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박정희 정부 초대 경제수석비서관…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

여동활 2015. 12. 20. 09:56

[박정희 정부 초대 경제수석비서관…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上)]

1961년 11월 스물아홉 신동식은 도쿄(東京) 주일 한국대표부에서 열린 교민 행사에 참석했다. 안내를 받고 찾아간 방엔 군복 쫙 빼입은 장성들이 양쪽 쇼파에 앉아 있었다. 끝자리에 앉은 별 세 개가 '당신이 신동식이냐'고 물었다. 그 별은 "우리가 잘사는 나라 만들려고 혁명했는데 같이 가서 애국 좀 하자"고 다그쳤다.

반말지거리에 신동식은 기분이 상했다. "나도 언젠가는 대한민국 조선 산업 일으키겠다는 생각으로 밤잠 안 자고 굶어가며 일했다. 군인들만 애국하는 거 아니다. 내가 하는 거도 애국이다." 소란해지자 상석(上席)의 남자가 '그만'하면서 자리를 권했다. "유럽에서 좋은 공부하고 로이드 선박 검사관 되신, 그 경험 나라 살리는 데 도와주오." 신동식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그렇게 처음 만났다.

2003년 선박 건조량과 수주량, 수주 잔량 1위로 대한민국이 세계 최강의 조선 국가가 됐을 때 신동식은 국립현충원 박정희 묘역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엉뚱한 구상을 믿어주고 끝까지 밀어줘 고맙다고 했다. 여든 셋 나이에도 그의 요즘 관심은 온실가스 감축 발전소 사업이다. "우리조선 업체와 노르웨이의 공동 개발로 막대한 규모의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선박 설계도를 살펴보고 있는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 /김지호 기자

6·25 피란중 조선업에 관심가졌지만
국내 조선소 없어 해외에 편지보내

신동식은 1960년대 초대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과 경제과학특별심의위원회 상임위원(장관급)을 맡아 조선 정유 등 산업화 마스터플랜 입안을 주도했다. 그리고 한국해사기술 회장으로 여든셋 된 지금까지 2000종의 선박을 설계했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고 재활용하는 발전소 건설 사업에 우리 조선 플랜트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했다. 풀밭에서 세운 조선 산업 60년의 회상과 신사업에 대한 그의 마지막 구상을 듣는 데만 6시간 30분이 걸렸다.

―고교 3학년 시절 6·25가 났군요.

"춘천중학(6년제) 다닐 때였어. 6월 25일 아침 빨갱이 무찌르러 간다고 춘천 남학생들이 다 소집됐지. 상고·농고 다 합쳐 1000명쯤 모였을 거야. 목총, 삽 들고 이북 놈들이 온다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지."

―진짜 총이 없었나 봅니다.

"그런 게 어딨어. 당시 학교 군사훈련 때 쓰던 목총 들고 어떤 애들은 빈손으로 따라가고. 그런데 저쪽에서 탱크가 나타나는 거야. 순식간에 수십명 죽었어. 인솔 교사가 도저히 안 되겠던지 모두 도망가라고 했어. 지금 춘천고에 학도병 참전 추모비가 있지."

―피란을 갔겠군요.

"가족들과 부산으로 갔어. 코딱지만 한 움막에서 사는데 춥고 배고프고 영화에 나오는 피란 생활 그런 거 한 거야. 먹을 거 구하러 다니다가 기가 막힌 아르바이트를 구했어."

―무슨 일이었습니까.

"미군 수송선 하역 물자를 세는 일이야. 지프, 탱크 숫자 적는 거지. 미군은 우리를 체커(checker)라고 불렀어. 10시간 일하면 1달러 주고, 점심때 되면 분유, 커피, 설탕, 도넛 주는 거야. 영어로 원부터 텐까지 셀 수 있고, 예스 오케이, 라이트, 레프트만 알면 돼. 당시 그 정도 영어 하는 사람 많지 않았거든."

신동식의 인물·인맥 정보
1968년 수석비서관 제도 도입과 함께 제2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된 신동식. 그를 제외한 당시 수석들은 모두 작고했다. /신동식 회장 제공

―피란 도중 서울대에 입학했는데.

"부산 언덕배기에 서울대학도 피란 와 있었어. 난리 중이더라도 신입생은 뽑아야지. 입학 경쟁률도 제법 됐어."

―조선공학과를 택한 특별한 동기라도.

"부산 앞바다에 미국·영국 군함과 수송선이 새까맣게 떠 있었어. 바다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 지배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부모님은 난리가 났어."

―왜요.

"내가 종손이야. 할아버지가 법관을 했고, 아버지도 법관이야. 당연히 법대 갈 거라고 기대했는데 조선쟁이 되겠다니 집에서 쫓아내더라고."

―졸업은 제대로 했습니까.

"서울 수복돼서 태릉에서 졸업했어. 그런데 취업이 안 돼. 조선소가 있어야 취직을 하지. 부모님이 얼마나 구박하던지…. 할 수 없이 숙명여고에서 잠시 물리·수학 가르쳤어."

―답답했겠습니다.

"배 만들겠다고 큰소리친 놈 꼴이 말이 아니야. 그렇다고 유학 갈 돈도 없고. 유학 받아주지도 않았어. 미국 MIT나 일본 가야 되는데 그땐 군함 만들려고 조선공학과를 뒀기 때문에 외국 학생은 받아주지 않았어."

―유럽은 어떻게 가게 됐습니까.

"당시 스웨덴에 코큠이라는 좋은 조선소가 있었어. 일하고 싶다고 편지를 썼지. 그런데 답장이 온 거야. 숙소 주고 비행 경비도 대주겠다고.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제법 알려진 국가였잖아. 불쌍한 나라 청년이 일해보겠다고 하니 받아준 거지. 전쟁 끝난 다음 해였어."

―스웨덴 가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프로펠러 비행기 타고 홍콩·방콕·콜카타·파리 거쳐 1주일 이상 걸렸어. 비행기에서 부드러운 휴지와 소금·후추·설탕을 주는데, 너무 황송해서 쓰질 못하겠더라고. 이 고급스러운 걸 나중에 자랑해야겠다 싶어 집에다 몇년 보관했어. 참 찢어지게 가난한 때였지."

―조선소에선 뭘 했습니까.

"낮엔 철판 자르고 용접하고 기능 실습하고, 밤엔 설계도면 보고 주말엔 공과대 교수와 미팅하고 미친 듯이 배웠지. 능력 많이 모자랐지만 조선소에서 대단한 청년이라고 많은 배려를 했지."

―그다음 영국으로 갔다면서요.

"영국 선박회사의 설계기사 모집 광고를 봤어. 조선 하면 영국일 때잖아. 지원서를 보냈는데 덜컥 합격했지. 런던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는 거야. 미국, 일본에도 막 전화하고 글로벌 세계가 따로 없어. 해군 중장으로 퇴역한 하디라는 사람과 영국조선학회 회장을 지낸 토빈이 운영하는 회사에 다녔지. 하디와 토빈이 열심히 일한다면서 자기 지인들 모두 소개해주고 나를 자랑삼아 데리고 다녔어. 전쟁 치른 한국에서 온 청년이다, 대단하지 않으냐 뭐 그런 자랑이었지."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 /조선일보 DB

장군들의 반말을 잠재운
박대통령의 부탁

1958년 스물여섯 살 신동식은 당시 조선인(造船人)의 꿈이라는 영국 로이드선급협회(Lloyd's Register)의 국제검사관이 된다. 영국 보험업자들에 의해 1760년 창립된 로이드선급협회는 당시 전 세계 선박의 설계와 건조 과정을 감독했다. 로이드 검사관들이 승인하지 않는 배는 만들지도 못하고 운항할 수도 없다. 미국이 자체적으로 설립한 미국선급협회와 함께 로이드선급협회의 영향력은 지금도 막강하다.

―어떻게 로이드 검사관이 됐습니까.

"운이 좋았어. 당시 선박 건조에 변화가 있었어. 철강을 연결할 때 리벳으로 조이는 방식을 쓰다가 용접 방식으로 바뀌고 있을 때였지. 검사관들이 많이 필요했고 그때 합격한 거야. 가장 놀랍고 환희로운 순간이었어. 요즘엔 로이드 검사관이 많지만 당시 한국인은 나 하나고 아시아 사람들도 없을 때였지."

―월급이 많았겠습니다.

“당시 유학생 한 달 생활비가 20파운드쯤 됐는데, 로이드 검사관 초임 월급이 150파운드였어.”

―넉넉한 생활을 했겠네요.

“분당 같은 신도시에 독채를 얻었는데, 주말마다 대사관 직원과 유학생들이 몰려와 고기, 햄 사서 부대찌개, 곰탕 끓여줬지. 나중에 김유택 대사까지 놀러 오니까 우리 집을 ‘소사관’이라고 했어. 하하.”

―김유택씨가 초대 경제기획원 부총리를 지낸 분이죠.

“맞아요. 5·16 나고 김 대사는 한국으로 돌아갔지. 두 달쯤 뒤 김 장관이 전문을 보냈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우리나라를 조선 해양 국가로 키운다는 꿈을 가지고 있으니 좀 도와줘야겠다는 내용이었지.”

―뭐라고 했나요.

“싫다고 했어. 군인이 정치하는 거 싫고, 어린 놈이 맡을 일이 아니라 했지.”

하지만 신동식은 1961년 가을 선박 검사관 자격으로 일본 장기 출장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 의장을 처음 만났던 것이다.

―어떻게 박 의장을 만나게 됐습니까.

“김 장관이 일본 출장지로 연락을 했어. 박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 만나러 미국 가는 길에 일본 들렀다 간다는 거지. 한국대표부에서 교민들과 저녁 리셉션을 하니까 그 자리에 꼭 와달라고 신신당부하더라고.”

―그런데 초면에 장군들이 반말로 뭐라 하니 기분이 상했던거군요.

“어깨에 별들 보니 무섭기도 하더라고, 하하. 박 의장이 장군들을 소개했어. 한쪽은 박 의장과 미국 가는 길이고 다른 쪽은 국가 건설에 필요한 협조를 받으러 독일 간다더만.”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 사람들 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독일 가는 군인들 결국 돈 하고 기술 빌리러 가는 거잖아. 의욕만으론 그 보수적인 유럽 국가들이 돈을 주질 않는다고. 그래서 독일 대신 일본을 먼저 살펴보자고 했지. 싫어하는 국가지만 경제 부흥 속도는 엄청났어.”

―제안을 받아들이던가요.

“그 별들이 또 네가 뭔데 계획을 바꾸려 하느냐고 난리 치는 거야. 그때 박 의장이 날 보며 ‘그렇게 하시죠’라고 했어. 그걸로 상황 정리됐지.”

관련스토리
박정희와 신동식의 한국 조선업 이야기
1969년 열일곱 살이던 박근혜 대통령이 신동식 당시 제2경제수석 비서관과 함께 일본에서 열린 미국 걸프그룹 경영진과의 회의 자리에 우리 측 대표로 참석했다. /신동식 회장 제공

귀국한 신동식은 부산 영도에 있는 대한조선공사의 기술고문으로 간다. 시설 활성화 방안을 찾아보라는 특명을 받았지만 공장은 참담한 지경이었다고 했다. “이건 공장이 아니고 풀밭이야. 직원 줄 월급이 없어 못 쓰는 기계 내다 팔아서 직원에게 쌀 주고 있더라고. 처음 한 일이 직원들 데리고 풀 깎고 청소하는 것이었어.” 조선공사 공장엔 방치된 전기로(電氣爐)가 있었다.

신동식은 대학교수들 불러 전기로를 고쳐 난로를 만들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학교에서 쓰는 조개탄 난로를 만들 기술이 없어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는 처지였다. 신동식은 이후 경제기획원장관 고문으로 잠시 일하다 미국선급협회 검사관으로 다시 한국을 떠난다. “돈 없고 일감 없고 사람이 없어. 조선 산업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미국에서 다시 박 의장을 만나지요.

“1965년, 그땐 의장이 아니라 대통령이지. 김현철 주미 대사가 박 대통령이 뉴욕 교민 리셉션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니까 꼭 참석해달라고 하더라고.”

―대통령과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만나자마자 호텔방 큰 메모지에 한국 지도를 그리셨어. 그러곤 삼면이 바다인데 고기를 잡든지 배를 만들든지 해야 할 거 아니냐, 존슨 대통령이 비행기 보내줘 타고 왔는데 자리 한 개 비워놨으니 나랑 같이 돌아가자고 하더라고.”

―그래서요?

“감동이었지. 나 같은 젊은 놈이 뭐 대단하다고 대통령이 직접 국가 백년대계를 같이하자고 하셨겠어. 저런 분이라면 목숨 바쳐 일하겠다고 마음먹었지. 대통령이 먼저 귀국하고 난 미국 생활 바로 정리하고 뒤따라왔지.”

1969년 과학 기술의 요람이 된 서울 홍릉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박정희 대통령(맨 오른쪽)과 신동식(박 대통령 왼쪽)제2경제수석비서관이 새로 조성될 연구 단지를 점검하고 있다. /신동식 회장 제공

박정희 대통령과 두 번째 인연,
한강에 '존슨대교'가 생길 뻔

―대통령이 좋아했겠습니다.

“낡아서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지나 집무실에서 대통령을 만났어. 정말 반가워하더라고. 이후락 비서실장을 불러 내게 1급 비서관 자리를 주라는 거야. 정무 담당인데 원래 2급 자리인데 1급으로 발령내라고 지시하더라고.”

―파격 인사였네요.

“집무실 나와 이 실장을 따라 실장 방으로 갔어. 대뜸 정일권이야, 김종필이야, 당신 ‘빽’ 누구야 하면서 소리를 버럭 지르더라고. 깜짝 놀라 그런 거 없다고 하니까 이제부터 내가 당신 빽이야 이러더라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에 적극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1966년 존슨 대통령의 한국 방문 전이었어. 미국이 깜짝 선물을 하고 싶다고 한국이 원하는 걸 제시하라고 했지. 청와대 안팎이 시끌시끌했어. 여의도에 존슨 기념탑을 지어달라 하자, 한강 다리를 지어 존슨 이름을 붙이자, 각종 제안이 마구 쏟아졌어. 난 과학연구소 지어달라는 의견을 냈지. 다른 참모들이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 이런 선물은 정치적 감각을 발휘해야 한다는 거지.”

―한강대교 옆에 ‘존슨대교’가 만들어질 뻔했네요.

“도무지 결론이 날 분위기가 아니었어. 대통령이 논의를 가만히 지켜보더니 ‘연구소로 하자’고 하시더라고. 그렇게 KIST가 생기게 된 거야.”

신동식은 정무비서관으로 근무하다 1968년 수석비서관 제도를 도입하는 청와대 인사에서 중화학공업과 해사(海事), 과학 기술 등을 관장하는 제2 경제수석 비서관에 임명된다.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 /김지호 기자

거대 플랜트 계획 세우자
朴 대통령, "당장 은행 기업 불러"

―서른여섯에 경제수석, 엄청난 출세입니다.

“이후락 실장한테 따졌지. 아무리 가난한 나라라 해도 전문가한테 경제를 맡겨야지, 이런 인사 하면 국민이 웃는다고, 경제수석 못하겠다고 했어. 그랬더니 이 실장이 당신을 지명한 대통령한테 가서 따지라고 하더라고.”

―대통령에게 따졌습니까.

“똑같이 말했어. 그런데 대통령이 이렇게 말씀하더라고. ‘내가 총칼로 정권 잡았지만 외국에서 돈 빌리고 기술 가져오는 능력은 없다. 당장 수백명씩 굶어 죽는데 쌀 증산 해야지, 휘발유는 없어도 정유공장은 지어야지, 합판공장·유리공장 다 만들어야 된다. 그런데 경제 전문가라는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물가 안정, 환율 안정, 경제성장률 유지가 중요하다는 뻔한 소리만 한다. 그렇게 해서 언제 국민들 배 불릴 수 있겠느냐, 당신은 로이드에서 조선과 금융 보험 익히고 세계 기업 상대했으니 나보다 연줄 많지 않으냐. 이제부터 나가서 돈·기술 꿔오는 게 당신 임무다.’”

―주로 무슨 일을 했나요.
“공장 짓고, 틈나는 대로 외국에 돈 빌리러 다니고. ‘고급 거지’ 같다고 생각했지. 운동권이 말하는 개발 독재의 하수인이 바로 나였어. 하하하.”

―대통령이 강조하던 조선 해양 분야는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1969년 초대형 조선소 건설 계획을 포함한 조선 산업 마스터플랜을 만들어 보고 했더니 대통령이 매우 만족해했어. 당장 은행과 기업 불러 브리핑하라고 하더라고.”

―민간 반응은 어땠나요.

“정신나간 놈이래. 돈 없고 철판 조각 한 개 못 만드는 나라에서 대형 조선소가 말이 되느냐는 거야. 저런 놈이 청와대 있으니까 대통령이 이상한 일 하고 다닌다는 말까지 나왔어. 경부고속도로 착공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야. 외국에서 온 대사와 기업인들도 비웃더라고. 성공 불가능한 유치한 발상이라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이런 반응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니까 굉장히 실망하시더라고. 그래서 다시 말씀드렸어. 세계 인구는 늘어나고 경제활동 활발해지면 배로 운송하는 짐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거대한 배들이 더 필요해진다. 우리가 먼저 지으면 나중에 세계 최대 조선 국가가 될 수 있을거라고 장담했지.”

―대통령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날 한참 보더니 한번 해보자 그러더라고. 이게 바로 조선 산업의 시발점이야. 정주영 회장이 아니라 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조선 산업을 일으킨 거지. 물론 정 회장은 현대중공업이라는 걸출한 조선소를 만든 거고.”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2003년 한국은 선박 건조량, 수주량, 수주 잔량 등 3개 부분 모두 1위를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조선 국가가 된다.

1969년 우리정부는 원유를 운송하기 위해 30만t급 유조선을 들여온다. 이 프로젝트를 지원한 미국 걸프그룹은 일본 요코하마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열린 유조선 망명식에 한국 최고위층이 참석하길 원했다. 영애 박근혜(당시17세)양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른쪽은 신동식씨. /신동식 회장 제공

신기술 발전소가 앞으로의 화두
온실가스 감축사업의 가치

신동식은 1969년 말 제2 경제수석 비서관에서 경제 개발을 위한 대통령 특수 자문기관인 경제과학심의위원회의 상임위원 겸 사무국장(장관급)으로 영전했고 그 이듬해 공직을 떠난다. 이후 선박 설계와 감리를 담당하는 ㈜한국해사기술을 운영해오고 있다. 부산에 본사를 둔 한국해사기술은 건실한 중견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로이드선급협회는 최근 협회지를 통해 신동식을 한국 조선 산업의 아버지(The father of Korean ship-building industry)라고 했다.

―국내 조선 업계가 매우 어렵습니다.

“국제 경기 탓도 있겠지만 선박 수주가 줄어드는 데 따른 해양 플랜트 덤핑 경쟁이 화근이 됐어. 저가 수주 경쟁하다가 이 모양 된 거야.”

―요즘 온실가스 감축 사업을 한다면서요. 파리 기후변화협약 체결되고 전 세계가 이산화탄소 배출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노르웨이 사르가스 파워(SARGAS POWER)라는 회사가 있어. 최근 영국 정부와 돈 밸리라는 지역에 천연가스 발전소를 짓기로 했지. 이 발전소가 아주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어.”

―뭐가 특별합니까.

“발전하려고 가스를 태우면 이산화탄소가 나오잖아. 이 업체는 이산화탄소를 하나도 배출하지 않고 한 곳에 저장하는 기술이 있어. 그래서 영국은 이 발전소를 지어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북해 밑바닥 유전에 쏘아주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 /김지호 기자

―유전에 이산화탄소를 왜 넣나요.

“기름을 잘 뽑기 위해 원유층을 흔들어 놓는 역할을 해. 물을 주로 사용하는데 이산화탄소를 주입하면 훨씬 효과가 좋다고. 전기 만들고 모아놓은 이산화탄소는 유전에 재활용하고, 지구온난화 막는 데 아주 혁신적 기술이지.”

―사르가스와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사르가스 회장이 오랜 친구야. 선박 발주 등 내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줬지. 그 친구가 7년 전 이산화탄소 포집 발전소를 만든다면서 플랜트 업체를 소개해달라고 하는 거야. 한국이 플랜트는 세계 최고거든. 그래서 대우조선해양을 연결해줬어. 두 회사가 2009년 발전소 공동 개발 계약을 맺고, 상용화되면 최초 발전소 5기는 대우조선이 독점 개발권을 갖기로 했고.”

―영국 발전소가 최초 상용화인가요.

“그렇지. 주요 국가들이 자체 기술로 해보려고 무수히 노력했지만 경제성 효율성 문제로 모두 실패했지. 영국도 결국 사르가스 기술 쓰기로 한 거야.”

―사업은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지금 영국이 엄청 서두르고 있어. 영국은 향후 2025년까지 모든 석탄·석유 발전소를 없앤다고 지난달 발표했지. 지구온난화 방지에 기여하는 사업이니까 EU에서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게 되고. 현재 EU본부에서 이 프로젝트 참여 업체와 영국 정부 관계자가 모여 회의를 하고 있어. 한국에선 대우조선이 갔고, 발전기 납품하는 미국 GE도 참여했지.”

―발전소 짓는 비용이 얼마나 됩니까.

“돈 밸리에 900MW 생산 설비 만드는 비용이 3조원 정도로 추산돼. 이 돈을 사르가스와 대우조선, GE 등이 나누는 거지.”

―금액이 어마어마합니다.

“이 발전소가 성공하면 영국은 다른 발전소도 이걸로 대체하겠지. 영국에만 3만MW 발전 설비가 필요해져. 대략 720억달러(약 85조원) 규모야. 유전이 있는 나라는 모두 잠재적 고객이거든.”

―회장님 역할은 무엇인가요.

“사르가스 꼭 붙들어 매서 우리나라 업체와 꼭 맺어줘야지. 이런 사업을 중국 같은 데 넘겨줄 순 없잖아. 조국에 대한 내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해.”

신동식 회장은 피곤해하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대구로 내려가 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에서 45개국 유학생 상대로 한국 경제 발전이라는 2시간 영어 특강을 했다. 건강 비결을 묻자 “배 설계하고 일하는 게 보약이야 보약”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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