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감각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은 독점과 경쟁을 적절하게 배합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모든 성공조직과 인간은 상반되는 요소와 성격을 균형 있게 통합·활용·조정해
시너지 효과를 올리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朴대통령의 인간됨 자체가 수줍음과 강인함, 엄정과 관용,
理와 氣의 양면성을 균형 있게 통합한 모습이었다.
그는 전략과 정책에서도 그러했다.
1970년대 朴대통령의 중화학공업 건설과 방위산업 건설을 실무적으로 보좌하면서
이 사업들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吳源哲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朴正熙식 「독점과 경쟁의 배합 전략」을 이렇게 정리했다.
<1960∼1970년대에는 수요가 부족해서, 국제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국제규모에 미달하는 공장이라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국제경쟁력이 없는 공장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생산 제품은 국제 가격보다 비쌀 수밖에 없고, 따라서 수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럴 때는 하루 속히 국제 규모의 공장으로 키워 나가는 것이 우선적 과제였다.
즉 독점은 국제경쟁력이 생기고 난 후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 독점 공장이 일단 국제규모화가 된 후에는 즉시 또 하나의 회사를 설립해서,
경쟁체제로 가야 한다는 것이 朴대통령의 방침이었다. 그래야만 善意의 경쟁이 일어나서,
품질향상과 가격引下가 이뤄지고, 국제경쟁력 강화가 계속된다는 이론이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석유화학과 종합제철」이었다>.
1973년 1월12일 朴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 선언을 할 때
「제2의 석유화학과 제2의 종합제철」을 건설한다고 했다.
朴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에서 석유화학과 종합제철을 2대 기본공장으로 설정했다.
여기서 생산된 제품이 한국 공업구조 전체의 기본 소재로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제2석유화학 단지는 麗川(여천)에 건설되어 민간업체 간 경쟁체제로 들어갔다.
종합제철만큼은 포항종합제철 하나만 존속되어, 독점체제로 남게 되었다.
포항 제철소가 확장을 계속하다 보니 입지여건상, 포항에서는 증설이 어렵게 되었다.
종합제철을 건설할 만한 다른 입지를 선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석탄과 철광석을 호주나 캐나다에서 수입하려면 20만t급의 화물선을 이용해야 수송비가 낮아져서
생산원가가 내려간다. 20만t급 화물선이 출입할 수 있는 항구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連關團地(연관단지)까지를 생각하면 1000만 평의 공장용지가 필요하다.
加露林灣(가로림만)의 발견
제2종합제철 입지선정 작업을 하고 있을 때, 吳源哲 수석은 국토개편계획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1976년부터 그는 「행정수도건설 계획과 이에 따른 국토개편 계획」
을 수립 중이었다. 이때 전국 인구의 再배치 문제가 큰 과제로 등장했다.
농촌으로부터는 계속 인구가 빠져 나오는데,
2000년대 초까지 1500만 명이 될 것이란 계산이 나왔다.
이 중 기존 공업 基地(기지),
즉 포항·울산·창원·巨濟·구미·여천·溫山의 7대 基地에서
한 基地당 50만 명의
인구를 흡수한다고 계산하더라도 흡수 가능 인구는 35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약 1000만 명에게는
새로운 공업지구를 건설해서 일자리를 마련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촌에서 빠져나오는 인구는 서울 등
대도시로 모여들 것이다.
吳源哲 수석은 국토개편 작업을 하면서 획기적 개념의 공업지구를
구상하게 된다.
그 전에 吳수석이 산파 역할을 한 것은 한국 기계공업의 메카로 불리는
창원공업기지였다. 吳수석은 창원공업기지만
한 공업기지를 10개 이상, 한 지구 內에 건설하는
거대한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 지구엔 초기 400만 명, 최종적으론 8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아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약 3억 평이라는 토지가 필요하게 된다.
물론 20만t급 대형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끼고 있어야 한다.
1978년 어느 날 吳수석은 그런 조건의 땅이 있으리라고는 크게 기대도 하지 않은 채,
행운만 바라며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大항만을 건설할 자리를 알아보려고 海圖(해도)를 구해서
전국의 해안지대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환성이 터져 나왔다.
이상적인 장소를 발견한 것이다. 黃海에는 큰 항구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는데,
이렇게 이상적인 장소가 있다니, 이런 것을 天運이라고 하나 보다. 20만t급 배 여러 척이 정박하는 데
문제가 없고, 배후에는 넓은 野山지대가 있었다.
나는 全엔지니어링의 鄭鎭行(정진행)씨로 하여금 곧 현지답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鄭씨는 창원공업기지, 구미공업기지의 토지계획안을 수립했고,
그땐 행정수도 계획안을 작성 중이었다>(吳源哲씨의 최근 메모)
현지답사 후 확신을 갖게 된 吳수석은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각하! 오늘은 참으로 좋은 소식을 보고 올리겠습니다.
서해안에서 20만t급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항만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朴대통령은 금세 그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어디야?』라고 되물었다.
『可露林灣(가로림만)입니다. 가로림 만은 그 넓이가 바다와 같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灣 안으로 막대한 양의 潮水(조수)가 매일 드나들다 보니,
입구가 파여 水深(수심)이 20m가 넘습니다. 20m의 수심이라면, 20만t급 화물선이 출입 가능합니다.
방파제도 필요 없습니다. 부두 岸壁(안벽)만 건설하면 되는데,
안벽을 만들 수 있는 길이도 9000m나 됩니다.
실로 보기 드문 이상적인 항만 자리입니다.
그 외에 10만t급 선박이 정박 가능한 항만을 건설할 수 있는 장소도 그 주위에 있는데,
이곳의 안벽 길이가 2000m나 됩니다. 이것만 해도 대단히 큰 항만이 됩니다』
|
중부종합공업기지 구상도. 창원기계공단의 8배나 되는 부지에 5개의 항만을 만들어 800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완공되면 제2의 싱가포르가 된다. |
『싱가포르를 능가합니다』
吳수석은 도면들을 펼쳤다. 도면에는 5개의 항만 자리가 표시돼 있었다.
朴대통령은 이 도면들을 한참 보고 있었다.
『각하! 이만하면 동양 최대의 항구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황해에서 가장 큰 항구가 上海(상해)인데 그 수심은 10m에도 못 미칩니다.
대대적인 준설 공사를 하더라도 5만t급 화물선 정도가 겨우 출입 가능합니다.
그 외에 황해에 있는 靑島나 天津이나 大連, 북한의 남포항 등은 2만∼3만t급 항만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가로림만 주변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야산지대가 많습니다.
3억 평 정도는 됩니다. 이곳을 정리하면 공장대지 또는 주택용지로 사용할 수 있는데,
400만~8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됩니다』
설명의 내용이 중대해지자, 朴대통령은 얼굴을 들고 그를 직시했다. 吳수석은 보고를 계속했다.
『각하, 싱가포르도 이만한 항구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싱가포르의 국토 면적은 685.4km2로서, 2억 평 정도입니다.
이 안에서 300만∼4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경제 번영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가로림만을 개발한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싱가포르의 1.5~2배가 되는 공업지대를
국토 안에 새로 건설한다는 결론이 됩니다.
환언하면 싱가포르의 두 배가 되는 항만과 공업지구가 우리나라에 예속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국토종합개발 계획상의 효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산업지구는 浦項·蔚山·釜山·창원·여수灣 등 동남해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이들 산업 벨트에서 생산되는 鐵鋼材(철강재), 석유화학제품 등의 소재나 원료 등은
긴 거리를 수송해서 서울이나 수도권 및 기타 전국에 산재하는 공장에서 가공한 후
또다시 부산港 등으로 수송해서 수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철강재는 重量物(중량물)이라서 수송비가 많이 듭니다.
이에 반해 앞으로 건설될 중부공업기지는 수도권이라는 대규모 消費地(소비지)와 인접해 있으므로,
공업의 효율화를 가일층 촉진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현재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가장 큰 규모의 노동력 공급원은 호남권과 중부지방입니다.
중부공업기지는 이들 지방의 遊休(유휴) 노동력을 흡수하는 데도 크게 작용할 것이며,
아울러 호남권과 충청권의 공업발전 및 지역개발에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중부공업기지를 중심으로 해서 북쪽은 수도권까지, 남쪽은 호남지방까지의
거대한 서부공업지대가 새로 구축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가로림 港灣을 중심으로 해서,
仁川항·아산만·비인만·長項항·群山항·木浦항·麗水항 등을 연결하는 경제적이고
편리한 해상교통망이 짜임새 있게 구성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나라의 공업지구는 서부공업벨트와 동남공업벨트로 양분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호남이나 충청도의 소외감도 완전히 소멸될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이 보고를 다 듣고도, 아무 질문이나 의견을 달지 않았다.
『한번 가보도록 하지』라고 딱 한 마디 했다.
가로림만 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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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源哲 수석은 임시행정수도의 관문항만으로서 가로림만 일대를 개발함으로써 京釜축선과 맞먹는 중부경제권을 형성하려고 했다. |
며칠 후 朴대통령 일행은 헬기를 탔다. 일행 중에는 현대의 鄭周永 회장도 끼어 있었다. 도착지는 충남 서산군(당시) 가로림만 북쪽 입구 모래둑. 허허벌판에 집 한 채 없고 사람의 발길조차 뜸한 곳인데 바람이 셌다. 가로림만의 물은 푸르다 못해 검정빛이 돌고 있었는데, 물결치는 파도가 요란해서 넓은 바다 그대로였다. 넓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가로림만 입구의 남쪽에 돌산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朴대통령은 빙 둘러보고는 『과연 넓긴 넓구먼』이라고 했다. 동쪽 멀리 끝자락에 높게 보이는 산이 있었는데, 산꼭대기에는 공군 레이더 기지의 둥근 안테나가 보였다. 일행은 바람을 피해, 모래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여기에서는 몇 사람의 일꾼들이 메주 덩어리만 한 돌들을 파내고 있었다. 朴대통령이 『무엇에 쓰려고 하오?』라고 묻자, 이들은 하도 깡 시골에 사는지라 朴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한 듯 일을 계속하면서 『硅石(규석)입니다. 품질이 세계 최상이지요. 몽땅 수출합니다』라고 대답했다.
朴대통령은 다시 헬기를 타고 가로림만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공군 레이더 기지에 착륙했다. 거기서 가로림만을 바라보니, 얕은 야산들이 해변까지 계속 이어 나갔는데, 가로림만의 윤곽은 너무 멀고 커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朴대통령은 『꼭 조선시대의 烽燧臺(봉수대)에 올라온 것 같구먼』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기지內를 돌아보고 장병들을 위로했다. 대통령은 돌아오는 헬기 안에서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건설부에 지시해서 우선 산업도로부터 건설토록 하지』
이것이 이날의 시찰 결과였다.
며칠 지나서 현대의 鄭周永 회장이 吳源哲 수석을 찾아와서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했다.
『내 나이 칠십인데 이제부터 큰일을 또 한번 시작해 봐?』
吳수석이 『무슨 뜻이오?』라고 하니 鄭회장은 『종합제철을 내가 해볼까 해』라고 했다.
吳수석이 『대통령의 내락은 얻은 것이오?』 하니 鄭회장은 빙그레 웃고 답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검토는 해보지」라는 정도의 뜻은 받은 것 같았다.
당시 현대그룹에서는 각종 대형 토목 공사, 많은 아파트 공사,
플랜트 건설, 선박 건조, 자동차 생산 등으로 철강재 수요가 많았다.
현대그룹은 자금력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현대는 종합제철을 원했고,
그 뜻을 대통령에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吳수석은 그래서 朴대통령이 가로림만을 시찰할 때 鄭회장을 동행시켰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보았다.
여하간 鄭회장은 가로림만에 대해서 그 가치를 직감적으로 파악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吳수석이 나중에 들으니 鄭회장은 지난번 시찰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로림만 입구에 있는 돌산(石山)을 구매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가로림만을 개발하자면 앞으로 많은 암석이 필요하게 될 터인데, 암석을 구하는 길은
그 돌산에서 얻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1978년 12월 吳수석은 중화학기획단을 시켜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
이란 125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만들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신행정수도의 關門
산업도로는 곧 착수돼서 완공을 보았다.
중부공업기지에 공업용수를 공급하게 될, 삽교천의 담수호도 완공했다.
바로 그날 朴대통령은 세상을 떠난다. 그 후, 제2종합제철은 현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포항제철 소속의 제2期 제철소는 중부공업기지에 입주하지 않았다.
포항제철의 제2공장은 「중화학공업육성계획」에서 여천 석유화학공업基地의
확장 예정지로 잡아 놓았던
光陽에 건설되었다. 그 대신 加露林灣에는 현대정유와 현대석유화학, 그리고 삼성석유화학이 들어섰다.
종합제철과 석유화학의 입지가 서로 바뀐 것이다.
2004년 9월, 吳源哲 前 수석은 加露林灣으로 가서, 朴대통령이 시찰했던
바로 그 장소를 다시 찾아가 보았다.
그곳 바닷가, 종합제철소 예정지였던 곳에는 현대와 삼성의 석유화학 공장들이
널찍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작은 항만 하나가 건설되어 있었다.
그리고 항만 입구에는 해안 경비용 탱크 한 대가 加露林灣을 혼자서 지키듯,
포신을 높이 들고 버티고 있었는데,
光化門 앞 해태像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2004년 11월 호주에서 개최된 「朴대통령 서거 25주년을 기념하는 포럼」 때의 일이다.
회의는 朴대통령이 벌였던 30∼40년 전의 일에 대해 贊否가 엇갈리는 논쟁을 계속했다.
吳源哲씨는 『미래에 대한 朴대통령의 이야기도 나와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최 측에 부탁을 해서 회의종료 전 30분의 시간을 얻어 즉석 강연을 했다.
제목은 「가로림만 프로젝트」였다.
吳 前 수석이 새삼 加露林灣 프로젝트에 대해서 애착을 갖게 된 것은
최근 발생한 새로운 국면 때문이다.
盧정권이 공주-연기 지방에 행정복합도시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일과
중국 상해항의 개발로 부산항의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吳源哲씨는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이 두 가지 요소를 한꺼번에 해결하고 보완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중화학기획단에서 만든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 보고서도
그때 朴대통령이 추진했던 행정수도 건설과 이 계획을 연결시키고 있다.
<대전 부근에 위치하게 될 2000년대 신행정수도의 형성에 따라 本종합공업기지는
新수도와 강력한 張力(장력)을 유지할 것이다.
본 계획지에서 新수도에 이르는 간선 도로망이 구축되어 도시 간 소통이 원활하게 될 것이며,
본 계획지는 경제적 측면에서 新수도로, 新수도는 문화적 측면에서
계획지로 상호 상승효과를 부여함으로써
중부권은 국토의 중심적 기능을 발휘하며,
이에 따라 본 계획지는 바람직한 국가기간산업의 中核기지가 될 것이다>
이 논리를 진행 중인 공주-연기 행정복합도시 건설에 적용한다면
가로림만 기지는 이 도시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공업특구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세계 최대의 산업기지
이 보고서에 따르면, 가로림만에 대규모 공업특구가 들어설 경우
몇 가지 점에서 결정적 優位(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첫째, 이 공업특구에서 생산되는 물건의 상당량은 수도권에 공급되거나 수출될 것인데,
서울과 가깝고 항만이 좋아 물류비가 아주 적게 먹힌다.
둘째, 노동력도 호남권과 충청권에서 확보할 수 있다.
셋째, 깊은 바다에 면하면서 넓은 평야지대를 갖고 있어 400만 명이 수용될 수 있다
(지금은 800만 명 가능).
개발지역을 표고 80m 이하, 경사도 30% 이하로 한정해도 공업지 약 5800만 평, 주거지 약 6360만 평,
상업 업무용지 약 610만 평, 공원녹지 약 4030만 평, 기반시설 약 2100만 평이 나오고,
자연녹지 등으로 약 1억1000만 평이 남는다.
吳 前 수석은 『현재 한국에서 남아 있는 마지막 要地(요지)이기 때문에 이를 소중하게 써야 한다』
고 강조했다.
1978년 吳수석 팀이 만든 보고서에는 이 산업기지에 유치할 업종을 이렇게 설명했다.
▲자원을 많이 필요로 하는 공업
▲해외 원료 의존도가 높은 공업
▲원자재 및 제품수송에 항만시설을 요하는 공업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높은 공업
▲대규모 공업용수를 필요로 하되 회수율이 높은 공업
이런 기준에 따라 이 산업기지에 유치하기로 한 공장은 세계적인 규모로서 「이슬숲」이란 뜻을 가진
加露林灣이 세계에서 가장 큰 중화학 산업기지가 되도록 계획했다.
종합제철소는 연간 2000만t 생산 능력을 가진 부지 500만 평, 철강 관련산업 부지는 360만 평,
기계공업은 국내 총수요의 37%를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하고 부지는 820만 평,
자동차공장은 年産 50만 대로서 부지는 120만 평, 非鐵금속 공장 부지는 240만 평,
석유정제 업종의 부지는 300만 평, 석유화학공업 시설은 에틸렌 기준 年産 200만t 규모로 하여
부지가 300만 평,
전기전자 공업은 전국 수요의 15%를 감당할 것으로 계산하여 300만 평,
기타 화학공업은 전국 수요의 10%로 잡고 부지가 210만 평이었다.
이 보고서는 「개발전략」 항목에서 가로림만 일대를
「새로운 지역사회를 창조한다」는 개념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계층, 연령별 주민 대다수가 지역의 산업구조에 유기적인 결합을 갖고
적극적인 형태로서 관여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사회를 건설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가로림만 기지의 핵심은 항만이다.
이 거대한 기지에서 연간 발생하는 물동량은 5408만t으로 예상되었다.
이를 처리할 항만은 다섯 개 만든다.
가장 큰 것은 안벽의 길이가 9000m이고, 20만t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수심 20m 항만이다.
이 기지가 필요한 電力은 400만~500만kw로 추정되었다.
현재 한국 전체 전력 생산량의 약 10%에 해당한다.
독립국 수준의 자유지역으로
지금 가로림만 일대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1978년 이후 상황은 吳源哲 수석이 예상했던 방향으로 크게 변했다.
중국의 경제성장, 韓·中무역의 급증, 서해안 고속도로 완공, 공주-연기 지역의
행정중심 복합도시 추진 등으로
충남 서산시를 중심으로 하는 가로림만 일대로 공장들이 몰리고 항만이 확장되고 있다.
28년 전 吳源哲 수석 팀이 가로림 지역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예측했음을 보여 준다.
문제는 현재 가로림 지역 개발이 道와 市, 그리고 기업 단위에서 단편적으로 이뤄지고 있을 뿐이란 점이다.
吳씨가 안타까워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한국에서 마지막 남은 要地인데 이곳을 귀하게 써야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국내의 停滯性(정체성)을 돌파해 21세기의 선진화 비전을 담는
기념비적 프로젝트로 만들어야 할 아까운 공간을 너무 작게, 잘게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산시는 작년 행정도시특별법이 통과되자 서산 일대를 「임해관문도시」로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가로림만권·아산만권·평택 지역에 경제자유지역을 만들고,
건설 중인 대산항(2011년 완공 때 23만 평, 8선 석, 연간 약 590만t 처리)에 이어
가로림만에 25선 석 규모의 항구를 만든다는 것이다.
가로림만권의 대산항은 1991년에 무역항으로 지정되어 현대석유화학 등
油化 3社가 民資(민자)로 개발해 유류전용 부두로 쓰고 있다.
가까운 곳에 자동차 산업지대가 들어서고 서해안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정부는 2002년부터 4374억원을 들여 2011년에 완공할 목표로
컨테이너 처리능력을 가진 항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올해 들어 한화그룹이 瑞山市와 함께 100만 평 규모의 서산 테크노폴리스를 조성해
550개 자동차 산업관련 첨단기술기업을 유치함으로써 2만5000명분의 일자리를 만들고
연간 2조800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여기엔 3조2000억원이 들어간다.
서산시에 따르면 앞으로 5년 동안 기존공장의 증설과 새로운 공장의 입주 등으로
10조원이 이곳에 투자될 것이라고 한다.
吳源哲씨는 최근에 「중부종합공업기지기본구상」을 자주 펼쳐 보면서
朴대통령이 10·26 사건을 맞지 않고 이 거창한 계획을 밀어붙였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본다고 한다.
그는 지금 이 프로젝트를 실천에 옮긴다면 1978년에 계획했던 「산업기지」 개념을 더 발전시켜
거의 독립국 수준의 「자유경제특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加露林灣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20만t 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항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20만t급 선박으로 외국에서 원자재를 들여올 수 있는 산업은 여기서 하라는 겁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 원료공급지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으로 소재를 만들고,
그것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여기서 또 다음 단계 소재를 만들고 하자는 것입니다.
거의 독립국 수준의 자유경제지역으로 만들어 놓고 생필품은 수입 자유화해 생활비,
교육비를 싸게 해줍니다.
외국노동자들을 데려다 써 노임을 싸게 만들면 경쟁력이 최고가 됩니다.
이렇게 잘 돌아가면 자연히 국제금융이 들어와 싱가포르처럼 센터가 되고요.
정부는 데모만 막아 주면 됩니다.
이렇게 해주면 여기에 800만 명이 입주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본토보다도 높아집니다.
3만 달러는 되어야지요. 한국 전체의 GDP 중 30%를 全국토 면적의 1%가 만들어 내는 거지요』
2030년의 가로림 FTS
吳源哲씨는 지금 이 계획이 실천에 옮겨질 경우 25년 뒤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실감을 갖도록 하고 있다.
<우선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한다. 중부공업기지가 완성되어, 가로림 自由經濟特區,
즉 가로림 FTS(Free Trade State)라는 행정구역이 신설되었다.
여기에는 州정부가 있어 국방과 외교는 本國 정부에서 맡고 나머지 행정은 州정부 장관이
통괄하는 체제가 수립되었다.
2030년 가로림 FTS 장관은 현황 브리핑을 이렇게 시작한다.
『가로림 FTS의 기획은 1978년에 작성된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
이라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朴正熙 대통령 시대에 작성된 것인데 당시 행정수도 계획과 맞물려 거대한 공업지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朴대통령 서거 후 25년간 방치돼 오다가,
행정수도 문제가 되살아남으로써 이 문제가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1990년대부터 鄧小平이 집권하고 개방정책을 개시한 후 중국의 경제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황해연안, 즉 大連·天津·靑島,
특히 上海를 중심으로 한 양자강 연안은 日進月步(일진월보), 즉 하루가 다르게 공업화되어 갔습니다.
그 결과 막대한 수출·수입 물량이 발생해서 머지 않은 장래에
황해는 세계 굴지의 물량 集散地(집산지)가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확실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지는 上海港으로 변해 갔습니다.
특히 중국이 10만t급 컨테이너선이 정박 가능한 上海 洋山港을 건설하고 난 후로부터,
그 양상은 뚜렷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만회하고자 부산항 확장 등을 시도했지만,
황해 연안의 중국 항구와는 거리가 멀어서 중국에서 발생하는 물량을 처리하는 데서
차차 上海港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2005년입니다.
원유값이 배럴당 60달러 선으로 급등했습니다.
원유값이 올라가면 갈수록 수송비가 올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수송 선박을 대형화하는 것뿐입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上海港보다 규모가 한 단계 더 큰, 20만t급 대형 선박이 정박 가능한
대규모 항만을 개발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항만 근처에 대규모 공업지구도 설치해야 되겠다」는 데로 의견이 접근해 갔습니다
제2의 싱가포르
세계는 계속 국제화가 이뤄지고 있는데, 당시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이 발생했는 데도,
적절한 대응을 못 하는 상태가 계속돼 나갔습니다. 그 결과 경제사정이 악화돼서,
국민생활이 어려워지고 국민들은 장래에 대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국가발전 방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한 방안으로서 「싱가포르와 똑같은 성격의 자유경제특구를 시범적으로 만들어 실시해 보자」
라는 案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는 가로림 FTS 건설에 총력을 경주했습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나가고 현재는 2030년이 됐습니다.
現 단계는 가로림 FTS의 건설 공사는 모두 끝내고, 그 여건을 싱가포르化하는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FTS에서는 금융·무역·상거래·제조업·병원·학교·종교, 심지어 토지취득, 이주, 출입국 모든 분야가
싱가포르와 똑같이 자유입니다. 사업도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면 됩니다.
그 결과 세계 각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교·병원·은행·기업 등이 속속 입주해 오고 있습니다.
이 가로림 FTS에서는 공용어로 영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공무원은 완전히 국제화된 선진국 수준이며, 능률 면에서나 서비스 면에서 세계 최상급입니다.
경험이 많거나 기술을 갖고 있는 고급 인력도 세계 각지로부터 여기에 와서 일하고 있는데,
단순기능밖에 능력이 없는 노무자도 여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들 노무자의 노임은 각자의 出身國에서 보다 많이 받으면 더는 바라지 않기 때문에,
가로림 FTS에서는 비교적 값싸고 능력 있는 외국 노무자를 필요한 만큼 고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노사문제도 없습니다. 불법행위와 질서유지는 州정부가 책임지고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싱가포르와 꼭 같습니다〉
上海港을 압도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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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행정수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수도권(「2000년대의 국토구상」에서)의 등장. |
한 사람이 『가로림 FTS가 上海港과 비교해서 유리한 점이 무엇이라고 봅니까?』라고 질문하자, 장관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가로림 FTS에서는 本土(본토: 대한민국 전체)로부터 전기를 공급받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전기는 석유에 거의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전기값은 아주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있습니다. 그 외에 LNG나 석탄 등 각종 에너지나 용수도 싱가포르나 上海·홍콩보다 싸게 공급됩니다. 특기할 사항은 그간 수에즈 運河가 확장돼서, 이제는 20만t급 컨테이너선도 수에즈 운하를 사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上海港은 10만t급이 상한선입니다. 가로림 FTS의 경쟁港인 上海의 洋山부두에는 방파제가 없습니다. 풍랑에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上海는 태풍이 자주 통과하는 곳에 위치합니다. 태풍이 오는 계절이 되면 항상 비상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장관은 항만 쪽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저기 컨테이너港의 작업광경을 보십시오. 처리능력이 몇 배로 빨라졌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20만t 배는 떠나고, 다음에는 2만~3만t의 소형선박 여러 척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크레인이 알아서, 야적장에 내려 놓은 컨테이너를 행선지 별로 실어 줍니다. 소형 선박들은 제각기 목적지를 향해 운항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2만~3만t 배들은 주로 중국 선박인데, 중국의 각 지방에서 컨테이너를 모아 싣고
가로림만으로 들어옵니다.
컨테이너를 내려 놓고는, (20만t의 대형 컨테이너선이 세계 각국에서 운반해 온) 컨테이너를 바꿔 싣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20만t 컨테이너선은 母船격이고,
2만~3만t 선박은 子船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가로림 항구는 이러한 중계작업으로써 허브(Hub) 역할을 하는 母港인 것입니다.
이것이 東北亞 허브의 진면목입니다』
장관은 말을 이어 갔다.
『가로림 FTS에서는 원스톱 생산, 즉 OSP(One Stop Production)라는 개념의 체제를
갖춰 놓고 있는 곳입니다.
우선 천연원료는 20만t이라는 초대형 화물선에 의해 가장 싼 금액으로 수송되어 옵니다.
거대한 면적의 야적장이 있으며, 원료나 소재나 부품 등을 저장하는 거대한 창고群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모두 세계 최대급이며 FTS의 자랑입니다.
先物去來(선물거래)도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원료를 가공하는 공장들도 가로림 FTS內에 위치합니다.
필요하다면 컨베이어 벨트로 수송이 가능합니다. 수송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생산되는 소재나 半제품을 가지고, 다음 단계의 작업을 하는 공장도 바로 근처에 위치하게 됩니다.
가로림 FTS는 23개의 공업단지가 있고, 18개의 주민주거용 도시가 있는 공업지구입니다.
모든 작업과 주민들의 생활이 가로림 FTS內에서 이뤄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송비가 적게 들고 작업기간이 단축되어 생산비를 가장 싸게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전기 등 동력비나 노동력의 임금이 다른 곳보다 저렴하다는 것이,
가로림 FTS의 큰 장점이라고는 이미 설명을 한 바 있습니다』
한국 전체가 자유특구화해야
장관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가로림 FTS가 본토에 주는 영향도 막대합니다.
본토 공장들은 천연원료로부터 기초소재·중간소재·중간부품·부속품 그리고 최종제품까지
필요한 물건을 가장 싼 값으로 가로림 FTS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工業들은 과거에는 주로 東南海 지방에 편중돼 있었는데,
가로림 FTS가 가동하고 난 뒤부터는 경기지방(首都圈)부터 호남지방까지, FTS를 母港으로 해서
海上으로 연계되어 서해안 일대의 공업화와 지방발전에 큰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특히 FTS에 새로운 종합제철회사가 설립됨으로써, 제철사업도 경쟁체제로 들어갔으며,
이에 따라 重量物인 각종 철강재를 浦項이나 光陽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공급받을 수 있게 돼
수송비가 인하되고,
철재 값도 싸졌습니다.
다음 순서로는 가로림 FTS의 면적을 점차로 확대해 나갈 것이며,
종국에 가서는 본토 전부에 적용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換言(환언)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FTS 國家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난 후, 북한 땅에도 작용하는 것이 「21세기에 사는 우리 민족이 꼭 이룩해야 할 사명」
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대의 국토구상」
1978년부터 吳源哲 수석은 행정수도 건설 백지계획과 가로림만의 중부공업기지 계획을 세우면서
자연스럽게 1980년대 朴正熙 대통령이 중점적으로 추진할 국토개조 사업의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국토개조 계획은 「2000년대의 국토구상」
이라는 보고서로 만들어져 朴대통령이 죽기 직전에 보고되었다.
朴대통령 국장을 마친 다음 날인 1979년 11월4일 吳源哲을 비롯한 수석 비서관들이
대통령의 유품 정리를 하려고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 전에 없던 간이책상이 눈에 띄었다.
그 책상 위엔 두툼한 보고서 두 권이 놓여 있었다.
표지엔 각각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백지계획」, 「2000년대의 국토구상」이라고 쓰여 있었다.
보고서 옆엔 전기 스탠드가 있었고, 보고서 위엔 돋보기가 놓여 있었다.
朴대통령은 10·26 사건 전날에도 이 보고서를 들여다본 듯했다.
朴대통령이 서거하고 吳源哲 수석이 물러남으로써 국토개조를 위한 세 개의 계획
(「행정수도 건설」, 「가로림만 계획」, 「2000년대의 국토구상」)도 잊혀졌다.
朴대통령이 피살되지 않았더라면 1980년 연두기자 회견에서 발표했을 가능성이 높은
「2000년대의 국토구상」은 행정수도 건설을 계기로 하여
한국의 국토이용 체계를 再편성하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이 보고서는 「고도산업사회를 구축하고 국민총생산의 확대를 위해서는
유한한 국토공간, 국토자원을 합리적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하여야 한다」고 전제하고
「임시행정수도 건설과 병행해 국토 再편성 작업을 추진함이 요구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