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주관리 특강을 하는 박태준 사장.
“본인이 평소에 생각하는 바는 우리 직원들의 안목은 최소한 국제수준의 안목으로 표준화되고 평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회사는 이미 국제적인 수준의 기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계속 일본에 뒤지고 있는가? 물론 축적된 기술력의 격차나 일천한 역사 등 모든 면에서 아직 부족하다는 점을 도외시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안목이 일본 수준에 미치지 못한 데에도 중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안목의 국제화가 자주관리의 성공의 요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국제수준의 안목을 가지는 것이 곧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오직 하나의 힘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포항시 효자동에 있는 제철연수원에서 박태준이 회사의 리더십 패턴 변화에 대해 국가의 그것에 비유하며 자주관리와 국제수준의 안목을 강조한 그날 저녁, 박정희는 무참히 시해를 당한다. 그 비보를 박태준은 이튿날 이른 아침에 포항의 숙소에서 처음 들었다. 포스코 임직원들은 포항시 효자동 포철주택단지 내(內) 야트막한 야산 언덕 위에 외톨의 자그만 절간처럼 자리 잡은 박태준 사장의 숙소를 ‘효자사(孝子寺)’라 부르고 박 사장을 ‘효자사 주지’라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서울의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날들이 많았다.
- 포항시 효자동에 남은 박태준 사장의 외딴집 숙소.
꼬박 하루를 두문불출로 보낸 박태준은 이튿날 아침에야 평소와 다름없이 작업복 차림으로 안전화를 졸라맸다. 그러나 회사에 당도하여 먼저 회의를 주재하지 않았다. 혼자서 묵묵히 걸었다. ‘나는 여기까지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라고 하셨던 그 말씀이 정녕 이것이었단 말인가? 몇 차례나 부질없는 원망처럼 그 말을 되뇐 박태준의 납덩이같은 발길이 이어 나가는 동선(動線)은 박정희의 포항제철소 방문 발길이 그려놓은, 지표에는 없지만 그의 머리에는 뚜렷이 남은 동선이었다. 1978년 12월 포철을 열두 번째로 찾은 박정희가 걸어갔던 동선을 따라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박태준은 견디기 어려운 슬픔 속에서도 박정희와 약속하고 박정희와 함께 꿈꾼 ‘철강 2000만 톤 시대’를 놓칠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방법을 쓰든 그 약속을 실현해야겠는데, 과연 어떤 방법이 있는가?’
- 포항제철에 마련한 박정희 대통령 빈소에 조문하는 박태준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