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국산 미사일 개발사-2

여동활 2009. 2. 8. 10:30



한국 미사일 개발의 산 증인 구상회 박사 회고 2
실패, 또 실패…“날아라 백곰, 제발 날아라” 1978년 유도탄시대의 개막
2009-01-03 구상회

-‘백곰’ 유도탄이 ○○○km 떨어진 목표 상공에 도달해 표적을 향해 수직낙하중이라는 방송이 나오고, 곧이어 유도탄이 표적지 해면에 낙하하면서 일으킨 물기둥이 탄착지의 중계 카메라에 찍혀 모니터에 나타났다. 시험책임통제원의 “탄착!” 목소리와 함께 대통령 이하 단상의 모든 참관인은 환호성을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지난 몇 년 동안 오로지 이 날의 성공만을 기원해 온 연구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1978년 9월 26일, 이 날은 우리나라가 ‘유도탄 시대’를 연 역사적인 날이었다.
 
필자가 미육군 유도탄연구소에서 구해온 자료는 ‘항공공업계획’(유도탄 개발계획의 위장 명칭) 수립에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여름이 다가오면서 우리 팀이 작업하던 안가의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보안 때문에 30도가 넘는 무더위에도 문을 닫고 커튼까지 치고 선풍기 하나로 견뎌야 했으니 그런 고역이 있을 수 없었다. 사람들마다 온몸에 돋은 땀띠 때문에 고통이 심했다.

‘항공공업계획’은 이를 뒷받침할 책자 <항공공업육성방안>을 만드느라 예정보다 보름 지난 1972년 9월15일에 완성됐다. <항공공업육성방안>은 지대지 유도탄 개발에 관한 총론, 기체 및 구조, 유도조종, 시험평가, 재료 및 공작 등 각론으로 구성됐는데 200자 원고지로 1만장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 됐다.

‘항공공업계획’

<항공공업육성방안>을 청와대 보고용으로 요약한 것이 ‘항공공업계획’이다. 그 내용은 ●지대지 유도탄 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국내 기술수준을 비교 검토하고 ●이에 필요한 연구 시험장비, 시설, 인력 및 소요 예산을 제시한 뒤 ●관련 기술 및 산업기반이 전무한 우리나라에서 추진제 공장, 풍동, 대형 컴퓨터 등 연구개발장비와 비행시험장비를 구입하고 제반시설을 갖추는 데에만 미국의 견제가 없다고 해도 최소 2년은 소요된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제반시설을 확보한 후에도 관성유도조종장치를 갖춘 유도탄을 개발하는 데에는 외국의 기술지원이 없는 한 5~7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1976년까지 유도탄 개발은 극히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오원철(吳源哲) 청와대 제2경제수석을 통해서 이 내용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되자 “이른 시일 안에 유도탄을 개발할 연구소와 시험장 건설을 포함한 세부계획을 작성해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나와 이경서 박사(현 단암전자 사장)는 그후 1년 반에 걸쳐 유도탄 연구소와 비행시험장 후보지를 물색하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당시는 국도도 제대로 포장돼 있지 않아 어려움이 컸다. 경남 해안을 답사할 때에는 도로가 없어서 해군의 상륙 주정(舟艇)을 빌리기도 했다. 결국 대덕지역이 연구소 후보지로 결정됐고, 비행시험장은 유도탄의 수송 및 안전문제 등을 고려해 서해안 안흥지역으로 확정됐다.
연구소와 시험장의 부지면적은 시험 안전성 문제 때문에 애초에 100만평을 요청했는데, 당시 우리나라 정부출연연구소 중에서 10만평을 넘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유도탄 연구개발과 생산시설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당시로선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거리 수백km의 유도탄 개발에 필요한 추진제 및 탄두 제조시설, 대형 추진기관의 지상연소시험시 안전거리 확보의 불가피성, 미국과 유럽의 유도탄연구소 대지면적 등을 제시해서 대덕 유도탄연구소는 90만평, 안흥 시험장은 바다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조건으로 30만평을 일차 확보할 수 있게 됐다.


▲1974년 2월 25일 국방과학연구소를 순시한 박 대통령이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국방과학연구소 화보집

1974년 5월14일, ‘항공공업계획’은 마침내 박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율곡사업으로 추진하게 됐다. 기본지침의 핵심 내용은 사거리 500km의 지대지 유도탄(미 육군의 퍼싱급)을 1978년까지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국과연(국방과학연구소)은 항공사업담당 부소장 산하에 추진기관, 기체, 유도조종, 시험평가 등 6개 부서로 구성된 기구를 설치하고 유도탄 개발사업을 본격 추진하기 시작했다.
‘대전기계창’으로 위장한 유도탄연구소는 1974년 9월부터, ‘안흥측후소’로 위장한 비행시험장은 1975년 1월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반대를 극복하고

1973년 이후 국과연은 유도탄 개발사업을 위해서 국내외에서 많은 고급두뇌를 유치하고 있었지만 그 중 유도탄 개발 경험을 가진 전문가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유도탄을 시제할 방산업체 또한 전무한 상태였다.
이와 같은 여건 속에서 사거리 500km의 퍼싱(Pershing)급 유도탄을 1978년까지 개발한다는 것은 미국의 지원이 없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기술지원정책은 철저하게 기존 보유무기와 방어무기에 국한돼 있었고, 장거리 유도탄에 대한 기술지원은 말도 꺼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항공공업’ 사업팀은 우선 사업을 3단계로 설정해 지대지 유도탄체계를 선정했다. 제1단계는 기존 무기체계의 모방개발 단계로 지대지 유도탄의 체계설계 및 제작능력을 키우고, 제2단계에서는 모방개발한 무기체계에 대한 성능개량을 시도해서 이를 무기체계화하며, 제3단계에서는 퍼싱급에 준하는 한국형 지대지 유도탄을 독자개발한다는 것이었다. 제1단계 사업으로 선정된 유도탄이 당시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나이키 허큘리스(Nike Hercu-les·NH) 유도탄이었다.

NH 유도탄은 50년대에 미국의 맥도널 더글러스사(MD)가 지대공(地對空) 목적으로 개발한 유도탄으로 부차적으로 지대지(地對地) 기능도 갖추고 있다. 작년 말 오발사고가 나기도 했던 NH 유도탄은 레이더로 유도되는(레이더 지령유도방식) 2단추진 방식으로 지대지의 경우 사거리는 180km, 탄두 중량은 약 500kg이다. 우리 육군에도 60년대 중반에 도입돼 운영되다가 70년대는 지대지 임무로도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NH 유도탄은 50년대 기술로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모방개발을 하더라도 대폭적인 성능개량이 필요했다. 우선 사거리를 연장하기 위해 1, 2단 추진기관을 전부 추진력이 큰 복합추진제로 바꾸고, 전자회로를 모두 반도체화하며, 유도신호처리도 컴퓨터화하기로 했다.

또 1단계 사업을 조기에 완수하기 위해 NH 유도탄의 제조회사인 MD사로부터 기술을 도입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이경서 박사가 MD사와 교섭을 하게 됐고,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는다는 전제로 예비 설계에 대한 기술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기간은 6개월로 정하고 우리 연구팀이 연구에 참여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미국정부의 승인을 받는 과정에 예상대로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주한미군 사령관(스틸웰 대장)은 말할 것도 없고 미 국방부의 안보 담당차관보(아브라모비츠)까지 국과연을 방문해 강력하게 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오원철 수석은 미국이 박 대통령에게 가한 유도탄 개발 중단 압력도 대단했다고 말한다.

미국측이 제시한 반대 논리는 간단한 것이었다. 사거리 100km가 넘는 유도탄의 경우 공산오차가 통상 100m 이상이기 때문에 고폭탄에 비해 수천 또는 수만배의 위력을 갖는 핵이나 화학탄두를 장착하지 않는 한 비용ㆍ효과면에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장거리 유도탄 개발은 곧 핵탄두 개발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핵확산 방지 차원에서 반드시 중지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정부는 한국이 요청한 기술 및 장비의 판매를 모조리 거부했다.

국방부와 국과연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미국을 설득했다. “한국의 유도탄 개발은 한국군이 보유한 NH 유도탄의 성능개량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 육군이 머지않아 NH 유도탄을 폐기하고 새로운 대공 유도탄인 패트리어트(Patriot)로 대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번 한국의 유도탄 개발은 향후 한국군의 NH 유도탄 정비 유지와 성능개량을 위해서도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박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표명도 있었다.

한미 양국정부 간에 밀고 당기는 협상끝에 결국 미국 정부는 “현재 한국군이 보유한 NH 유도탄의 사거리 180km와 탄두중량 1000파운드를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양해한다”는 의견을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인 스틸웰 대장 명의로 국과연에 보내왔다.
이에 따라 1975년 12월 국과연과 MD사 간에 1단계 계약이 이뤄졌고, 국과연 연구원 10명이 6개월간 MD사에 파견돼 NH 유도탄의 지대지 성능개량을 위한 기술습득과 기술자료를 확보하게 됐다.

미국정부가 스틸웰 대장을 통해 국과연에 서한 형식으로 통보한 유도탄 사거리 및 탄두중량 제한에 관한 사항은 5공정부 때에 양국간 외교문서로 공식화됐는데, 문민정부 출범 후 북한의 장거리 유도탄 개발이 현안으로 떠올랐을 때 우리 국회에서 논란이 됐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에서 규제한 사거리보다 훨씬 불리한 제한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MTCR는 유도탄 기술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미국주도하에 만든 규약으로 G7 국가를 비롯한 회원국은 사거리 300km, 탄두중량 500kg을 초과하는 유도탄 기술을 제3국에 일절 제공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유도탄 사거리가 180km로 제한돼 있는 실정이다.

시험평가업무를 맡고

유도탄사업이 본격 시작되면서 필자는 유도탄의 지상 및 비행시험을 위한 기법개발과 시험장 건설업무를 맡게 됐는데, 시험평가부를 지상연소시험실, 비행시험실 및 계측장비실로 편성하고 국내외에서 연구원들을 유치했다. 미국의 김동원 박사(현 양재시스템 상임고문), KIST의 정기원 박사(현 숭실대학교 교수)와 강정수 박사 등이 이때 시험평가부에 합류했다.

지상연소시험이란 유도탄 비행시험(발사시험)을 하기 전에 지상에서 추진기관을 연소시켜 성능과 신뢰도 등이 설계한 값과 오차가 없는지 확인하는 시험이다. 마치 항공기를 개발할 때 탑재할 엔진을 지상에서 충분히 시험한 후 비행시험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추진기관을 비롯해 다른 부품들의 성능과 신뢰도가 확인되면 마지막으로 비행시험을 하게 된다.

유도탄은 항공기와는 달리 일단 발사하면 회수해서 다시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한 번 시험에 수십억원의 돈이 공중으로 사라진다. 따라서 유도탄 비행시험에는 레이더, 광학추적장치, 내부 원격측정장치 등 수많은 계측장비들을 총동원해 비행중인 유도탄 내부와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행기록을 분석해야 한다.

지난번 미국출장을 통해 시험장비를 파악했지만 막상 극비리에 시험장을 설계하고 건물 사양과 계측장비 배치도를 만들려니 시간도 쫓기는 데다 전문가도 없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상연소시험장은 대덕 유도탄연구소에 건설하기로 결정됐지만, 비행시험장은 시험장 건설 외에도 최소한 사거리 200km, 폭 30km 이상의 방대한 안전지역을 확보해야 하는 문제까지 있어 공역(空域) 및 해역(海域) 사용을 위해서 정부부처들과 합의를 거쳐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1978년까지 유도탄 개발을 마치려면 지상연소시험장은 늦어도 1975년까지, 비행시험장은 1977년까지 완성돼야 했다. 그런데 건설에 필요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으니 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또 한 차례 하늘의 도움이 있었다. 심소장이 1973년 미국출장중 미 국방차관을 만나 한미 국방과학기술협력의 일환으로 제안한 ‘과학기술자교류(SEEP)’가 합의돼 1974년 1월 내가 SEEP 1호로 6개월간 미 육군유도탄 연구소로 시험평가 연수를 떠나게 된 것이다.

1년 반 만에 다시 헌츠빌의 육군 유도탄연구소를 찾은 나는 소장 이하 간부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미국측에서는 내가 최소한 1년은 체재해야 한다고 했지만 시급한 일정 때문에 6개월로 결정됐다. 6개월 연수기간을 지상연소시험장과 비행시험장 각 2개월, 환경시험장과 자료처리실 각 1개월로 나눠 정했다. 유도탄 비행시험은 뉴멕시코주의 화이트샌드(White Sand) 시험장에서 하기 때문에 그 곳을 방문하는 일정도 15일 포함됐다.

나는 II급 이상의 비밀이 아닌 모든 시험에 참여할 수 있었고 시험보고서도 볼 수가 있었다. 연수기간에 시험기법과 자료처리 프로그램, 시험절차 및 시험장 관리규정 등을 입수했는데, 그 중 가장 큰 소득은 각 시험장의 주요 건물도면을 얻은 것이었다.

또 이번 연수를 통해서 시험장에는 폭발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위험구역과 안전구역을 분리하는 것이 기본철칙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1974년 7월 유도탄 시험평가에 필요한 연수를 마친 후 귀국길에 오른 나는 시험장 건설에 한결 자신을 갖게 됐다.

박 대통령의 불시 방문

1974년 9월부터 대덕 유도탄연구소 건설공사는 착수됐지만 추진제 제조 및 각종 시험에 필요한 전용장비의 구입이 큰 문제였다. 미국에서 구입할 수밖에 없는 장비들이 많았는데 한국의 유도탄 개발에 대한 미국정부의 거부감이 너무 완강해 미국에서 도입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도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것은 추진제 제조의 핵심장비인 연료와 산화제를 고르게 섞는 대형 혼합기(Mixer)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300갤런 용량의 혼합기였는데 당시 프랑스, 영국 등 유럽에서도 50갤런 이상의 혼합기는 미국에서 구입해 사용하고 있었다.

혼합기 확보문제로 난감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이경서 박사가 한 재미동포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미 공군에 추진기관을 납품하는 록히드 추진제회사(LPC)가 불황 때문에 공장을 폐쇄하면서 시설 일체를 처분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즉시 LPC사와 접촉한 결과 260만 달러에 계약이 이뤄졌다.

주요 장비는 300갤런 혼합기 2대를 비롯한 추진제 제조 및 지상연소시험장비 일체와 대형추진기관의 비파괴시험을 위한 2000만 eV(전자볼트)의 X선을 만들 수 있는 베타트론(Betatron) 등이었다. 그 외에 추진제와 관련된 기술서적과 각종 군사규격서 등 귀중한 기술자료들이 포함돼 있었다. 말 그대로 ‘완전 떨이’였다. 만일 이것들을 새로 구입했다면 수천만 달러가 들었을 것이다.

시험장비 일체를 쉽게 확보하게 돼 미 육군 유도탄연구소에서 입수한 건물 도면과 시험장비 구성도를 바탕으로 지상연소시험장 설계도를 완성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지상연소시험은 유도탄 추진기관의 성능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전을 가장 먼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형추진기관은 추진제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만일 폭발한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 따라서 추진기관을 연소시키는 시험대와 연소시험을 통제하고 시험자료를 계측하는 통제소 건물은 충분한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한편 정전기(靜電氣) 대책도 세워야 한다.

미 육군유도탄 연구소의 경우 시험대와 통제소간 거리가 300m가 넘는 데도 시험대에 면한 통제소 벽은 30cm 이상의 철근 콘크리트로 돼 있다.
당시 우리 건설업체들은 아파트나 일반 사무실 외에는 지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지상연소시험대와 통제소 건물의 특수성을 아무리 설명해도 잘 납득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국과연 설계팀을 미 육군 유도탄연구소로 견학시키기도 했다.

1976년 9월, 통제소와 시험대가 완공되고 LPC에서 도입한 장비를 설치해 마침내 지상연소시험장의 준공을 보게 됐다.

시험장 준공 후 프랑스에서 습득한 추진제 기술을 활용해 시험용 추진기관(MIMOSA)을 시제, 지상연소시험을 실시했다. 모든 장비가 차질없이 작동됐다. 컴퓨터로 통제되고 시험 후 그 결과를 즉시 알 수 있는 첨단시설을 갖춘 이 시험장은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수준이었다.

지상연소시험장 건설이 한창일 때 박 대통령의 불시 방문을 받았다. 당시 나는 지상연소시험장의 조기 완공을 위해 추진기관팀과 함께 대전에 미리 내려가 있었다. 박 대통령은 대전에서 열린 새마을지도자 대회에 참석한 후 경호원 1명을 데리고 불시에 건설 현장을 방문한 것이다.

소장과 부소장이 모두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선임자인 내가 부득불 대통령을 안내하게 됐다. 박 대통령이 추진제 공장을 비롯해 본관 및 지상연소시험장 등을 다 돌아보자 마침 점심시간이 됐다.
그런데 참으로 난감한 일이 일어났다. 건설 현장을 둘러본 박 대통령이 이곳 식당에서 식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곳에는 건설요원을 위해 임시로 마련한 식당(일본말로 ‘함바’)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전기계창은 보안상 민가와 격리된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일반 식당도 10km나 떨어져 있었다.

할 수 없이 칸을 막아 급조한 간부식당으로 대통령을 모셨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박 대통령을 알아본 건설요원들과 식당 아주머니들은 놀라서 얼어붙다시피 했는데, 박 대통령이 식당 아주머니에게 “밥 한그릇 부탁합니다. 그냥 있는 대로 가져오세요”라고 하자 그제서야 식사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통령은 콩나물국, 된장찌개, 나물과 김치뿐인 반찬에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숭늉까지 한 대접 다 드셨다. 나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해서 식탁에 앉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 지금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인상이 근엄하고 과묵해서 대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과학자들에게는 늘 자상하고 농담까지 하는 분이었다.

유도탄 비행시험장 건설

한편 유도탄 비행시험장은 1974년 12월 태안반도에 있는 안흥지역으로 확정됐다. 안흥과 이에 면한 해상이 비행시험장으로 결정된 이유는 유도탄 발사시험에 필요한 180×29km의 광활한 안전구역을 내륙에서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사격구역을 영해로 한정할 수 있어 국제법상 문제를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보안문제도 아울러 해결할 수 있으며, 비행시험시 탄착지점 확인과 각종 비행자료를 수신하기 위한 마이크로웨이브 중계시설을 해군기지 안에 설치할 수 있어 시설보안을 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4년 9월 지도상에서 안흥지역을 시험장 후보지로 결정한 후 현지답사를 위해 지프로 서울을 출발했다. 보안상 운전기사를 대동할 수도 없었다. 당시는 국도도 대부분 포장이 되지 않았을 때여서 오전 9시에 서울을 출발해 오후 3시가 지나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후보지는 송림이 우거진 언덕이었다. 길이라고는 좁은 길 하나뿐. 어둡기 전에 서울로 출발하려고 약 한 시간을 답사하면서 5만분의 1 군용지도에 주요 지점을 표시하는 한편 이 지점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없이 뛰어 다녔다.

그런데 그 곳 주민이 나를 간첩으로 오인해 신고하는 바람에 무장 경찰과 예비군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손들어!” 하는 소리에 나는 그만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당시 해군 중령이었던 나는 신분증과 주민등록증을 제시해 겨우 사태를 수습했다. 나중에야 그 지역이 남파간첩이 빈번하게 출몰하는 취약지역임을 알게 됐다.

답사 결과 예상대로 비행시험 최적지로 결론이 나왔지만 안흥지역은 말 그대로 오지 중에 오지였다. 당시는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어서 시골도 대부분 주택이 개량되고 전기와 전화가 가설됐는데, 이 곳은 전기 전화는커녕 집들도 옛날 초가 그대로였다. 비행시험장 건설을 위해서는 홍성에서 안흥까지 도로 개설 및 포장을 해야 했고 전기 전화, 생활용수 확보 등이 큰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비행시험장 건설 후 이 곳에 근무할 직원 200여명과 가족을 문화, 교육, 병원 등 편의시설이 전무한 벽지에 정착시키는 것이 더욱 걱정스러웠다.

청와대에서 지시한 대로 1978년까지 유도탄 공개시험을 차질없이 성공시키려면 시험장 건설과 장비 설치를 1977년까지는 완료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완벽한 비행시험통제와 자료수집을 위한 소프트웨어 개발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를 위해서 미 육군 유도탄연구소 시험평가부에서 소개해준 미국 회사와 소프트웨어 개발을 계약하고 연구원 2명(정기원·제환영 박사)을 1년 6개월간 이 작업에 참여토록 했다.

통제소 건물(Mission Control Center, MCC)에 대한 사양은 미 육군 유도탄연구소, 화이트샌드 시험장, 남태평양상에 있는 미 육군의 콰잘레인(Kwajalein) 유도탄시험장과 일본 타네카시마(種子島) 인공위성 발사장을 방문해서 그 곳의 자료를 토대로 작성했다.

내가 방문했던 외국의 여러 시험장 중에서 미 육군의 콰잘레인 시험장을 잊을 수가 없다. 그 곳을 방문했을 때 마침 미뉴트맨(Minuteman) 대륙간 탄도탄 시험을 참관할 수 있었다. 이 시험장은 남태평양 솔로몬군도에 있는 작은 산호도로 60년대 소련의 대륙간 탄도탄을 요격하기 위해 미국이 개발한 스파르탄(Spartan) 및 스프린트(Sprint) 유도탄을 시험하던 곳인데 미국 서해안에서 발사한 대륙간 탄도탄을 표적으로 시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소련과 ABM 조약이 체결되면서 요격시험은 중단됐다.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미뉴트맨 II의 MIRV 다탄두에 대한 정확도 시험을 하고 있었다. 미뉴트맨 탄도탄은 캘리포니아 공군기지에서 이 곳 산호초 호수를 겨냥해 발사하는데, 거리는 6400km에 불과하지만 비행시간은 최대 사거리의 비행시간과 같은 30분이 되도록 탄도를 조정해 놓고 있었다.

안내장교는 “우리는 항상 소련과 공동시험을 하고 있다”고 말해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시험 때면 빠짐없이 원양어선으로 위장한 소련 첩보선이 영해 밖에 포진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은 3척이 몰려왔다”며 레이더 스크린을 가리켜 보였다.

1977년 9월, 마침내 안흥 비행시험장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공됐다. 유도탄 개발을 위해서 경험도 전혀 없는 사람들이 황무지에 모여 3년 동안 유도탄 비행시험장을 건설한다는, 처음에는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꿈이 현실로 된 것이다.

시험장 건설 과정에 가장 큰 어려움은, 영화관 스크린 같은 대형 전시판에 유도탄의 비행상태를 영상이나 비행탄도를 실시간으로 비춰주는 천연색 프로젝터를 구입하는 일이었다. 이 프로젝터는 미군의 전략사령부(SAC)나 북미방공사령부(NORAD)에서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수출허가를 받을 수가 없었지만, 다행히 앨라배마주 출신 모 상원의원을 통해 가까스로 미정부의 수출허가서를 얻었다.

한편 1974년 9월에 착공한 대전기계창 건설작업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관작업으로 진행돼 76년 11월 말 준공됐다. 건설현장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대전기계창은 이미 75년 6월에 500여명의 인원을 확보, 독립적인 유도탄연구 기구로 정식 발족돼 있었다. 76년 12월2일에는 박 대통령 임석하에 대전기계창 준공식이 있었다.

무모한 도전

대전기계창 준공과 더불어 창장으로 이경서 박사가 임명됐고, 유도탄 연구개발이 본격화됐다. 창장 이하 연구원 전원은 휴일도 없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지대지 유도탄(백곰·NHK-1) 개발에 매달렸다. 개발계획 초기에 1979년 말로 세웠던 개발목표 시기는 그 후 주한미군 철수가 구체화됨에 따라 1978년 국군의 날 이전으로 단축하라는 지시가 청와대에서 하달됐다. 이 때문에 국과연은 물론 관련 방산업체들도 목표달성을 위해서 ‘제2의 번개사업’ 때 못지않은 돌관작업을 진행했다.

앞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당시 유도탄 전문가나 연구 및 생산시설이 전무한 상태에서 출발해 천신만고 끝에 미국 정부의 NH 유도탄 개량사업에 대한 양해를 얻어내고, 이에 따른 기술이전 및 추진제 제조장비의 판매승인으로 어느 정도 기반시설은 갖추게 됐다고 하지만, 2년 내에 유도탄을 개발해서 공개시사회를 갖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NH 유도탄 체계는 간단히 말해서 유도탄과 지상장비로 나눌 수 있고, 유도탄은 추진기관, 비행체, 유도조종장치 및 탄두로 나눌 수 있다.
연구요원들은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우리가 개발한 유도탄 구성체계를 동시에 비행 시험하는 대신 개발구성품을 하나하나 비행 시험하는 4단계 연구개발 전략을 세워 추진했다.

1단계는 유도탄 개발에 핵심이라 할 유도조종장치 개발이었다. 특히 유도장치는 미제 NH 유도탄과는 달리 진공관을 반도체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부담이 더 컸다. 이를 위해 첫 비행시험은 미제 NH 유도탄에 우리가 개발한 국산 유도조종장치를 결합한 유도탄을 시험하기로 했다.

이 시험에서 국산 유도조종장치의 성능이 확인되면 2단계로 추진기관 시험을 하기로 했다. 미제 NH 유도탄에 우리가 개발한 국산 추진기관을 결합해서 비행 시험하는 것이다. 추진기관도 미제와는 달리 1, 2단 추진기관을 전부 비추력(比推力)이 큰 복합추진제로 대체했다. 2단계 시험이 성공하면 3단계로 국산 기체를 시험하기로 했다.

이런 순서로 구성품 시험이 성공하면 최종 단계로 우리가 개발한 유도조종장치, 추진기관, 비행체 등을 조립해서 만든 100% 국산 유도탄을 시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런 개발계획은 후일 5공정부가 들어선 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과 일부 군부의 오해를 불러일으켜 연구요원들이 큰 피해를 보는 요인이 된다.

드디어 첫 비행시험

첫 비행시험은 반도체화한 국산 유도조종장치에 대한 시험으로 1978년 4월29일(토요일) 10시로 계획됐다. 개발요원들은 이미 2주 전부터 대전기계창에서 안흥시험장으로 유도탄을 운반해서 조립, 점검 등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시험 전날 연구소장 주재하에 대전기계창 및 시험평가단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험·안전회의가 열렸는데, 국방부에서도 제3 방위산업국장과 유도탄과장이 참석했다. 처음 하는 시험이라 모두 긴장되고 불안해했다.

시험안전에 대한 책임을 맡은 나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십 차례에 걸쳐 실시한 시험연습을 통해 시험통제 및 계측장비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지만, 불안과 긴장 때문에 전날 밤을 뜬 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유도탄은 서해안과 거의 평행하게 설정한 폭 29km의 바다 위를 비행해서 탄착지점에 낙하하도록 돼 있었고, 만일 유도탄이 시험구역을 벗어날 때는 안전을 위해서 공중폭파하도록 돼 있었다. 발사장과 탄착지에는 소개 구역이 2km 이상 됐지만, 중간 비행구역에는 수많은 어선이 산재할 뿐 아니라 이 광범위한 시험구역을 완전히 소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다면 어떤 위험이 따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불안하고 긴 밤이었다.

유도탄 시험 발사는 정각 10시로 예정돼 있었지만, 유도탄 발사장과 탄착지 해상의 어선이 소개되지 않아 예정보다 1시간 57분이 지난 11시 57분에 발사됐다. 탄착 해역의 어선 소개는 해군함정이 담당했는데, 때마침 조기잡이철이어서 탄착 해역에 어선들이 많았을 뿐 아니라 한 마리라도 더 잡으려는 어선들의 비협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시험통제센터(MCC) 상단 벽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에는 광학추적장치에 부착된 폐쇄회로 TV 카메라를 통해 발사준비가 완료된 유도탄을 천연색으로 비춰주고 있었다. 그 옆 상황판에는 모든 발사절차가 완료됐음을 나타내는 푸른색 불이 전부 켜져 있었고, 가운데 패널에는 초읽기를 나타내는 LED의 빨간 숫자가 명멸하고 있었다.

실내 맨 뒷줄에는 시험을 통제하는 컴퓨터를 비롯해서 각종 계측 및 기록장비가 늘어서 있고, 가운데 줄에는 안전통제장비와 비행시험중인 유도탄이 정상기능을 상실할 경우 무선으로 폭파시키는 원격폭파장치, 맨 앞줄에는 유도탄과 시험장비의 이상 유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시험통제판과 언제 어느 곳과도 교신이 가능한 통신장비가 갖춰져 있었다.
시험요원들은 각자 자기 위치에서 평소 훈련 때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MCC 안에는 터질 듯한 긴장감이 넘쳤다.

레이더, 광학추적장치와 유도탄 내부 상태를 보여주는 원격측정센서들도 이상없이 작동하고 있었고, 탄착지역에 나가 있는 해군과의 교신에도 이상이 없었다.
“발사준비완료. 초읽기 시작!, 발사 120초 전!”
마침내 시험책임통제원의 목소리가 옥내외에 설치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시험책임통제는 시험평가부장인 김동원 박사가 맡았다.

MCC 안에는 대형 유리벽을 통해 참관인들이 시험진행 상황을 볼 수 있도록 약 30평 크기의 관람실이 마련돼 있었는데, 소장 이하 국과연 간부들과 국방부, 합참에서 온 참관인들도 초읽기에 들어가자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서

흥분과 긴장, 불안과 초조감이 범벅된 그 2분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 10초, 9초 … 1초, 발사!”
시험책임통제원의 힘찬 목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MCC에서 1km 이상 떨어진 발사대에서 하늘을 치받을 듯 똑바로 서 있던 유도탄은 수십m나 되는 불기둥을 뿜으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현재 시간을 나타내는 대형스크린은 정확히 11시57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어서 건물을 뒤흔드는 우레 같은 굉음이 뒤따랐다.

MCC의 대형 스크린에는 유도탄이 비행하는 모습을 계속 비춰주고 있었다. 대형 TV 카메라가 광학추적장치에 연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안 돼 1단 추진기관이 예정대로 분리되고, 2단 추진기관이 성공리에 점화됐다. 그 순간 개발 및 시험요원과 참관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올렸다.

유도탄은 계속 화염을 내뿜으며 속도를 더하고 있었다. 음속을 돌파한 지 수십 초가 지났다. 유도탄이 멀어짐에 따라 대형 스크린에는 화면 대신 레이더의 추적자료가 그래프상에 입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유도탄의 비행 고도, 거리 및 속도 등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유도탄은 모의시험 때처럼 예상 탄도를 그대로 그리며 비행하고 있었다.

첫 시험에서 유도탄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비행탄도를 따라서 날자 관계요원들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숨을 죽인 채 스크린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뜻밖의 광경이 스크린상에 나타났다. 유도탄 개발이 그렇게 만만하게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비행거리가 100km를 지나는 순간 유도탄이 스크린에서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청천벽력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혹시 레이더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원격장치 등 모든 장비들을 점검했으나 어떠한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고, 유도탄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유도탄은 100km 떨어진 해상에 추락했음이 분명했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첫 유도탄시험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보고서도 읽었고, 또 미군 유도탄연구소 방문중 시험관들로부터 실패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므로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들었지만, 막상 첫 시험에서 낭패를 당하자 우리로서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 또 실패…

다음 시험은 5월6일(토)로 정해졌다. 기상 등의 이유로 발사가 어려울 때는 다음날인 일요일에 실시하기로 한미 공군측과 합의했다. 그 전까지는 실패 원인을 찾아내야 했다. 그러나 창장 이하 개발요원들이 각종 시험자료를 놓고 며칠 밤을 새워가며 분석했지만 유도탄의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 어디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2호기의 발사준비 점검은 1호기에 비해 이중 삼중 더욱 철저하게 하였다. 시험장에 도착한 유도탄의 구성품과 체계점검에도 최선을 다했다. 또 실패하면 9월로 예정된 공개행사에 큰 지장이 생길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5월6일, 날이 밝았다. 날씨도 청명했고 해상 통제도 잘 돼 모든 시험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오늘은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두 번째 시험이라 지난 번에 비해 한결 마음에 여유도 생기는 것 같았다. 지난번처럼 국방부와 합참 관계관들도 모두 참석했다.

10시 정각, 2호기는 모든 사람의 기대를 안고 하늘로 힘차게 솟아올랐다. 스크린에는 1단 추진기관이 분리되고 2단 추진기관이 성공리에 점화되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고, 유도탄은 1호기와 같이 계획된 탄도를 따라 비행하고 있었다. 꼭 성공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1호기 때의 악몽이 되살아나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찰나 이게 또 웬일인가! 정상탄도를 따라 비행하던 유도탄이 또다시 스크린에서 사라진 것이다. 비행거리가 정확히 18km 되는 지점이었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MCC의 계측실로 한달음에 달려가 비행 데이터를 점검했지만 모두 18km 지점에서 단절돼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두 번이나 서울에서 이 곳까지 시험을 참관하러 온 국방부 및 합참 관계관들의 실망도 적지 않았지만, 이 사업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심소장 얼굴은 말 그대로 흙빛이 됐다.

매번 시험결과를 노재현 국방부장관과 청와대 오원철 수석에게 보고했는데, 두 번 연속 실패했으니 처음 개발하는 유도탄사업이라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인정은 하면서도 대통령이 유도탄에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윤여길 박사가 “독일도 2차 세계대전 중 V-2 유도탄을 개발할 때 수십 차례 실패한 예가 있으니 우리도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자”고 격려했지만 분위기는 납덩이처럼 가라앉았다.

사업책임자인 이경서 박사는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는 듯 허탈해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다음 시험이 예정된 6월 초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원인을 규명할 수 있도록 분야마다 처리해야 할 업무를 분담시켰다.

이경서 창장을 비롯하여 강인구, 홍재학, 최호현, 김정덕 박사 등 유도탄사업 간부들은 침식을 잊은 채 원인규명을 위한 사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그 원인을 찾아냈다. 예상대로 하드웨어가 아닌 유도조종 소프트웨어에 문제가 있었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유도탄이 이상적으로 설정한 탄도를 따라 비행하도록 지시하는 지상의 유도조종명령 때문에 속도를 잃게 돼 목표지점까지 가지 못한 것이었다. 이는 원격측정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됐다.

이에 따라 소프트웨어를 수정한 후 수차례 모의시험을 해본 결과 좋은 결과를 얻게 돼 제3차 비행시험은 6월3일(토)로 결정됐다. 제3차 시험이 성공하면 1, 2차 시험 실패로 2개월이나 차질을 빚은 개발계획을 만회하기 위해 바로 그 다음날 국산 유도조종장치와 국산 기체시험을 묶어 연속시험을 하기로 했다.

천당과 지옥 사이

제3차 시험일인 6월3일, 날씨는 쾌청했다. 개발요원들은 하나같이 초조한 마음으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소장 이하 모든 간부들은 이번 시험마저 실패한다면 9월로 잡혀 있는 공개시험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만 지연된 스케줄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발사준비와 어선 소개가 순조롭게 이뤄져 유도탄은 10시 정각에 힘차게 창공을 향해 솟아 올랐다.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 1단 추진기관이 분리되고 2단 추진기관도 이상없이 점화됐다.

유도조종 소프트웨어의 변경으로 비행탄도는 종전 시험 때와는 달랐으나 비행중인 유도탄은 마(魔)의 18km와 100km 지점을 무사히 지나 탄착지를 향해서 날아가고 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는 적막 속에서 시험책임통제원이 주기적으로 마이크를 통해 “사거리 OOOkm, 고도 OOkm” 말하는 소리만 유일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한결같이 “제발 이번만은 꼭” 하고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유도탄은 마침내 표적 상공에 이르러 표적을 향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표적에 정확히 명중했다! 탄착지 관측요원으로부터 탄착 보고가 들어왔다.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기어코 해낸 것이다!

소장 이하 모든 연구원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함성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유도장치 개발실장이었던 김정덕 박사와 실원들이 격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큰 소리로 울던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에 선명하다. 당시 우리가 흘린 눈물은 감격과 환희의 눈물만은 아니었다.

1971년 박 대통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유도탄 개발지시를 받고, 오늘의 결과를 얻기 위해 6년여 동안 밤잠 한번 편히 자지 못하고 계속돼온 긴장감이 일시에 풀리면서 엄습해오는 허탈감의 눈물이기도 했다.

성공의 기쁨도 잠시, 곧바로 다음날의 시험준비에 들어갔다. 시험자료처리 요원들은 밤을 새워 시험자료를 분석했다. 다음날 실시한 제4차 비행시험도 성공이었다. 이로써 소장 이하 모든 ‘백곰’ 개발요원들은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자신감을 갖게 됐다.

백곰시험 성공을 보고받은 박 대통령은 국방부를 통해 유도탄 공개 시사를 위한 행사준비를 국과연에 지시했다. 확정된 행사계획은 추후 시달할 것이나 시기는 9월 중으로, 공개시사는 백곰 유도탄 외에 당시 대전기계창에서 개발중이던 한국형 대전차 로켓(KLAW), 다연장 로켓(九龍) 및 중거리 로켓(黃龍)도 포함하라는 내용이었다. 백곰과 KLAW는 9월 공개 행사에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지만 1977년 7월부터 개발에 착수한 다연장 로켓와 중거리 로켓는 그 때까지 준비가 될지 걱정이었다. 이 지시로 국과연은 더욱 바빠졌다.

제5차 비행시험은 최종적으로 자체 개발한 추진기관을 시험하기로 하고 날짜를 7월22일로 정했다. 추진기관에 대한 시험이 끝나면 기체, 유도조종장치 및 추진기관 등 모두 국산 구성품으로 조립한 유도탄 시험이 8월에 계획돼 있었다. 공개행사 날짜가 이미 9월로 정해졌기 때문에 앞으로의 시험은 절대 실패를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할까, 생각지도 않은 레이더(MTR) 운영요원의 추적 실패로 5차 비행시험은 실패하고 말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2개월도 남지 않은 공개행사를 생각하면서 요원들 모두는 몸서리를 쳤다. 이젠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제5차 시험은 실패했으나 8월26일 계획대로 완전 국산 유도탄의 제6차 비행시험을 강행하기로 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행히 제6차 비행시험을 성공리에 마쳐 요원들은 공개행사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며 안도했다.

그러나 공개행사를 앞두고 최종적으로 9월6일 실시한 제7차 시험에서 뜻하지 않은 2단 추진기관의 점화실패로 유도탄은 발사장에서 10km 전방 해상에 추락하고 말았다. 해군의 도움으로 수중에 있는 유도탄을 인양해서 조사한 결과, 2단 점화장치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명됐다. 추진기관팀이 밤을 새워가며 이를 수정, 9월16일 또 한 차례 비행시험을 실시했다.

이날 시험은 9월26일에 열릴 공개행사 예행연습을 겸해서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이 임석한 가운데 열렸다. 행사계획 순서에 따라 KLAW 6발, 구룡 28발, 황룡 1발 및 백곰 순으로 시험이 진행됐다. 다행히 모든 시험이 성공리에 끝났다.

시험 결과에 만족한 국방장관은 시험장을 떠나기 앞서 치하와 함께 몇 가지 지시사항을 하달한 후 25일(월) 최종 점검을 실시하겠다고 했다. 심소장도 이번 공개 시험발사는 국가적 행사로 국과연의 운명이 달린 일이니 각자 최선을 다해 좋은 결실을 맺자고 당부했다. 그러나 지난 4월1일부터 9월16일 사이에 치러진 8차례의 백곰 비행시험에서 불과 50%인 4회의 성공률을 가지고 대통령을 비롯한 국내외 귀빈 및 언론인 다수가 참석하는 공개행사를 치를 수 있을지 한편으론 불안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담배 은박지로 푼 마지막 시련

9월에 들어와 공개시험행사에 대한 세부내용이 국과연에 시달됐다. 행사 일자는 기상 이변이 없는 한 9월26일(화)로 정해졌다. 박 대통령을 비롯해 국방장관, 합참의장 및 3군 총장 등 국방 수뇌 외에도 행정부, 입법부 및 관련 방위산업체, 외부인사로는 주한미군사령관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방송사와 중앙 일간지 기자들도 참석하게 됐다.

이것은 단순한 국산 유도탄에 대한 시사회 차원의 행사가 아니었다.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북한에 대해 한국의 방위산업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전쟁도발을 억지하려는 박 대통령의 고도로 계산된 의도가 숨어 있는 행사였다. 국가보안목표 ‘가’급으로 지정돼 국방장관의 허가 없이는 어떤 외부 인사도 출입할 수 없는 안흥 시험장을 행사 당일 언론에까지 공개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런 의도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시험품목이 늘어남에 따라 관람석도 MCC 내부의 관람실에서 옥상으로 옮기기로 하고, 긴급히 관람대를 설치했다. 관람대에서 모든 시험을 다 볼 수 있도록 KLAW, 구룡, 황룡 및 백곰 순으로 시험장 위치를 정했다. KLAW 시험은 관람석에서 200m 떨어진 곳에서 시험하게 됐는데, 탄의 명중도뿐만 아니라 관통력도 볼 수 있도록 장갑판으로 표적을 만들었다.

옥상에 관람대를 설치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 MCC로부터 1.2km 떨어진 기존 백곰 발사장을 2.5km 떨어진 곳으로 옮겨야 했다. 발사장을 옮기는 것은 발사대 뿐 아니라 각종 케이블도 함께 옮겨야 하기 때문에 매우 큰 공사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하마터면 행사 당일날 백곰시험을 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뻔했다.

백곰 발사장의 이동공사가 9월22일(금) 끝나 백곰개발팀은 23일부터 새 발사장에서 시험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추적 레이더가 발사대에 서 있는 유도탄을 잡지(Lock-on) 못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백곰은 레이더로 유도되는 유도탄이기 때문에 레이더가 유도탄을 잡지 못한다는 것은 곧 유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추적 레이더와 유도탄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원래의 발사장에서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으며, 달라진 것이라면 발사장을 추적 레이더로부터 종전보다 2배 거리에 떼어놓은 것뿐이었다. 레이더의 반사파 때문으로 생각하고 레이더와 발사대 사이의 언덕을 깎고 또 반사파의 강도를 줄이기 위해 풀을 태워 재를 만들어 땅을 덮어 보기도 했지만 별무 효과였다.

이런 가운데 시간은 계속 흘러 공개행사 하루 전인 25일 아침에 노재현 국방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이 최종점검차 안흥시험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연구원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봤지만 소득이 없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버렸다.

심소장은 국방장관에게 행사준비 현황과 문제점을 보고했다. 당시 필자도 이경서 박사와 함께 그 자리에 배석했는데 소장의 보고가 너무나 비장해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이번 행사는 장관이 주최자로서 대통령 이하 귀빈들을 초청하는 것으로 돼 있었기 때문에 장관의 난감한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못 피우는 담배에 불을 붙였을까. 참으로 절망적이고 암담하였다. 장관은 행사를 취소하면 취소했지 백곰이 빠진 공개시험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한 후, 금일 중으로 문제가 해결되면 즉시 보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안흥을 떠났다.

마지막 해결방법은 백곰 발사대를 예전의 발사장으로 다시 옮기는 것이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또 1972년 4월3일 제1차 국산병기 공개시사회 때 일어난 대전차 지뢰 사고도 있어서 옥외에서 시험을 관람하는 한 안전관계상 옮길 수도 없었다. 실로 진퇴유곡이 아닐 수 없었다. 참담한 소장의 얼굴을 이경서 박사와 나는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백곰사업 책임을 맡고 있는 이박사의 표정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소장은 곧 간부회의를 소집했지만, 분위기는 너무나 침통했다.

심소장은 “역사적인 유도탄 개발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예기치 못한 문제로 우리가 흘린 피와 땀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빠지게 됐다. 만에 하나라도 내일 행사에 차질을 빚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있겠는가! 모두 최후의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말고 이 어려움을 극복하되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우리 모두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것”이라며 비장한 각오를 토로했다.

문제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유도조종부를 책임지고 있던 최호현 박사의 얼굴은 너무나 처참했다. 소장 이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최박사는 계속되는 밤샘작업으로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도 불구하고 책임감으로 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최박사는 마침내 미군의 NH 유도탄 교범 속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새로 옮긴 발사장에는 레이더의 주전파 외에 지면과 해수면을 통해 들어오는 레이더 반사파 때문에 레이더파의 강도가 대폭 증가하는 소위 rf-플레밍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며, 이 전자파의 강도를 줄이려면 유도탄 수신 안테나에 감쇠마개(attenuator cap)를 씌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 감쇠마개를 구할 수 없어 급한 대로 담뱃갑 안의 은박지를 뜯어내 수신 안테나를 감싼 결과 비로소 추적 레이더가 유도탄을 붙잡게 됐다. 최박사는 훗날 “알고 보면 이렇게 쉬운 것을 몰라 그간 죽을 고생한 것을 생각하니 새삼 콜럼부스의 달걀이 생각나더라”고 말했다. 이 결과는 곧바로 장관에게 보고됐고, 운명의 26일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날아가는 유도탄을 차마 보지 못하고…


▲1978년 9월 26일 Free로켓 시험발사 광경. ⓒ 국방과학연구소 화보집

드디어 26일 아침. 극도의 긴장과 초조감으로 지샌 밤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드높기만 한 전형적인 가을날씨였다. 서산 측후소로부터 오늘 이 곳 날씨는 “오전에는 맑다가 오후에는 구름 다소”라는 연락을 받았다.

행사는 정각 13시, 대통령의 도착과 더불어 시작하도록 예정돼 있었다. 박 대통령을 비롯하여 3부 요인과 이민우 국회부의장, 정래혁 국방분과위원장, 노재현 국방장관, 최각규 상공장관, 최형섭 과학기술처장관, 김종환 합참의장, 3군 참모총장, 벳시 주한미군사령관 및 국내 보도진 등 100여명이 이날 안흥시험장을 방문했다. 그 외에도 국과연의 주요 연구원 및 경비를 위한 32사단 장병들로 안흥시험장은 갑자기 북적거렸다.

대통령이 도착한 후 곧바로 소장의 인사말, 이경서 박사의 시험계획에 대한 보고, 그리고 시험장 현황과 경계에 대한 필자의 보고가 이어졌다. 시험장 위치를 쉽게 알 수 있도록 대통령 전면에 놓인 대형 괘도에는 그 날 실시하는 시험품목과 각 시험장 위치를 나타내는 요도를 전시했다.

원래 계획에는 KLAW, 구룡, 황룡의 시험을 마친 후 마지막으로 백곰을 시험하도록 돼 있었지만, 혹시 또 레이더에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라고 생각해 백곰부터 발사하기로 했다. 관람석에는 참관인들을 위해 TV 모니터 3대를 설치해 유도탄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계속 비행탄도를 볼 수 있도록 준비했다.

모든 보고를 마친 후 시험책임통제원 김동원 박사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힘차게 흘러나왔다.
“시험준비 끝. 초읽기 시작. 발사 120초 전!”
스피커에서는 카운트다운이 계속됐다.
“…10초, 9초, 8초 … 1초, 발사!”
백곰은 불기둥을 뿜으며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14시13분34초.

 
▲1978년 9월26일 태안반도의 안흥시험장에서 열린 국산 지대지 미사일 ‘백곰’의 성공적인 발사시험을 참관한 박 대통령. ⓒ 국가기록원

이경서 박사와 나는 대통령 보고를 마치고 단하에서 경호원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이박사는 얼마나 긴장되고 초조했던지 유도탄을 차마 바라보지도 못한 채 줄곧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고, 내 손을 잡은 이박사의 손은 땀으로 흥건했다. 발사된 유도탄은 1단 추진기관이 성공리에 분리되고 2단 추진기관이 점화되면서 더욱 가속하다가 얼마 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관람석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비행탄도가 3차원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장내 스피커에는 시험통제원이 비행시간, 고도 및 비행거리 등을 알리는 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사이 사이에 유도탄사업 통제단장인 강인구 박사의 간단한 설명도 곁들여졌다.
박 대통령도 쌍안경에서 눈을 뗀 후 소장의 설명을 들어가며 모니터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유도탄이 OOOkm 떨어진 목표 상공에 도달해 표적을 향해 수직낙하 중이라는 방송이 나오고, 곧이어 유도탄이 표적지 해면에 낙하하면서 일으킨 물기둥이 탄착지의 중계 카메라에 찍혀 모니터에 나타났다. 시험책임통제원의 “탄착!” 목소리과 함께 대통령 이하 단상의 모든 참관인은 박수를 쳤고, 일반 참관인들은 환성을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몇 년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오로지 오늘의 성공만을 기원하던 연구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마침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졸였던 백곰 공개시험이 성공한 것이다. 1978년 9월26일, 이 날은 우리나라가 ‘유도탄 시대’를 연 역사적인 날이었다.

박 대통령의 일기

이어서 행사 순서에 따라 관람대에서 200m 떨어진 계곡에서 KLAW 활성탄 6발이 장갑판 표적을 향해 발사됐는데, 명중할 때마다 귀를 찢는 폭음이 울려 퍼지면서 표적에 큰 구멍이 뚫렸다.

다음, 500m 떨어진 언덕에 설치된 다연장로켓 발사대 2대에서는 처음에는 로켓 1발씩이 표적을 향해 발사된 후 이어서 로켓탄 56발이 0.5초 간격으로 10km 떨어진 무인도를 향해 발사됐다. 당시의 다연장로켓 발사대는 지금과는 달리 28연장이었다.

발사대 주위는 추진제 매연이 가득했고 탄착지는 울리는 폭음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중거리 로켓 4발이 관람석에서 1.2km 떨어진 발사대 4개에서 해상 표적을 향해 발사되면서 이 날 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시험이 끝나자 박 대통령은 감격스러운 듯 시험장을 다시 한 번 둘러보면서 심소장과 힘찬 악수를 교환했다.
행사계획에 따라 나는 박 대통령을 MCC로 안내했다. 대형 스크린에는 오늘 시험한 백곰의 탄도가 게시돼 있었다. 시험통제장비와 시험데이터 처리장비, 각종 시험 안전장비와 시험장 내부는 물론 육·해·공군과 교신에 쓸 통신장비 등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이중 몇 가지 장비는 시험평가단이 자체 개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처음 보는 각종 장비들이 신기했는지 이것 저것 질문을 한 뒤에도 MCC를 떠날 줄을 몰랐다.


▲우리나라의 ‘유도탄 시대’를 연 1978년 9월26일, 박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진의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했다.

이어서 박 대통령은 이경서 박사의 안내로 MCC 건물 앞에 분해해서 전시한 백곰, 구룡, 황룡 및 KLAW의 구성품들을 돌아보며 국산 유도조종장치, 1·2단 추진기관, 기체 및 탄두 등을 하나하나 둘러봤다. 박 대통령은 도열한 연구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사명감에 불타는 우리 젊은 과학 기술자들의 노력으로 오늘의 성과를 거두었음을 치하한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회고록에는 박 대통령이 이 날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다고 나와 있다.

“금일 오후 충남 서산군 안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도탄 시험발사가 있었다. 1974년 5월에 유도무기개발에 관한 방침이 수립된 지 불과 4년 동안에 로켓, 유도탄 등 무기 개발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여 금일 역사적인 시험발사가 있었다. ①대전차 로켓 ②다연장 로켓 ③중거리 로켓 ④장거리 유도탄. 네 종목이 다 성공적이었다. 그동안 우리 과학자들과 기술진의 노고를 높이 치하한다” <계속>

출처 : [신동아]1999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