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착오로부터 배운 경제대통령
⊙ 1964년 장기영 부총리 때 수출지향적 공업화로 방향전환
⊙ 차관 이하 인사는 장관에게 일임, 회의에서는 참석자 의견 경청 후 결단 내려
⊙ 결재와 회의에 시간 낭비 안 해, 사색시간 많이 가지면서 국가발전 위한 ‘그랜드 디자인’ 힘써
⊙ 박 대통령, 현실과 괴리 있는 경제개발계획에 큰 의미 안 둬
金正濂
⊙ 1924년생.
⊙ 일본 오이타(大分)고등상업학교 졸업. 美클라크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 재무부 이재국장,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 재무부 차관, 상공부 차관, 재무부 장관, 상공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주일대사 역임. 현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
⊙저서 : <한국경제정책30년사> <아, 박정희> 등.
광양만 공업단지 예정지를 해상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
내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처음 뵌 것은 1962년 5월 17일, 신당동에 있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였다. 5·16 당시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으로 일하고 있던 나는 그해 10월 귀국 후 중앙정보부 정책연구실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5·16 주체들과는 일면식도 없었던 내가 중앙정보부에 차출된 것은 천병규(千炳圭) 당시 재무부 장관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1962년에 접어들면서 유원식(柳原植) 최고회의 재경위원장은 내게 통화개혁 실무작업을 맡겼다. 유 위원장은 실제 통화개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참고작업이라고 둘러댔다. 내게 그 일이 맡겨진 것은 1953년 제1차 통화개혁 작업에 참여한 경험 때문이었다. 당시 혁명정부가 통화개혁을 추진한 것은 퇴장(退藏)되어 있는 자금을 끌어내 산업자금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과의 첫 만남 자리는 바로 통화개혁에 대한 보고를 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송요찬(宋堯讚) 내각수반, 천병규 재무부 장관, 유원식 최고회의 재경위원장 등이 있었다.
나는 산업자금 조달을 위해서는 통화개혁을 할 필요가 없고, 만일 한다면 충분한 사전 준비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그때까지 금융기관의 고식적 자세, 담보 위주 경영의 타성(惰性) 등을 열거하면서 획기적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해야만 하는 국가적 견지에서 볼 때 통화개혁과 같은 극약 처방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나는 제1차 통화개혁 때의 경험을 들어 미국 원조당국과의 사전 협의를 통한 원조물자 비축과 사후의 원활한 도입이 통화개혁 성공의 필수 전제라고 역설했다.
이 자리에서 다음날 통화개혁에 사용될 새로운 은행권이 부산항에 들어오며, 법령, 공문서, 해설서 등 제반 인쇄 등을 감안해 그해 6월 10일자로 통화개혁을 단행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을 단순히 통화개혁을 위한 참고작업으로만 알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6월 10일 제2차 통화개혁이 단행됐다. 하지만 제2차 통화개혁은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군사정권에 대해 비판적이던 미국이 협조하지 않았고, 통화개혁으로 기대했던 만큼 돈을 끌어내지도 못했다. 사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시행착오로부터 교훈을 얻은 박 대통령
군사정부가 단행한 제2차 통화개혁 직후 은행으로 몰려든 시민들. 박 대통령은 통화개혁 실패 등을 겪으면서 경제에 대해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
통화개혁엔 실패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그때 교훈을 얻었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은 혁명공약에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시달리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립경제 건설에 총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구체적인 정책수단이 없었다. 경제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주위의 자문교수 등이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아이디어를 들고 오면 솔깃해했다. 통화개혁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통해 퇴장자금을 끌어내 산업자금화한다는 정책도 그래서 나왔다. “좋은 위락시설을 만들어 주한미군(駐韓美軍)이 가진 달러를 벌어들이자”는 얘기에 워커힐 호텔을 만들었고, “자본주의의 꽃인 증권시장을 육성해야 한다”는 아이디어에 증권거래소를 만들었지만(1962년 종래 공영제였던 증권거래소를 주식회사로 개편한 것을 말함, 증권파동 이후 1963년 다시 공영제로 전환-기자 注) 그런 것들이 모여 ‘4대(大) 의혹사건’이 됐다.
박 대통령은 5·16 혁명 이후 2년 반 동안 그런 시행착오들을 겪으면서 일방의 얘기를 듣고 설익은 아이디어를 정책화하는 일이 없어졌다. 그 후 박 대통령은 정책을 결정하기까지는 전문가들의 다양한 조언을 얻어 신중하게 결정하되, 일단 결정되면 과단성 있게 추진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도 대학교수들 대신에 1·2공(共) 시절의 경제엘리트들을 쓰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도 이때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박 대통령은 살벌하던 군정(軍政)시대에 군인들 앞에서 할 얘기를 하고, 또 내가 지적한 문제점들이 나중에 현실화되는 것을 보면서, 나에 대해 좋게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수출중심 경제로의 전환
경제정책을 수출지향형 전략으로 전환한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
한일(韓日)국교정상화 교섭이 한창이던 1964년 3월 나는 대일(對日)청구권 대표위원으로 임명돼 일본으로 건너갔다. 실제 임무는 비(非)공식적으로 어업협력자금 및 선박관계자금 교섭 협상을 벌이고 있던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 사장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도쿄(東京)에서 1개월간 같이 지내면서 우리는 시간 나는 대로 우리 경제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1953~54년 미국 뉴욕연방준비은행에서의 연수 및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개설요원으로 1년간 미국에 머물렀고, 1958년에는 미 클라크대학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쳤기 때문에 미국경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공부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 관해서는 1951년 한국은행 도쿄지점 참사로 1년간 근무했고, 한일회담 관계로 1960년에 2개월, 그리고 1964년에 1개월여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일본경제의 부흥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일본경제 관련 서적을 많이 수집하고 읽어 볼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은 소위 ‘산업정책’에 의해 수출지향적 공업화, 특히 중화학공업 부문, 즉 자원의 소모량이 적고 외화가득률이 높으며 수출에서 거의 장벽이 없는 고도공업부문에 치중해 경제발전을 하고 있었다.
이때 나는 장기영씨에게 “우리도 일본처럼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해야 경제가 살 수 있다”고 역설했다. 어느날 장기영씨는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겠으니,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메모 형식으로 정리해 달라”고 했다. 나는 내가 생각해 온 바를 정리해 장기영씨에게 주었다.
1964년 5월 9일 제3공화국 초대(初代) 내각이었던 최두선(崔斗善) 내각이 총사직했다. 그날 오후 늦게 장기영 사장으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入閣)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면서 당면한 주요 경제문제와 그 대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요약해 메모로 작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IMF(국제통화기금)는 매년 우리 정부와 연차(年次)협의를 할 때마다 수입대체산업에 대한 각종 보호정책의 시정, 즉 환율과 금리 현실화, 수입자유화, 관세율 인하 등 ‘시장자유화 정책’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관련 업계의 반발과 우리 산업에 미치는 영향 등을 생각해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나는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시장자유화 정책을 단행해야만 우리 산업의 체질개선과 국제경쟁력 강화가 이루어져 수출입국(輸出立國), 공업입국(工業立國), 더 나아가 지속적 경제발전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은 메모를 작성해 장기영씨에게 주었다.
박충훈 상공부 장관
수출 1억 달러 목표를 달성한 박충훈 상공부 장관. |
5월 11일 정일권(丁一權) 내각이 발족했다. 장기영씨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했다. 이틀 후 장기영씨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자신이 수출지향적 공업화의 필요성, 특히 시장자유화정책의 중요성, 긴급성과 함께 이를 위해서는 경제팀의 일사불란한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해 박 대통령과 정일권 총리의 동의를 얻었으며 경제팀의 인사(人事)에 관한 전권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후 장기영 부총리는 재임 3년 동안 재무부 장관만 5명이나 교체할 정도로 힘을 쓰면서 자유화정책을 밀어붙였다.
그해 6월 나는 장기영 부총리의 천거로 상공부 차관으로 임명됐다. 당시 상공부 장관은 박충훈(朴忠勳)씨였다. 박 장관은 연간 수출목표 달성,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책정된 공장의 순조로운 건설, 각종 인허가 및 승인행정에 따른 부조리 제거를 3대 목표로 내걸었다. 나는 박충훈 장관을 보필해 수출입 링크제 폐지, 수입쿼터 품목의 대폭 폐지 등 수입자유화, 수출특화산업 지정 등을 추진했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수입대체 전략에서 수출지향 전략으로의 전환은 박정희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추진한 것이라기보다는, 국제시장의 흐름에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단, 박정희 정부가 그런 흐름을 놓치지 않은 것은 평가할 만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수출지향적 공업화로의 전환은 박정희 정부가 확고한 의지를 갖고 추진한 것이었지, 시장의 흐름에 피동적(被動的)으로 끌려간 것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의 일본·만주 경험
사실 자주·자립을 강조하고 통제에 익숙한 군인들이 정권을 잡을 경우, 수입대체 정책과 통제경제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제3세계 국가의 군사정권들이 대부분 그런 길을 걸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뿐 아니라 당시 경제학자·관료들은 1930년대 전(全)세계적인 블록경제, 일제말(日帝末) 전시(戰時)경제 아래 형성된 통제경제론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사실상 우리나라에서도 건국 이래 1960년대 초반까지 통제경제 정책을 썼다.
그럼에도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지향 전략으로 전환할 수 있었던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집권 초기 시행착오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제하의 경험을 통해 박 대통령이 일본의 경제발전 과정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경우도 근대화 초기에는 생사(生絲)와 차(茶) 수출부터 시작해 경공업-중화학공업의 단계를 거쳐 일제 말에는 미국 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을 정도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박 대통령은 일제하에서 사범학교 및 일본육사(陸士) 교육, 폭넓은 독서를 통해 이러한 일본경제 발전과정을 알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또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0년대 초, 만주에서는 기시 노부스케(나중에 일본 총리 역임), 시이나 에스사부로(후일 일본 외무장관 역임) 등 일본의 혁신관료들이 중화학공업을 건설하고 있었다. 이때 허허벌판에 공장들이 올라가는 모습을 본 박 대통령은 후일 중화학공업을 건설할 때 ‘우리라고 못할 것이 있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1960년대 중반 실시한 ‘시장자유화’는 오늘날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얘기하는 ‘시장자유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경제정책은 자유경제도, 통제경제도 아닌, ‘박정희식 정부주도 경제’였다. IMF나 IBRD(세계은행)에서 요구하는 자유주의 경제모델로는 후진국 경제가 ‘테이크 오프’(Take-off·이륙)할 수 없었다. 경제가 도약할 때에는 정부가 이끌어 줘야 했다.
예를 들어 경쟁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에서는 독점(獨占)이나 과점(寡占)에 반대한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과 자금으로 산업을 일으키는데,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고 자유경쟁에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와 후일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했던 오원철(吳源哲)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우리 산업이 국제경쟁력을 갖게 되었을 때 문을 열겠다”는 생각이었다.
수출 1억 달러 돌파의 감격
산업체부설학교에서 공부하는 여공들을 격려하는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정부가 수출지향 전략으로 전환한 1964년 11월 30일, 우리나라의 수출은 1억 달러를 돌파했다. 박충훈 상공부 장관은 11월 초부터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유럽 장기출장 중이었다. 그 며칠 전부터 11월 말이면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밤 11시30분 경 “드디어 1억 달러를 달성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모두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나는 이 소식을 지금 당장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할지 여부를 놓고 잠시 고민하다가 청와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부속실 직원에게 “상공부 차관인데, 수출 관계로 대통령께 급히 보고드릴 사항이 있다”고 하자, 박 대통령을 연결시켜 주었다.
―각하, 수출 1억 불(弗·달러)을 달성했습니다.
“정말이오? 1억 불, 1억 불을 달성했단 말이지…. 1억 불, 1억 불…. 정말 수고했소. 상공부 직원들에게 수고했다고 전해 주시오.”
박 대통령은 감격에 겨워 “1억 불, 1억 불”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이날을 기념해 11월 30일을 ‘수출의 날’(지금은 ‘무역의 날’)로 지정했다.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자 자신감이 붙은 박정희 대통령은 “내년 1월부터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매달 열고, 내가 직접 회의를 주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박 대통령은 1979년 서거(逝去)할 때까지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이 회의를 주재했다.
수출진흥확대회의
초기에 수출진흥확대회의는 청와대 본관에서 상공부 관계관들과 무역협회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얼마 후 수출진흥확대회의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외무부·재무부·상공부·농림부·교통부 등 유관 부처 장관, 수산청·해무청(海務廳) 등 유관 청장, 수출조합장, 방직협회장 등 업종별 단체장, 시중은행장 등이 참석하는 회의로 확대됐다. 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과 국회 상공·농수산·교통위원장도 참석했다. 평가교수단이 배석(陪席)했다.
먼저 상공부에서 품목별 지역별 공관별 수출실적을 보고하면, 업계 관계자들이 애로사항이나 건의사항을 이야기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처음에는 대통령과 감독기관 장관들이 있는 자리에서 말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하지만 한번 말문이 터지자 기탄없이 애로사항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로 금융관련 사항이 많았고, 열차수송·해운 등 물류(物流)관련 사항도 빠지지 않았다.
업계 관계자들이 발언하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은 꼼꼼하게 메모했다. 그들의 발언이 끝나면 박 대통령은 관련 부처 장관에게 답변을 지시했다. 그 자리에서 답변하지 못할 경우, 장관들은 “다음 번 회의 때 보고드리겠다”고 말미를 청했다. 장관이 답변을 내놓지 못할 경우에는 배석한 차관, 심지어 국장·과장이 답변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관이나 은행장들은 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관심을 체감하자, 문제해결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업계 관계자들도 대통령이 임석한 자리에서 자신들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자 더욱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지금도 인상적인 것은 그 자리에서 업계 관계자들이 자기 회사의 이익을 위해 무엇인가를 건의하는 일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업계 전체의 이익을 위해 발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끔 경제부처 공무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저녁 식사를 같이 하거나, 막걸리 파티를 했다. 가장 많이 초대받은 부처는 상공부였다. 이 자리에는 상공부 내 상역(商易) 부문과 공업 부문 국·과장들이 각각 5~6명 정도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발언했거나, 청와대에 불러 식사했던 공무원들의 이름을 꼭 기억했다. 부처 초도순시 등에서 그들과 마주치면 박 대통령은 “○과장, 요즘 열심히 하고 있지?”라며 격려했다. 대통령의 관심에 감격한 그들은 물불 안 가리고 뛰었다.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
1969년 10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비서실장 임명장을 받는 김정렴 실장. |
1969년 10월 20일, 내각 총사퇴로 상공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나는 청와대로 불려갔다. 박 대통령은 내게 “비서실장으로 발령 낼 테니 그리 알고 열심히 일해 달라”고 했다. 한국은행·재무부·상공부 등 경제부처에서만 일해 온 내게는 뜻밖의 하명이었다. 나는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전혀 모릅니다. 비서실장만은 적임이 아닙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박 대통령은 “경제야말로 국정(國政)의 기본이야. 경제가 잘돼서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등 따뜻하고 포실한 생활을 해야 정치가 안정되고 국방도 튼튼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1·21사태,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무장공비 침투 등 긴박한 안보상황을 설명하면서 “나는 국방과 외교안보에 치중하지 않을 수 없어 경제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으니, 경제문제는 비서실장이 대신 잘 챙겨 달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경제현안으로 수출증진과 농업개발을 강조했다.
이후 나는 9년3개월 동안 비서실장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보필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는 오일쇼크를 이겨 내면서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하고,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리더십과 관련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사’이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지명하는 국방·내무·법무·무임소장관(지금의 특임장관) 을 제외한 나머지 장관은 비서실장에게 복수(複數)로 추천하도록 했다.
장관 추천시(時) 기준으로 삼은 것은 ▲해당 분야에 필요한 실력을 가졌는지 ▲정치적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사람인지 ▲평판이 깨끗한지 등이었다. 병역이행 여부도 중요한 요소였다. 그 밖에 재산관계나 사(私)생활 등은 따지지 않았다.
비서실에서 추천한 장관 후보자는 90% 정도 받아들여졌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진흥확대회의나 월례경제동향보고회의 등을 통해 장관 후보자의 자질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수 추천이 원칙이었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단수(單數) 추천을 하기도 했다. 1975년 최규하 (崔圭夏) 내각 출범을 앞두고 박정희 대통령은 “특히 의료보장제도 실시, 노사(勞使)문제, 근로자 권익옹호와 처우개선 등 어려운 현안들을 안고 있는 보건사회부 장관 인선에 각별히 신경을 써 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정치·경제·사회적 식견이 높고, 넓고 균형 잡힌 시야를 가지고 있으며, 치밀하고 조직적이며 추진력이 강한 인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수석비서관 및 장관 몇 사람과 상의해 본 결과 당시 국회의원이던 신현확(申鉉碻)씨를 단수로 천거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말 훌륭한 적임자를 추천했다”며 기뻐했다.
차관 이하 인사는 장관에게 일임
농수산부의 업무보고. 박정희 대통령은 각 부처 초도순시 등을 통해 인재를 발굴했다. |
박 대통령은 차관 이하의 인사는 각부 장관에게 일임했다. 서기관 승진부터 차관까지의 인사권을 확실하게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관의 영(令)이 섰다. 장관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으면 출세가 보장되므로 공무원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이렇게 장관에게 인사권을 보장하는 대신, 밑에서 잘못이 있으면 함께 책임지도록 했다.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비롯해 대통령이 주재하는 각종 회의와 초도순시는 박 대통령이 인재를 발탁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런 자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공무원들은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주요 청장의 경우는 박 대통령이 직접 지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징세(徵稅)를 담당하는 국세청장, 밀수를 단속하는 관세청장, 물류를 관장하는 철도청장과 해운항만청장, 노사분규를 담당하는 노동청장 등이 그러했다. 여기서도 박 대통령의 관심사항을 엿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번 능력을 인정한 사람은 오랫동안 썼다. 최형섭(崔亨燮) 과학기술처 장관은 7년6개월,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8년, 김인환(金寅煥) 농촌진흥청장은 11년5개월(1980년 6월까지 근무해 총 재직기간은 12년1개월), 손수익(孫守益) 산림청장은 5년8개월 동안 재직했다. 남덕우(南悳祐) 전 총리는 박 대통령 시절 재무부 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9년3개월 동안 일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었다. ‘잘살아 보자’는 비원(悲願)은 강했지만, 경제전문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경제대통령’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기간 중의 경제성적표를 보자. 1인당 GNP는 1961년 89달러에서 1979년 1510달러로 17배 늘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되던 1962년에서 1979년까지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8.9%였다. 산업구조에서 농림어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961년 39.1%이던 것이 1979년 19%로 줄어든 반면, 광·공·건설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에서 38.8%로 늘어났다. 절대빈곤층은 1960년 48.3%에서 1980년 9.8%로 줄어들었다. 오늘날 한국경제는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건설했던 중화학공업에 의존해 먹고살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대의 사고(思考)를 뛰어넘는 ‘그랜드 디자인’에 능했다. 국도(國道)조차 변변히 포장되어 있지 않던 시절에 고속도로를 생각했고, 경공업을 기반으로 갓 가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중화학공업 건설을 생각했다. 이는 박 대통령이 ‘사색(思索)하는 인간’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세심하게 국정을 챙겼지만, 회의나 서류결재 등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만의 사색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고, 덕분에 국가발전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정치는 내가 걱정할 테니, 장관은 경제를 잘 챙기도록 하시오”
첫째, 박정희 대통령은 회의를 효율적으로 운영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주일에 네 번 정도 중요한 회의를 열었다. 회의 때면 사전에 관련 안건을 읽고 그 내용을 숙지한 후 회의에 나왔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의견을 미리 얘기하지 않았다. 장관들에게 자기 주장을 말하게 하고, 본인은 메모만 했다. 귀로 듣는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컨센서스가 이루어지면 결정을 내렸다. 때문에 회의는 중구난방(衆口難防) 식으로 흐르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운영되었다. 대개 2시간 정도 회의를 하면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1977년 6월 13일 부가가치세 도입 관련 당정회의 때였다. 부가가치세는 1971년부터 6년여에 걸친 준비작업 끝에 그해 7월 1일부터 도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도입시기가 다가오자 중소상공인들을 중심으로 반발 움직임이 일었다. 이듬해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던 공화당에서 반대가 심했다. 국무회의에서는 시행연기론이 강력히 제기됐다.
당정협의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참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나와 김용환(金龍煥) 재무부 장관, 최각규(崔珏圭) 농수산부 장관은 찬성했다. 장예준(張禮準) 상공부 장관은 반대였다. 최규하 국무총리는 연기를 주장했다. 7년 전 재무부 장관으로 부가가치세 도입을 선도(先導)했던 남덕우(南悳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까지 연기를 주장했다. 회의의 흐름은 연기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용환 재무장관에게 “부가가치세를 지금 꼭 도입해야 하느냐”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냐”고 물었다. 김 장관은 부가가치세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역설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단안을 내렸다.
“정치는 내가 걱정할 테니, 장관은 경제를 잘 챙기도록 하시오.”
둘째, 대통령이 직접 결재하는 서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카터 미국 대통령은 하루에 500페이지가 넘는 서류를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미국 역사에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제조업은 영원하다
박 대통령 시절 많은 문제는 차관회의에서 결론이 났다. 중요한 현안들만 국무회의에 올라갔다. 주요 현안에 대해 보고할 때에는 구두(口頭)보고를 많이 활용했다. 내가 대통령께 먼저 요점을 보고하면, 배석한 수석비서관들이 보충설명을 했다.
회의나 서류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은 박 대통령은 주요 국책사업의 진행상황을 수시로 점검하고, 국가를 위한 큰 구상을 하는 데 시간을 쓸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지 32년이 흘렀다. 우리 경제는 그 후로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이제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경제운용과 관련해 아쉬운 점이 있다면 첫째는 정부에서 테크노크라트(technocrat·기술관료)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1980년대 이후 경제기획원 출신 관료들이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잡았다. 경제기획원은 속성상 거시(巨視)경제를 중시한다. 어떤 일이 생기면, 외국 연구기관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한다. 외국의 연구기관들은 선진국 기준으로 연구결과를 내놓는데, 그게 우리 현실과 안 맞는 경우가 많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은 1,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이후로는 경제개발계획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계획과 구체적인 실천 사이의 괴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후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향후 5년간 국가가 지향하는 경제목표를 제시해 주는 비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엔지니어 출신인 오원철 수석은 일을 하면서 한국적 특수성을 살피고, 거기에 맞는 방안을 내놓곤 했다. 이렇게 현실에 발을 디디고 일하는 창의적인 관료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제조업의 중요성을 점점 잊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IT(정보통신), BT(생명공학), NT(나노공학) 등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자·철강·조선·자동차 등 현재 우리나라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산업들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제조업은 영원하다. 많은 제조업체들이 중국이나 동남아로 떠나고 있는데, 정부·기업인·노동자들은 “제조업이 무너지면 우리 경제가 무너진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정리 :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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