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신도마을 협동정신에 큰 감명…朴대통령 '농촌개발 구상' 나와 | ||||||||||||||||||||||||||||
새마을운동을 단순한 '잘 살기' 운동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할 수 있다"는 신념과 "국민 모두 함께 잘 살아 후손에게 좋은 나라를 물려주자"는 철학을 담은 '공존상생의 가치'였다. 역사 이래 국난 극복에 앞장서온 경북은 새마을운동에서도 발상지이자 중흥지 역할을 했다. 또한 '신한류 콘텐츠'로서 세계로 뻗어나가는 '뉴 새마을운동'의 전진기지이기도 하다. 40년 전 이 땅에 새마을운동의 싹을 틔운 경북 청도 신도마을과 포항 문성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새마을운동의 발원과 의미를 재구성해보았다. 아울러 향후 과제 등을 2회에 걸쳐 짚는다. ◆신도마을에서 영감을 얻다 1969년 8월의 어느 날. 대통령 전용열차에 몸을 실은 박정희 대통령은 창밖으로 스쳐가는 농촌 풍경을 보면서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수해 복구 현장 시찰차 부산으로 가는 길. 박 대통령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늘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 농촌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갑자기 박 대통령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리곤 비서진에게 말했다. "님자, 기차 세워!" "예?" 비서들은 당황했다. "내가 뭐 좀 봐야겠어. 기차를 뒤쪽으로 후진시켜봐." 지엄하신 대통령의 분부로 기차가 몇 백m를 후진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박 대통령의 지시로 기차가 멈춰선 곳은 경북 청도의 한 작은 마을이었다. 이름은 신도리. 경부선 철로변에 위치한 이 마을은 1960년대 당시 여느 농촌마을 풍경과 완연히 달랐다. 나무 없이 헐벗은 다른 마을과 달리 뒷산엔 수풀이 우거졌고 집들에 개량된 지붕이 얹혀 있었으며 마을 안길이 시원스레 닦인 모습이 대통령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 대통령의 질문을 받은 마을 사람은 이렇게 답했다. "기왕에 수해로 쓰러진 마을을 복구할 바에야 이 기회에 좀 더 환경을 잘 가꿔서 깨끗하고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어보자고 마을총회에서 결의했지요. 주민들이 서로 자진해서 협동해 이뤄놓은 결과입니다." 박 대통령에게 영감이 스쳐갔다. '그래 이거다!' 박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농민들 스스로 일어서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새로운 형태의 농촌개발 구상이 자리를 잡는다. 그로부터 8개월 뒤인 1970년 4월 22일. 박 대통령은 전국 지방장관회의에서 청도 신도마을 사례를 소개하며 처음으로 새마을운동 구상을 피력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5천 년 묵은 가난을 몰아내도록 그들의 의욕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먼저 농촌의 생활환경을 바꾸는 '새마을 가꾸기 사업'부터 벌여보도록 합시다." 새마을운동이 역사적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근면`자조`협동 자발적으로 됐다 신도마을은 1957년부터 농촌개선사업을 자발적으로 시작했다. 이 마을은 일찍이 노는 사람, 술독에 빠진 사람, 노름하는 사람이 없는 '3무 마을'로 주민들의 협동심이 유달리 강했다. 마을 환경 개선 사업에는 박종태(84`당시 이장) 옹, 김봉영(85`당시 새마을지도자) 옹, 이인우(초대 새마을 지도자`2007년 작고) 옹 등 3명의 역할이 컸다. 토목학을 전공하고 서울과 도쿄에서 사업을 하다가 1957년 귀농해 마을 환경 개선 사업을 주도한 김봉영 옹은 당시를 회고하는 내내 뿌듯한 표정 감추지 못했다. "주민들이 뒷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밀양 등지에 팔았는데 산으로 통하는 마을 어귀 길이 좁아서 지게로 간신히 드나들 수 있었어요. 길만 두 배로 넓히면 우마차가 드나들 수 있겠다 싶어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넓히려면 담장을 뒤로 물리고 감나무도 잘라내야 했다. 주민 반발이 심하리라고 걱정한 김 옹은 주민들이 토론하는 시간에 청도경찰서장을 만나 "마을에 큰 싸움이 날지 모르니 무장경찰 몇 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돌아온 그에게 주민들은 오히려 "도대체 어디 있었냐"고 물었다. 주민 동의가 너무 선뜻 이뤄진 것이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띈 폭 4m, 길이 2.5㎞의 새 길은 이렇게 탄생했다. 내친김에 주민들은 지붕 개량도 시작했고 부엌과 화장실도 뜯어고쳤다. 박 대통령이 직접 지은 새마을노래 중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의 원형을 이미 이 마을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이뤄내고 있었던 것이다. ◆신거역의 추억 신도마을 주민들의 열정은 '없는' 기차역도 만들었다. 당시 청도역과 유천역(밀양) 사이가 너무 떨어져 있어서 교통 불편이 이만저만하지 않았다. 김봉영 옹은 추진위원장을 맡고 역 건설을 밀어붙였다. 철도청을 내집처럼 드나들었고 철도청 관계자와 청도군수, 청도경찰서장을 여관에 불러다 밤새 함께 술 마시며 '로비'를 했다. 8개월 뒤인 1966년 12월 28일 마침내 철도청장의 허가가 떨어졌다. 총공사비 140만원 중 절반씩을 철도청과 주민이 부담하기로 했다. 플랫폼 성토공사는 주민들 몫이었다. 신도1`2리와 인근 주민들이 모여 두 달 동안 등짐으로 흙을 날랐다. 이듬해 6월 11일 신도마을에 간이 기차역이 생겼다. 이름하여 '신거역'. 역 이름은 신도마을과 인근 거연마을 이름에서 한 자씩 따 지었다. 신거역은 근면`자조`협동의 발상지에서 마을 사람들이 진고생 하며 만든 역이다. 이 유서깊은 역은 그러나 교통 수요 부족이라는 이유로 1988년 폐쇄되고 만다. 주민들은 폐쇄 철회 건의서를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새마을운동의 상징처럼 인식된 신거역의 폐쇄는 주민들에게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그런 신거역이 최근 부활했다. 비록 기차는 서지 않지만 지난 8월 기찻길 옆에 다시 지어졌다. 청도군이 신도마을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역을 복원한 것.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신도마을 시찰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대통령 전용열차가 역 인근에 들어섰고, 박 대통령의 동상도 세워졌다. 이중근 청도군수는 "2014년까지 총 111억원을 투입해 새마을 운동 체험과 교육 장소 조성을 위한 농촌테마파크 사업을 추진해 청도군을 새마을정신의 성지로 거듭나도록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김해용기자 kimhy@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매일신문 공식트위터 @dgtwt / 온라인 기사 문의 maeil01@msnet.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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