 체계연구실장이 이를 종합하라”고 지시했다. 특히 웜불씨는 후에 국과연과 유도탄 연구소가 유도탄에 관한 기술자료협정 부록을 체결할 때 미측 실무책임자가 돼 국과연의 유도탄 기술지원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선물로 받은 관성항법장치
정신없이 이곳 저곳 돌아다니고 하나라도 더 알아보기 위해 이것저것 묻는 동안 2주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6월2일 모든 일정을 마친 나는 장교클럽에서 소장 주최 만찬에 참석했다. 만찬장에는 소장 외에 각 연구부장들이 참석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맥다니엘 소장이 일어나서 “구박사의 방문이 국과연의 유도탄연구실 건설에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 후 내게 세 가지 선물을 내놓았다. 하나는 소장 지시로 각 부장들이 준비한 각종 자료, 또 하나는 이 곳 유도탄 연구소에서 차세대용으로 개발하고 있는 헬기 발사 대전차 유도탄의 개발 및 시험과정을 찍은 16mm 컬러필름이었다. 연구소에서 붙인 이 유도탄의 명칭은 호넷(Hornet)이었지만 미 육군에서 정식 무기로 제식된 후에 헬파이어(Hellfire)로 개칭됐다. 헬파이어 유도탄은 걸프전에서 이라크 전차를 파괴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도됐다.
마지막 하나는 나무상자 안에 들어 있었는데, 다름아닌 관성항법장치였다. 비록 유도탄용이 아닌 무인 항공기용이었지만 유도탄용 관성유도장치와 원리상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유도조종부 방문시 부장에게 관성유도장치에 대한 모형이라도 있으면 구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소장에게 얘기한 모양이었다. 뜻하지 않은 선물에 나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숙소에 돌아와 선물로 받은 자료철을 열어보니 무려 800쪽이 넘는 유도탄 관련 자료들이 담겨 있었다. 유도탄 연구개발에 관한 연구 및 시험장비의 카탈로그와 어니스트 존(Honest John) 크기의 유도탄을 개발할 때 필요한 유도탄 연구실 조직표 및 예상 인력자료까지 첨부돼 있었다. 이 정도면 항공공업계획을 어느 정도 수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4일간에 걸친 나의 방미는 우리의 유도탄 개발계획에 하나의 전기가 됐다. 이를 통해 국과연 연구진은 비로소 구체적인 계발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