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5.15 03:00
[13] 조국을 택한 과학자, 공학박사 안영옥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가 "영옥은 미국서 공부시켜라" 당부
큰형이 빚내줘서 유학길 올라 초호황기 미국서 안정된 생활
美, 한국의 월남 파병 감사 표시로 '응용과학연구소' 설립 지원키로
박정희 대통령 '유학생 유치' 특명… KIST소장, 설득 끝에 18명 선발
대통령보다 높은 봉급이었지만 미국서 받던 것의 30%에 불과
'나홀로 박사'로 연구실장 맡아 제철·반도체 등 기간산업 일으켜
안국형 부자(父子) 이야기
안영옥은 안국형의 셋째 아들이다. 안국형은 독립운동가였고, 아들 안영옥은 과학자다. 부자(父子)의 행적은 닮았다. 공부도 잘했고, 사명감도 투철했고, 평생 만족하며 살아온 군더더기 없는 삶도 닮았다.
안국형은 평양에서 90리 떨어진 평남 평원군 평원면 사람이었다. 안창호가 만든 대성학교를 나와 일본 메이지대를 졸업하고 황해도 사리원에서 법원 서기로 일했다. 애국심 또한 투철했던지라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 자금 모금 감독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1920년 평양에서 발생한 독립 자금 모집 사건에 연루돼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에서 안창호와 만나 흥사단에 가입한 뒤 안국형은 임시정부와 상해 요원들 사이의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스물여덟 살이었다.
1930년 독립 자금 모집 사건의 시효가 만료되면서 안국형은 단신으로 귀국했다. 경성과 상해를 오가고, 미국으로 유학 가서 공부하기도 했다. 1932년 막내아들 영옥이 태어났다. 영옥은 안중근 의사의 손자 웅호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
광복되기 1년 전 안국형이 상해로 와서 가족에게 말했다. "일본은 곧 망한다. 돌아가자." 그해 아내와 막내아들 영옥이 평양으로 돌아왔고 안국형은 두 아들과 함께 광복 후 귀국했다. 김일성이 평양으로 들어왔다. 조만식과 교유하던 안국형 가족은 평양에서 원산으로, 원산에서 경원선을 타고 전곡을 거쳐 한탄강을 건너 서울로 내려왔다. 막내 안영옥은 1946년 서울 명륜동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둘째 영각이 전쟁 때 죽었다. 독립운동가요 신학문을 익힌 선각자 안국형은 "셋째는 반드시 미국에 보내서 공부를 시키라"고 큰아들 영주에게 신신당부했다. 서울대 화공과에 입학한 영옥은 1955년 미군장교부인회장학생에 선발됐다. 안영옥은 큰형님이 빚을 내 마련해준 돈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쌍발 프로펠러기를 타고 남태평양 웨이크아일랜드에서 급유를 받은 뒤 하와이로 가서 다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탔다. 이듬해 독립운동가요 세 아들의 아버지인 안국형이 눈을 감았다. 안영옥은 그 뒤 한 번도 한국 땅을 밟지 않았다. 12년 뒤 최형섭을 만날 때까지는.
과학기술과 대한민국
1962년 11월 17일 토요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 때 만든 원자력연구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과학자 우대 정책을 과감히 실시할 것이며 과학자들의 진지한 연구 분위기를 조성토록 하겠다." 조선시대 세종대왕 때 동래현 관노(官奴) 장영실이 측우기며 물시계를 발명한 이래 단 한 번도 권력층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과학자와 기술자가 각광받게 되리라는 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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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10월 30일 KIST를 찾은 험프리 전 미국 부통령과 최형섭 소장. 준공식 1주일 뒤다. /KIST제공
1965년 박정희가 과학자들을 청와대로 불렀다. 박정희가 말했다. "작년에 스웨터를 2000만달러나 수출했다." 듣고 있던 원자력연구소 소장 최형섭이 한마디했다. "기특하긴 하지만 언제까지 스웨터나 팔고 있을 건가. 일본은 작년에 전자제품을 10억달러나 수출했다. 문제는 기술이다." 한 달 뒤 미국 대통령 존슨이 한국군의 월남 파병에 대한 감사 표시로 박정희를 초청했다. 피츠버그 제철 공장에 들러서 박정희는 "단 한 개라도 이런 공장이 있었으면" 하고 읊조렸고, 플로리다의 케네디 우주센터에 가서는 창공으로 솟구치는 아틀라스 로켓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봤다. 그리고 존슨이 선물을 줬다. "응용과학연구소 설립을 도와드리겠다." 이듬해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됐다. 스웨터 수출을 자랑하는 대통령에게 훈계했던 최형섭이 초대 소장에 임명됐다. 그곳에서 일할 과학자 유치는 최형섭이 맡았다.
조국을 택한 과학자들
최형섭은 "과학기술 개발은 개발도상국의 공업화와 국가 발전을 위한 가장 현명한 해결책"이라는 신념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6·25 전쟁 후 미국 미네소타대 대학원에서 야금(冶金)으로 박사 학위를 딴 뒤 돌아와 이 신념을 종교처럼 퍼뜨리고 다닌 인물이었다.
그때 한국은 고학력자에게 줄 일자리도 별로 없었고, 있더라도 박봉에 연구 환경이 척박한 나라였다. 전쟁 후 1967년까지 해외 유학생 7958명 가운데 973명만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KIST 소장으로 임명된 그해부터 최형섭은 지구촌을 샅샅이 훑었다. KIST의 미국 측 파트너인 바텔연구소와 함께 해외 기관 500곳에 있는 한국 과학자에게 자료를 돌리고 연구원 지원서를 받았다. 지원자 800여 명 가운데 75명을 추려내 그해 10월 미국과 유럽에 가서 일일이 만났다. 유학생들은 연구 환경과 경제적 처우를 물었다. 최형섭이 대답했다.
"연구 환경은 보장한다. 모두 연구실장으로 일하며, 먹고살기에 안 불편할 정도로 대우도 보장한다. 그 대신 조건이 있다. 노벨상을 희망하는 사람은 응모하지 마라. 논문 쓸 생각도 마라. 연구 외에 돈 벌 생각도 마라. 우리는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최형섭의 카리스마 가득한 설득에 박사급과 산업계에 경력을 쌓은 석사급 18명이 최종 선발됐다. 전공은 기계·금속·재료·화학·식품·전기·전자 등 다양했다. 월급은 6만원에서 9만원 사이였다. 당시 국립대 교수 월급 3만원보다 훨씬 많았다. 계획서를 본 박정희가 말했다. "나보다 봉급 많은 사람이 수두룩하구먼." 1966년 월급 7만8000원이던 대통령은 최형섭 소장에게 "그대로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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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1월 9일, 준공된 지 석 달이 채 되지 않은 KIST 광장에 연구원들이 모였다. 이들의 두뇌와 손에서 대한민국을 이끌 기술이 잉태됐다. 앞줄 왼쪽에서 셋째가 최형섭 초대 소장이다. 1977년 이 사진을 게재한 KIST 기록물은 “이미 2명이 세상을 떴다”고 설명을 달았다. /KIST 제공
하지만 국내에서나 최고였지 미국 연구소에서 받는 돈의 30%밖에 되지 않았다. 연구 환경도 척박했다. 그럼에도 안정된 미래를 버리고 사명감을 택한 과학자들이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에서 개도국으로 두뇌가 역유출된 첫 사례로 기록됐다. 안영옥은 그 18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공부하는 천당, 미국
버클리공대는 공부하는 천당(天堂)이었다. 버클리공대의 학풍(學風)은 '만사를 열심히 한다'였다. 도서관은 불이 꺼지지 않았고 주말에는 미친 듯이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놀았다. 금문교를 건너면 예술인 마을 소살리토가 있었고, 북쪽으로 와인 산지인 나파 밸리가 나왔다. 요세미티 국립공원도 가까웠다. 안영옥은 1958년 대학 졸업과 함께 동성동본인 약혼자 안정희와 결혼했다. 법대를 다니던 안정희는 "법으로 금지된 사랑"이라며 연애를 거부했지만 안영옥은 "미국 가서 결혼하자"며 우겨서 함께 떠난 터였다.
석사는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받았다. 1950년형 낡은 셰보레 승용차로 와이오밍과 유타와 네브래스카를 거쳐 아이오와까지 갔다. 아무것도 없는 옥수수밭에 대학교가 서 있었다. 공과대 대학원생들이 합동으로 실험용 원자로를 만들고 있었고, 전기공학과에서는 대형 컴퓨터를 만들고 있었다.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무인 우주선 스푸트니크를 쏴 올리고 기고만장했던 소련의 흐루쇼프가 그 풍요로운 옥수수밭을 지나 대학교를 찾았다. 옥수수밭의 지평선에 얼이 빠진 흐루쇼프가 연구소를 지나가는 사이, 중절모를 쓰고 레인코트를 입은 대학원생 몇 명이 바이올린 케이스를 겨드랑이에 끼고 어슬렁대 경호원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가난한 부부는 차원이 다른 곳에서 차원이 다른 행복감에 젖어 공부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때까지 전쟁 때 고생한 것과 공부한 것밖에는 인생에 남은 게 없었다. 그래서 외국인도 취직이 되는 화학 기업인 유니언카바이드 연구소에 취직했고, 한국에 있는 형님이 공부를 더 하라고 해서 학교로 돌아가 박사 학위를 땄다. 미국 경제가 활활 타오르던 1965년이었다.
안영옥은 졸업과 함께 듀폰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듀폰연구소는 벨연구소와 함께 세계 최대 연구소라고 하는 꿈의 직장이었다. 출근 첫날 안영옥이 받은 연구소 전화번호부에는 박사급 1300명을 포함해 3500명이 넘는 연구원의 연락처와 주소가 적혀 있었다. 아이도 셋이나 생겼다. 직장은 안정됐고 가정도 완성됐다. 계획대로 미래만 잘 살아내면 됐다.
그런데 불쑥 최형섭이 찾아온 것이다. 1967년 10월이었다. 그제야 안영옥은 그 전 해에 바텔연구소의 한국 과학자 모집 공고를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원서를 냈던 사실을 떠올렸다. 3년만 공부하고 돌아가자고 다짐했던 12년 전의 기억도 불쑥 떠올랐다.
"대한민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워싱턴DC에 있는 한 호텔방에서 최형섭과 안영옥이 만났다. 최형섭이 말했다. "돌아와서 함께 연구소를 만들자. 안 박사가 한국에 오려면 이만한 기회도 없다. 굶어 죽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엄포를 놨다. 돈 벌 생각 말고, 노벨상 받을 생각 말라고. 함께 있던 다른 과학자가 물었다. "아내도 박사다. 같이 가면 안 될까." 최형섭이 말했다. "그 따위 생각 할 거면 당신은 오지 마라." 최형섭의 구멍 난 양말을 보며 안영옥이 말했다. "아내에게 물어보고." 며칠 뒤 아내 안정희가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이 행복하다면 돌아가자." 그는 안정된 중상류 미국 생활 대신 화려한 채색을 기다리고 있는 백지(白紙)의 땅 한국을 택했다.
1969년 2월 노스웨스트 항공기를 타고 안영옥 가족이 대한민국으로 귀국했다. 14년 만이었다. 김포공항 상공에서 기내 방송이 나왔다. "대한민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한국말이었다. 저절로 눈물이 났다. 고가도로가 우뚝 선 서울 청계천변 판자촌 풍경에 또 한 번 울컥했다. 혼인신고를 대신 해준 친척이 동사무소에 가서 사정했다. "일자무식인 애들이 동성동본 금지법도 모르고 애를 셋씩이나 낳아서…."
대한민국 건설에 핏줄이 되다
돌아온 과학자들은 텅 빈 연구실을 하나씩 배정받고 전원이 해당 분야의 연구실장에 임명됐다. 최형섭의 약속은 지켜졌지만 너무 웃겼다. 박사가 우글거리는 연구소에서 온 두뇌들인데 1박사 1실이었다. 그것도 기초 연구가 아니라 응용과학, 그러니까 산업에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작품을 내놔야 했다.
밸브 하나도 못 만들던 나라에서 안영옥이 연구한 프레온가스는 에어컨 냉매와 반도체 절연 물질로 연결됐고, 제철을 전공한 동료들의 연구는 포항제철 설립으로 이어졌다. 광섬유 연구는 통신 산업으로 이어졌다. 대표적 수출 품목인 가발용 재료도 개발했다. 대한민국 산업 분야에 이 과학자들의 혈액이 수혈되지 않은 분야가 드물다. 대덕연구단지도, 국방과학연구소(ADD)도 그 뿌리는 KIST다. 안영옥이 말했다. "KIST에서 쌓은 경험과 경력을 바탕으로 대학과 기업으로 진출하면서 국내 연구 환경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안영옥은 이후 산업계로 나가 기업 연구소 설립과 공장 건설을 주도했다. 안영옥은 1982년 KIST로 돌아가 벤처캐피털 K-택을 책임지다 은퇴해 기업체 고문으로 일했다. 1991년 정부는 해외 두뇌 유치 사업을 중단했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인재 유출을 걱정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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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안국형이 염원했던 '조선 독립'은 완성됐다. 아들 안영옥이 참여했던 '과학 입국(立國)'도 완성됐다. 동성동본 혼인 금지 조항도 폐지됐다. 대한민국 과학을 이끈 최형섭은 2006년 세상을 뜨고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KIST 창립 멤버 25명 가운데 4명은 10년 내 과로로 세상을 떴다.
[안영옥이 말합니다]
저는 요즘 PTT글로벌케미컬이라는 태국 석유화학 기업에서 영국인·미국인들과 함께 국제 혁신 부문 고문을 맡고 있습니다. 1년에 두 차례씩 방콕으로 가서 강연하고 조언하지요. 그곳 분들은 늘 저를 다른 이들보다 하루 일찍 부릅니다. 전날 오전에는 한국 화학공업의 발전상을 이야기해달라고 하고, 오후에는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화공 분야 연구 방법론에 대해 강의해달라고 합니다.
6·25전쟁의 전흔(戰痕)이 깊던 60년 전 저는 신천지 미국으로 떠나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태국에서 대한민국 기술을 배우려고 늙은 저를 찾습니다. 가슴이 벅찹니다. 불모지였고 백지였기에 대한민국은 오히려 저희에게 기회의 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대한민국에 숲이 무성하고 과실도 실(實)하게 달렸습니다. 세월이 이리 흘렀습니다. 신나게 산 것 같습니다.
※ 다음 주 大韓國人주인공은 '증기 기관차에서 고속철까지-기장 박병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