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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직후 굶주리던 아이들에게 미군 전투식량 ‘C-레이션’은 황홀하도록 경이로운 보물상자였다.
깡통 고기와 과일, 커피와 주스 가루, 껌, 비스킷, 초콜릿에 담배까지 한없이 쏟아냈다.
“1주일에 한 번쯤 학교 선생님이 ‘빈 도시락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 도시락에 C-레이션 음식을 나눠줬다. 칠면조, 쇠고기, 콩, 스파게티…. 별의별 음식을 다 먹어봤다. 쓴 커피를 서로 먹으려고 다퉜다.
” 어느 해방둥이 정치인의 회고다.
▶베트남전에 나간 한국군에게 C-레이션은 악몽이었다.
푹푹 찌는 정글에서 허구한 날 밍밍하고 느끼한 C-레이션을 먹다보니 진이 빠졌다.
파월 첫해가 다 가던 1965년 말, 월남 쌀 ‘안남미’와 된장이 보급돼 그나마 입맛을 달래게 됐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이 “우리는 쌀밥에 된장국을 먹어야 전투를 할 수 있다”
며 웨스트 모얼랜드 미군 사령관을 설득했다고 한다.
▶병사들은 경기관총 LMG의 탄약통에 쌀을 안치고 나뭇가지나 C-레이션 종이상자를 때 밥을 지었다.
비 오는 날이면 가설형 지뢰 ‘크레모아’(클레이모어)에서 흰떡처럼 생긴 폭약을 떼내 땔감으로 썼다.
탄통 뚜껑을 밀착시키는 고무 ‘바킹’(패킹)을 떼지 않은 채 밥을 하다 탄통이 터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느글거리는 속을 시원히 가라앉힐 김치는 구경할 수 없었다.
▶베트남전 문서가 공개되면서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존슨 대통령에게 보낸 ‘김치 친서’도 빛을 봤다.
‘김치만이라도 하루바삐 우리 군인들이 먹을 수 있게만 해달라’는 편지가 간절하다.
통조림 생산능력이 없던 그 시절, 정부는 ‘대한식품’에 김치통조림을 만들게 했다.
하와이의 미군 군납식품검사소에 보낸 시제품 깡통에 녹이 슬어 두 차례 퇴짜맞은 끝에 김치가 베트남에 상륙했다.
한국형 C-레이션, ‘K-레이션’의 출발이다.
▶‘김치 레이션’은 1970년 미 상원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모독당했다.
사이밍턴 의원은 미국 정부의 한국군 복무수당 지급을 추궁하며
“한국군에게 썩은 채소를 먹이느라 국고를 낭비하느냐”고 공격했다.
통조림 기술이 시원찮아 시큼하게 익어버리긴 했어도 그 김치 덕에 없던 힘 짜내던 우리 병사들이다.
박 대통령의 ‘김치 친서’는 국가원수로는 너무 절절한 호소여서 짠하기까지 하다.
군사(軍史)편찬연구소 최용호 연구원은 “김치 납품으로 달러를 한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는 뜻도 있었다”고 말한다.
위부터 아래까지 온 나라가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던 시절이었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tjo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