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동일 국가수호정책연구소. ⓒ데일리안 민은경 기자 |
“운명에도 없었던 운명으로 인해 그 분에게 비극의 구름이 끼지 시작했다.”
“간첩 활동, 친북·종북활동 하던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 나라의 민의를 대변하고 법을 제정하는 것은 복장 터질 노릇이다.”
백동일 국가수호정책연구소 소장. 우리에게는 지난 1996년 한미 양국 간에 민감한 외교사안으로까지 비화됐던 ‘로버트 김’ 사건의 주역인 ‘백동일 예비역 대령’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로버트 김’ 사건으로 제독의 꿈을 접고 군복을 벗어야만 했던 백 소장은 경기 고양시 덕양구 호국로의 한 건물에 ‘국가수호정책연구소’를 열고 여전히 호국운동을 진행 중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확신하고, 국가 안위와 국민의 의무, 조국, 국민통합에 매진한다는 등의 다섯 가지 행동강령도 마련했다.
25일 경기도 고양의 국가수호정책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난 백 소장은 “32년간 군 생활을 하면서 28년을 대북정보 및 공작 분야에서 일했다”면서 “천안함 폭침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적화야욕은 여전한데 일부 비판적인 세력들이 ‘안보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북한에 대응해서 정책을 수립하는데 기여한 것만으로도 보람차다” 백 소장의 삶은 국가안보, 그 자체였다. 그는 대북특수공작원 양성 등 국군정보사 여단장을 거친 대북정보통이었다.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시절에는 2년간 군 관련 첩보만 1300여건을 접수했으며, 미국연방수사국(FBI)과 미군보안사령부(NSC) 관계자들은 그를 ‘inquisitive officer(꼬치꼬치 캐묻는 장교)’라 부를 정도로 뛰어난 무관이었다.
그의 삶에서 훈장인 동시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된 ‘로버트 김’ 사건도 이런 대북활동 과정에서 발생했다. ‘로버트 김’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아...운명에도 없었던 운명이...모범적인 가장으로 구름 한 점 없는 가정을 꾸며가고 있었는데 나와 접촉을 하면서 그 분에게 비극의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난 1995년 11월 28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해군정보교류회의. 백 소장은 무관 자격으로, 미해군정보국(ONI) 소속 정보분석가였던 김 씨는 미군 측 통역사로 자리를 함께 하면서 운명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다.
백 소장은 김 씨에게 원만한
행사를 진행해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던 중 한국의 정보력 부족을 토로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 씨는 “그 정도로 어려운지 몰랐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처음에는 기밀이 아닌 범위에서 모든 정보를 우편으로 주고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밀문서가 백 소장에게 배달됐다. 문서에는 기밀 표시가 없었지만 내용을 보면 누구든 기밀임을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
◇ 백동일 국가수호정책연구소. ⓒ데일리안 민은경 기자 |
백 소장은 “북한군의 동태, 동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대북군사사항에 관한 정보를 받았다”면서 “DMZ(demilitarized zone, 비무장 지대) 인근 배치된 북한군 경계 현황, 외국으로부터 무기
수출 또는 수입 실태, 북한 주민들의 소요 가능성, 북에 유입되는 식량이 인민군으로 전용되는지 여부 등을 위주로 해서 첩보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에 우리나라는 첩보를 수집할 수 있는 수단이 전무한 상태였다”면서 “휴민트(HUMINT, human intelligence)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 또한 제한적이었다. 미국의 경우 첩보수집수단이 입체적으로 잘 돼 있어서 대미 의존적인 첩보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백 소장과 김 씨는 10개월 동안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백 소장은 “나라를 위해 일하면서도 보상 하나 받지 않았다. 심지어는 정보를 받은 대가로 그 분에게 단돈 1센트도 주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심지어는 백 소장이 식사나 골프를 함께 하자고 권할 때마다 김 씨는 “애들하고 운동하러 가야된다. 북한에 대응해서 정책을 수립하는데 기여한 것만으로도 보람찬데 뭘 더 원하겠냐”며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국을 위해 일한 대가는 혹독했다. 김 씨는 1996년 9월 미국연방수사국(FBI)에 국가기밀취득음모죄란 혐의로 체포돼 9년형과 보호관찰 3년을 언도 받았다.
백 소장도 당시엔
면책특권을 가진 외교관 신분이어서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주미대사관 일을 그만두고 귀국해야 했다. 그는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여러 부서를 전전하다 끝내 지난 2001년 1월 ‘제독’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군복을 벗었다.
백 소장은 김 씨의 최근 근황에 대해 “지난 2005년 10월에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됐고, 한국에도 6번이나 다녀갔다”며 “비록 석방은 됐지만 집안과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전했다.
김 씨는 onI에 18년 동안 종사하면서 납입했던 군인연금과 사회보장연금을 합쳐 매월 2000달러(
한화 약 230만원)로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국내 모 기업 회장의 지원은 2년 전에,
후원회가 마련해준 단층집은 자유의 몸이 되면서 모두 중단됐다.
그나마 ‘로버트 김 서포터즈’에서 두 달에 한번씩 2000달러를 지원해주지만 의료비로 대부분을 소모해 적자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 방문도 비용부담으로 인해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
◇ 백동일 국가수호정책연구소. ⓒ데일리안 민은경 기자 |
백 소장은 “최근에 그 분이
종합검진을 했는데 췌장 쪽에 문제가 발견됐다. 1차 검진에서 암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으나, 종합검진 결과를 기다려봐야 한다”며 “수감생활 중에 받은
스트레스와 피로가 원인인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어 “그 분은
대안학교나 수련원 등을 통해 우리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안보관을 심어주는
교육을 하면서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한다”면서 “하지만 가족들이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유는 조국이 자신들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 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뒤에 겪은 후유증이 너무 크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며 “정부도 이제는 다 끝났으니까 그 분이 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내 나라 안보를 위해 희생하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다” 백 소장은 해군 예편 후에도 “내 나라 안보를 위해 희생하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다”며 국가안보를 위해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로버트 김’ 사건 이후 스트레스로 인한
고혈압,
관절 이상 등으로 고생했고, 최근에는 협심증도 앓고 있지만 한때 해군의 최고 정보장교였던 그의 안보관은 확고했다.
그는 “로버트 김 사건으로 인해 군 생활은 접었지만 머릿속에는 늘 대북공작, 소위 국가안보에 관련된 사항에 현역시절부터 종사해왔기에 떠날 수가 없었다”며 “전역하고 나서도 국가안보에 대한 활동을 계속 해왔다”고 말했다.
예편 이후 국정원 산하
국가정보대학원 초빙
강의를 했다. 지난 2009년 6월에는 해군첩보부대(UDU) 예비역 모임인 ㈔해룡을 결성, 독도수호를 위해 2년간 경북 울진 죽변항에서 독도까지 220㎞를 릴레이로 헤엄쳐 횡단하는 대장정을 이뤄냈다. 독도 횡단에 참여한 단원들의 평균연령은 50세 이상이며, 하루 4~5시간씩 생업도 마다하고 훈련에 참여했다.
최근에는 ‘국가수호정책연구소’도 세웠다. 그는 연구소를 사단법인으로 만들고, 뜻을 같이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모아 제대로 된 ‘안보 싱크탱크’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시스템이 갖춰지면 안보관련 정책보고서를 만들어 정책에 반영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백 소장은 “본격적으로 국가안보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연구소를 세웠으며, 정부산하기관에 가서 안보강의를 하고 지리산 고등학교에 가서도 안보강의를 하고 있다”며 “활동에 대한 경비를 번다는 것은 의미가 없고 그들과 아이컨텍(eye contact, 눈맞춤)을 하면서 서로 교감을 형성하고 공통분모, 동질감을 느끼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
◇ 백동일 국가수호정책연구소. ⓒ데일리안 민은경 기자 |
32년간의 군 생활 가운데 해군사관학교 4년을 제외한 나머지 28년을 대북 정보파트에서 복무한 백 소장은 북한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장거리 미사일 발사, 핵실험 논란 등 최근 북한의 연이은 도발을 두고 ‘안보’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백 소장은 북한의 대남 도발에 대해 “자신들이 국지도발을 해도 우리가 거기에 대한 응징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꾸 도발을 시도하는 것”이라면서 “우리가 당한 도발에 상응하는 피해를 줄 수 있는 목표물을 사전에 선정해두고 상황에 맞게 철저하게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최근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게 북한의 특별작전행동소조가 ‘3~4분 안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방법으로 한방 먹이겠다’고 공언한 것“이라며 ”저들은 말을 한 뒤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시기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다 실행했다“고 우려심을 나타냈다.
앞서 4월 23일 북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특별작전행동소조는 “특별행동은 일단 개시되면 3~4분, 아니 그보다 더 짧은 순간에 지금까지 있어본 적이 없는 특이한 수단과 우리 식의 방법으로 모든 도발 근원을 불이 번쩍 나게 초토화해버리게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백 소장은 “제1연평해전이 끝난 다음에 김정일은 ‘1년 동안 준비해서 응징보복하라’고 했는데 3년 뒤인 2002년 6월에 제2차 연평해전이 일어났다”며 “북한은 말을 하고 나면 반드시 거기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청와대도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구상에 대한민국보다 더 풍전등화,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해 있는 곳은 없다. 우리를 적화시키려고 하는 반대편 집단은 도끼만행, 아웅산 테러,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등 알카에다, 탈레반보다 극악무도한 집단”이라면서 “간첩 활동, 친북·종북활동 하던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 나라의 민의를 대변하고 법을 제정하는 것은 복장 터질 노릇”이라고 분개했다.
백 소장은 특히 “안보는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너와 내가 의견이 다를 수가 없고,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며 “우리나라의 안보를 수호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 그런 사람들을 보면 속이 타고 간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고 안타까움을 비쳤다.[데일리안 = 조성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