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박정희 대통령, 청와대 방문한 카터 앞에서 45분간 ‘안보교육’

여동활 2013. 8. 8. 10:46

박정희 대통령, 청와대 방문한 카터 앞에서 45분간 ‘안보교육’

기사입력 2013-08-08 03:00:00 기사수정 2013-08-08 09:15:39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86>정상회담

카터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청와대 만찬 모습. 표정은 웃고 있지만 역대 최악의 정상회담으로 기록됐다. 동아일보DB
카터 대통령이 추진한 주한 미군 철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국 내 반대가 갈수록 커졌기 때문이다. (당시 김용식 주미대사는 86년 동아일보에 ‘외교 33년 회고록’을 연재했는데 여기에는 70년대 후반 한미 갈등이 생생하게 소개돼 있다. 이하 내용은 당시 신문기사들과 그의 회고록을 축약 정리하는 것임을 밝힌다.)

미국 내 철군 반대 여론을 이끈 신호탄은 77년 5월 중순 주한미군사령부 참모장 존 싱글러브 장군이었다. 그는 워싱턴포스트 기자에게 “철군은 곧 전쟁 발발을 의미한다. 카터 대통령의 철군 정책은 북한의 군사력에 대한 ‘과거 정보’에 입각한 것”이라고 폭탄 발언을 한다. 비보도를 전제로 한 것이었지만 신문은 장군과의 약속을 어기고 대서특필했다.

격분한 카터 대통령은 그를 워싱턴으로 소환한 뒤 좌천시킨다. 결국 싱글러브 장군은 78년 5월 25일 퇴역하는데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서도 “미군과 한국군 고급장교 가운데 지상 전투 부대를 카터 대통령이 표명한 스케줄대로 철수하는 데 동의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소신 증언을 했다. 그의 좌천 이후 철군 반대를 주장하는 미 군부 내 목소리는 잦아들지만 의회 내 목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워싱턴포스트지 보도 직후인 77년 5월 하순 미 상원 본회의는 철군 지지는 물론 철군 비난 결의안까지 부결시켰다. 이듬해인 78년으로 접어들자 ‘미국의 철군 계획은 한국의 정치적 안전에 좋지 않은 심리적 충격을 줄 염려가 있다’는 일본 방위백서가 공개된다. 워싱턴으로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워싱턴에서 미묘한 입장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

78년 2월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은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 “예상외로 북한 군사력이 한국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되고 북한이 침략 징후를 보이면 철군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고 발언한 것이다. 이어 4월 초 하원 군사위 조사소위도 “카터 대통령의 철군 계획은 국방부와 합참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극동의 안전에 파급되는 영향을 고려함 없이 내려진 결론”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런 상황에서 78년 11월 한미연합사가 창설되는데 이는 ‘미국이 한국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결의를 분명히 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79년으로 접어들면서 철군 분위기는 확실히 반전됐다. 1월 8일 미국 내 신문들은 ‘북한이 40개 사단과 2600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29개 사단과 2000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다는 카터 대통령의 철군 결정 당시 상황 판단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북한의 지상군 전투력이 남한보다 우세하다는 것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갈수록 고립됐다. 마침내 하원 군사 위원들이 대통령에게 “철군 계획을 중지하라”고 요구한 데 이어 상원의 유력 의원들까지 미 제2사단을 계속 한국에 주둔시킬 것과 한국군 현대화 촉진이 필요하다는 연구보고서를 낸다. 결국 카터 대통령은 79년 2월 9일 상원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 “철군을 보류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는 넉 달 뒤인 79년 6월 29일∼7월 1일 2박 3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는다. 미군 철수와는 별도로 한미연합사 창설 때 한미 양국의 협력을 위해 방한하고 싶다는 뜻을 친서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냈는데 이를 박 대통령이 받아들여 이뤄진 방한이었다.

하지만 당시 한미 정상회담은 역대 최악의 정상회담으로 기록됐다.

카터 대통령 입국 첫날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도쿄에서 경제 정상회담을 마치고 안개 낀 우중충한 6월 29일 오후 9시 30분 김포공항에 도착해 영접 나온 박 대통령과 처음 대면했다. 그러고는 박 대통령과 악수만 나눈 뒤 미 해병대 헬리콥터를 타고 동두천 미군 부대로 가버렸다. 공식 행사는 이튿날에야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고, 정상회담은 행사 직후 청와대에서 이뤄졌다.

문제는 사전에 철수 문제를 재론하지 말아 달라는 카터 대통령 측 요구에 아랑곳없이 박 대통령이 장장 45분이나 철군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안보 강의’를 하면서 터졌다. 회담장에 배석했던 김 전 주미대사의 회고다.

“카터 대통령의 기색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펜을 들고 메모지에 무엇인가 쓰는 자세를 취했는데 박 대통령의 얘기를 경청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카터 대통령이 이 자리를 얼마나 불유쾌하게 생각했던가는 당시 동석했던 밴스 국무장관 회고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박 대통령이 통역을 통해 말하는 동안 실내 분위기가 급격히 냉각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대통령과 브라운 국방장관 사이에 앉았던 나는 카터 대통령이 노기(怒氣)를 참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어 김 전 대사는 “카터 대통령은 한마디의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철군과 관계없는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의견이 교환되었을 뿐이고 그것으로 회담은 끝났다”고 말한다.

결국 정상회담은 이날 저녁 카터 대통령이 박 대통령에게 제시한 한국의 국방비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6%까지 올리는 안을 박 대통령이 받아들이고, 인권 문제와 관련해서는 “긴급조치 9호는 치안에 관한 문제인 만큼 맡겨 달라”는 박 대통령의 발언을 카터 대통령이 받아들이는 식으로 ‘막판에 웃은 정상회담’으로 마무리되긴 한다.

당시 회담에는 작은 에피소드도 있었다. 바쁜 일정 중에도 여의도교회에서 예배를 볼 정도로 신심이 두터웠던 카터 대통령이 떠나는 날 김포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박 대통령에게 선교를 했다는 것이다. 김 전 대사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들었다며 차 안에서 나눈 두 사람의 대화를 전하며 이렇게 회고한다.

“카터 대통령이 ‘각하의 종교는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박 대통령이 ‘집사람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습니다. 아이들 중에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도 있습니다. 나는 특별히 종교가 없습니다’ 말했다. 카터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게 선교를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이날 저녁 박 대통령은 관계관들을 청와대에 불러 비공식 만찬을 베풀었다. 그리고 차 안에서 카터 대통령과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그 친구 참∼’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소 의외였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그런대로 당시 대화 분위기가 친밀한 분위기였음을 주변에 느끼게 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카터 대통령은 20일 뒤인 7월 20일 주한미군 철수론자였던 안보담당특별보좌관 브레진스키를 통해 “주한 미군 철수를 81년까지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2년 반 동안 한미관계를 냉각시켰던 미군 철수 문제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것으로서 박 대통령의 오랜 스트레스는 해소되었으나, 사실은 더한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