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박정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며 부른 독립군가

여동활 2011. 10. 1. 11:04

박정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며 부른 독립군가
 

1.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후렴)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때 까지 싸우러 나아가세

2.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건가 정의의 날센 칼이 비끼는 곳에 이기리 너와 나로다.

3. 너살거든 독립군의 용사가 되고 나죽으면 독립군의 혼령이 됨이 동지야 너와 나의 소원아니냐 빛내리 너와 나로다.

4. 압록강과 두만강을 뛰어 건너라. 악독한 원수무리 쓸어 몰아라 잃었던 조국강산 회복하는날 만세를 불러보세.

   위 노래 가사는 박정희가 만주국군 소위로 복무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을 때 부른 독립군가이다.  

   사실 박정희의 노래로 그 가사와 곡조가 보존된 이 독립군가에는 역사의 애환이 서려있다.  드라마 서울1945에서 조선왕족 이인평은 친일파로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그런 인물은 없었다.  이승만 박사도 왕족이되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것이 그 예이듯이 실제로는 왕족 중에 드라마의 이인평같은 재산가는 없었다.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한일합방 직후 오늘날의 소득 기준으로 600억원에 해당하는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쳐 만주에 독립군 사관학교로서의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신 분이었다. 

 

 그리고 위 영상물에서 보듯 그 신흥무관학교에서 양성된 독립군이 1920년의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박정희가 1944년 여름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되어 독립운동의 날개를 펴면서 불렀던 이 독립군가는 1910년대에 신흥무관학교 독립군들이 불렀던 독립군가로서 1920년의 청산리전투 이후 사라졌던 노래였다.  흘러간 유행가였기 때문에 사라졌던 것이 아니라, 독립군이 전멸하였기 때문에 사라졌다.  일본군이 전멸시킨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에 의해--여운형 및 그를 추종하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러시아에서 전멸당하였는데, 1921년의 이 사건을 가리켜 자유시 참변이라 부른다.

 

   무지몽매한 도올이나 진중권이 주장하는 것처럼 1945년 해방직전에 조선인들이 이데올로기 문제로 싸웠던 것은 아니었다.  독립운동가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이념 갈등이 아주 심했던 때는 1921년이었다.  만약 1945년의 여운형이 보다 사회주의적이었다면, 1921년의 여운형은 보다 투철한 공산주의자였다. 

 

 좌은 공산주의자들을 독립투사와 동일시하지만 실제로는 친일부역자와 공산주의자를 구별할 선이 아주 흐리멍덩하였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면장이었다.  좌빨들의 친일파 감별 기준에서 면장은 친일 부역자였다.  그런데 그가 조선공산당 간부였다.  공산주의 혁명이 곧 독립운동이라는 좌빨들의 논리는 성립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여운형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었던 자유시 참변이었다.  59년후의 광주사태와는 비교도 안되는 이 참변에서 독립군은 완전 전멸당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조선 독립운동사에서 유일한 독립군 사관학교였으며, 신흥무관학교에서 양성된 독립군은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되기 이전 유일한 독립군 정규군, 즉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작전을 벌일 수 있는 유일한 독립군이었다.  광복군조차 단독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으며, 게릴라전을 벌일 준비가 갓되었던 때가 1945년 8월이었다.  그나마 미군이 석달간 훈련시켜 주고 모든 장비를 지원해 주고, 광복군을 수송할 비행기와 잠수함까지 준비하여준 후에야 가까스로 50명을 게릴라전을 위해 침투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실은 그 50명조차 박정희가 일본군으로부터 탈영시킨 학도병들이었다고 광복군 관계자들은 기록한다.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4994&page=4&s=&o=&k= 에도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지난 해 처음 공개한 자료 중 일부가 있듯이, OSS 훈련은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와 책임자인 굿펠로우 대령과 합의가 되어 장석윤 씨 등은 1944년 7월 중경(충칭) OSS지부 설립 작업을 위해 임정으로 갔다.  중경 OSS지부를 우리는 편의상 광복군OSS라 부르며, 극동CIA의 전신이다.  사실, 광복군OSS는 기술적으로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경 OSS지부는 미 OSS 관할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는 중경 OSS지부의 조선인 요원들은 광복군 관할 하에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광복군OSS라는 명칭을 선호하지만 광복군 당사자들은 비밀광복군이란 명칭을 선호했다.  박정희 비밀광복군설에 언급되는 비밀광복군은 실제로 있었다.  이것은 엄연한 팩트이다.

  여기 1940년대의 우리 독립군과 일본군과의 대조적인 전력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두 장의 사진이 있다.

   위 사진에서 태극기 하나 제대로 게양할 형편이 못되었던 독립군 부대가 소총 몇자루로 일본의 이 한척의 전함이나 상대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 아래 빛바랜 광복군 사진이 있으며, 앞줄에서 광복군 지하공작 대원들이 위국헌신할 것을 선서하고 있다.

   광복군 지하공작 대원들, 즉 비밀광복군 당사자들이 그들이 만주국군 군관 박정희를 접선했었다고 기록하고 증언하는데, 어째서 광복군에 전혀 발을 담근 적이 없는 후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사실관계의 확인없이 광복군 당사자들 및 관계자들의 기록과 증언을 무조건 전면 부정한다면 그것은 광복군 전체를 사기 집단 취급하는 것이다. 

 

   광복군은 결코 군단이나 사단 병력의 군대가 아니었다.  초창기에는 50명의 병력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는데, 무엇보다도 군량미가 없었다.  임정의 살림 형편으로는 그것도 큰 일이었다.  그리고 계속 국민당 정부의 보조금으로 군대를 유지하여서는 독립군 위상이 서지 않기 때문에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 교회 등 몇몇 해외 교포들이 송금하는 군자금으로 유지하여야 했다.  연합국에 독립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병력이 적었던 광복군이 1944년 7월에 갑자기 세계 최강의 군사강대국 미국의 동맹군으로 격상되었던 이유는 대일본군 첩보전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때가 박정희가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되었던 때였다.

 

   모든 장비와 비용은 미국이 담당하기로 하고 미국이 바라는 것은 군사기밀첩보 그리고 첩보전과 게릴라전을 위한 200명의 요원이었다.  이것이 임정에 도약의 기회요, 또한 어려움이었다.  어디서 갑자기 200명을 모병하는가?  유일한 방법은 만주국군 조선인 군관들의 협조를 받는 것이며, 일본군 내 학도병들을 대상으로 모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임무를 김학규 3지대장에게 맡겼다. 

 

이 시기의 독립운동사를 잘 모르는 이들이 박정희가 광복군 중위로 임명받은 과정에 대해 곡해하고 있다.  이미 광복 여러 달 전에 광복군은 승패를 만주국군 내 조선인 장교 접선 및 일본군 학도병을 대상으로 하는 모병에 두고 있었다.  미국의 한반도 상륙 및 침투 작전이 초읽기로 들어간 때에 임정과 광복군으로서는 미국이 원하는 병력 확보가 최우선 과제였으며, 최소 50 명이 4월까지 필요했다.  광복군 당사자들은 그 50명을 박정희가 보낸 것으로 여기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문경보통학교에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다가 불온교사로 찍혀 면직당한 박정희가 만주국에서 어떤 제복을 입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무지한인들과 사기꾼들이 우기는 것처럼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는가? 아니었다.  아래 사진은 만주국군 내 조선인 군관들에게 독립군가를 보급하던 당시의 박정희 소위의 모습을 보여준다. 위 동영상 2:15-2:24 에서 좌파방송은 마치 이 제복이 일본육사 사관생도 제복인양 시청자들을 우롱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일본육사생도가 아니라 만주국으로부터 위탁교육을 받은 유학생이었으므로 일본육사 내에서도 늘 만주국군 군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훗날 대통령이 된 후에도 만주국군 군관시절 음악을 독립운동에 활용하던 그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다.  월남 파병 때는 "맹호부대"를, 경제 개발을 시작할 때는 "잘살아보세"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하여 보급하였으며,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때는 "새마을운동"을 작사, 작곡하여 보급하였다.  아래 동영상에서 우리는 그가 만주국군 군관시절 애창하였던 독립군가가 그가 작사, 작곡한 "나의 조국"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본다.

   그런데, 훗날 박정희가 작사, 작곡한 독립군가와 달리 독립군가는 훗날의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 장군이 지청천이란 이름을 사용하며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으로 재직하였을 때 지어진 노래이다.  독립군가는 사실상의 신흥무관학교 교가였으며, 이청천 장군의 독립운동 정신이 잘 반영된 노래이기도 하다.  여기에 1921년의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전멸한 후 이청천 장군 외에는 기억하는 이가 없었을 독립군가를 어떻게 박정희가 알았느냐의 질문이 있다. 

 

광복군 첩보 기록은 1939년 3월 김구 선생이 청년 박정희에게 만주군관학교 지원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의 동료 교사 유증선이 해외 여행중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광복군 첩보원 김정균의 기록은 충분히 그 개연성이 있다.  그의 기록의 정확성에는 의문이 있으나, 김구가 이청천 장군에게 박정희 청년 칭찬을 했음을 시사한다.  분명히 박정희는 청산리전투 참전자로부터 독립군가를 배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희 청년이 1939년 3월 김구 선생과 이청천 장군을 만났음을 기록하고 시사하는 김정균의 기록을 신뢰할 때 그 설명이 쉬워진다.

 

   여기 1945년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비밀광복군이었음을 서술한 세 권의 책이 있다: 왼편부터  ‘광복군’(1967년), ‘창군전사’(1980년), ‘육사 졸업생’(1984년).  비밀광복군설의 원전인 "광복군"은 광복군 박영만이 1967년 저술한 책인데, 박정희 대통령이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동안 무시되어 왔다.  아래 이 책 내용 두 쪽이 보이는바, 지은이는 상당히 뜨거운 마음으로 한 줄 한줄을 쓴 것이 분명하다.  "...마음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군이자, 한국 광복군이 된 박정희!"  저자가 박정희 마음 속을 들어가 볼 수는 없는 것이기에 이 책은 소설이다.  그리고 박정희 대툥령의 눈에 거슬렸을 두가지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박정희는 만주국군 소위였음에도 일본군 중위로 언급되어 있다.  오늘날 무지한 이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를 광복군 출신 박영만도 범한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소위 소속 부대는 철석부대가 아니었에도 부대명이 오기되어 있다.  이것이 박정희 연구가르들을 혼동시켜 온 이 책의 치명적인 오류이다. 

   그러나, 이런 두가지 치명적인 오류에도 불구하고 옥석을 가려야 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때에 조선의 신태양악극단이 만주국군 부대 위문공연갔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2월 9일 광복군 공작원 이용기가 박정희에게 광복군 밀서를 전한 것도 사실임이 확인된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8월 21일 박정희 소속 부대의 조선인 장교들, 즉 신 현 준 (만군 상위), 이 주 일 (만군 중위), 박 정 희 (만군 중위), 윤 영 구 (일군 소위 학병 출신) 등 네 명을 북경의 광복군 제3지대로 안내하여 그날로 박정희가 제 2중대장으로 취임케 한 이가 이용기였기 때문이었다. 

 

 만주국과 중국의 영토는 끝없이 광활한데, 8단에서 중국족에 의해 무장해제당한 박정희 일행은 최단거리로 정확하게 광복군 제3지대로 찾아왔으며, 박정희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본 광복군 제3지대 지휘관들은 그 즉시 그에게 중책을 맡겼다.  당시 광복군은 제1지대와 제3지대 양지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두 날개 중 하나인 제3지대 주(駐)핑진(平津) 대대 제 2중대장이란 중책에 박정희를 취임케 한 것은 임정과 광복군 총사령의 사전 승인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20년 이후 사라진 독립군가를 박정희가 알고 애창하였다는 사실은 분명 그 어느 시점에 박정희와 독립군 사이에 접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백범 김구 선생 역시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가 광복군에 아주 큰 공헌을 하였음을 증언한다.  다음은『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한 단락이다: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이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1944 년』 광복군은 연합국의 첩보전 및 게릴라전 요원 양성 훈련을 위한 50 명의 병력을 늦어도 4월까지 확보하여야 했다.  만약 못하면 광복군은 유명무실한 독립군으로 연합국의 비웃음을 사게 될 판이었다.  그런데, 그때 50 여명의 학도병이 광복군 제 3지대를 찾아왔는데, 광복군들은 박정희가 보낸 것이라고 기록하거나 증언한다.  적어도 객관적으로 분명한 것은 광복군이 박정희에게 밀서를 보낸 직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박정희 단독으로 그 일을 했다기보다 만주국군 내 조선인 군관들이 협동하였을 가능성이다.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사실이 박정희가 독립군가를 부르던 비밀모임, 즉 조선인 장교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모인 모임이 있었다.  대구사범학교 1기생으로 박정희의 대선배이며, 독립운동가 출신으로서 광복군에 대하여 해박한 송남헌은 공교롭게도 박정희 죽이기에 앞장서는 강만길이 추앙하는 인물이다. 

 

송남헌 본인이 5.16군사혁명 직후 2년간의 옥살이를 하였으니 그가 어떤 입장인지 알만하다.  그럼에도 사실은 사실이다.  1967년 광복군 박영만이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들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박정희 중위는 독립군이었다고 기록했다면, 1985년 전혀 다른 입장의 송남헌 역시 박정희 중위는 독립군이었다고 기록한다.  만주국군 내 조선인 장교들이 1949년 8월 29일 국내진공을 위한 비밀 거사 계획을 갖고 있었으며 박정희도 참여하였음을 그는 그의 저서 "해방 3년사" 26쪽에서 아래와같이 기술한다:

 

<<일본군의 조선출신 장교로서는 당시 최고 계급이던 일본군 육군 중장 홍사익(남방전선으로 전출되기 전까지)과 상호 긴밀한 유대를 견지하고 만주국에 군적을 둔 조선출신 장교를 상당수(60-70) 규합하여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군과의 연계를 도모하였다.

그런 한편 그는 일본 관동군의 주력부대가 남방전선으로 이동하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패전이 결정적으로 예견된 1944년부터 위에서 말한 조선출신 장교와의 연계를 한층 강화하는 동시에 일본군의 기밀작전 지도를 탈취하여 엄밀한 계획을 수립한 후 한달에 한번씩 비밀회합을 가지면서 관동군의 주력이 남방으로 이동한 허점을 이용하여 만주에 산재한 독립군과의 결합과 인근주재 부대의 통합으로 약 1개 사단병력을 편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군사편성을 모의하고 1945년 8월 29일 국치일을 기하여 국내진공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일본의 항복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어 만주에서의 박승환을 중심으로 한 조선출신 군인의 국내 진공계획은 유감스럽게도 좌절되고 말았다. 이 국내진공에 관한 비밀 거사에 참여한 바가 있었던 조선출신 군인 가운데는 박정희 전대통령도 있으며>>

   이렇듯 그 비밀 거사 준비 모임 때 박정희가 불렀던 독립군가 4절 "압록강과 두만강을 뛰어 건너라. 악독한 원수무리 쓸어 몰아라 잃었던 조국강산 회복하는날 만세를 불러보세"를 실행에 옮기려던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만주국 여러 부대의 조선인 장교들이 한 달에 한차례씩 모일 때마다 박정희가 독립군가를 불렀을 때의 분위기를 그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어떻게 보고 느꼈는지 몇마디 인용하며 이러하다:

 

<<그는 1기생 이기건에게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입니다" 라고 되풀이하여 말하곤 했습니다. 한국인들끼리 술자리 모임에서 어느 날은 벌떡 일어나 "선배님들, 이런 노래 모르시지요." 라며 주먹질을 하면서 독립군 노래를 불렀습니다. 박정희의 친구인 이한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가끔 둘이 만나면 조국의 비통한 현실을 개탄하면서 같이 울기도 하고 결심을 밝히기도 하였다. 우리 사이는 혈우라고 할 만했다"고 기록한다.

 

만주군관학교시절 선배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박정희에게 '자네는 왜 여기 왔는가'라고 물었 을 때, 박정희는 "왜놈 보기 싫어 왔소''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박정희는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 입니다"라는 말을 여러번 되풀이했다고 합니다. 이섭준에 의하면, 박정희는 특히 2.26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합니다. 박정희는 "이런시대에 우리가 배울 것은 군사학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독립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 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고 했다고 합니다.>>

   훗날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산업첩보전을 위한 국사 논의는 으례 술자리에서 했는데, 그 이유는 각국의 첩보원 접근이나 도청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그 방법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박정희는 조국광복의 방략을 의논할 때도 술자리를 이용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1945년 4월 박승환,박준호,이상열,최창륜과 나는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때 봉천비행단에는 박임항과 최창륜이 있었는데 최창륜 이 2기 대표로 박정희를 추천했다. 나의 계급은 만군대위였고 그는 소위 시절이
다. 박정희는 반벽산(半壁山)에서 근무했고 나는 그곳에서 가까운 금주헌병대에  있었기 때문에 몇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신랄히 비판하며 오래가지 못할 것 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조국광복의 방략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역땅에서 향수를 되씹으며 서로의 회포를 털어 놓았다. 그는 만군 제 8단의 일 본인 장교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조국광복운동에 참여했다.

박정희가 만군에 있을때 조선의 독립군과 연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고 학자 들 간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나 그당시 우리는 비밀활동을 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 러나지는 않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것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독립 운동단체이다.>>

 

   문용채의 증언의 사실성은 중국인으로서 박정희의 동기생이었던 고경인씨의 증언으로 확증된다.  아래 사진에서 신경군관학교 예과 졸업(1942년 봄) 당시의 고경인씨(왼쪽)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은 1997년 모습.  참고로, 만주국에서 만주족과 한족이 입장은 서로 크게 달랐다.  만주족은 만주국이 한족으로부터 완전 독립할 날을 기다렸던 반면, 한족은 한족(중국인)이 만주를 재지배할 날을 기다라고 있었다.

   박정희의 친일 행적을 입증할 자료를 찾아내기 위해 오랜 세월 많은 여행을 하였던 정운현 기자가 1997년 라스베가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이자 해방 때까지 박정희와 같은 부대 옆자리에서 근무했던 인물이었던 까닭이다.  박정희가 북경에 도착한 직후 광복군 중대장이 되었던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고씨는 밀운에서 박정희와 헤어진 정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얼마 뒤 밀운(密雲)의 한 여관에서 박정희 일행 3인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한 달 이상 머물다 10월 중순경 북경으로 떠났다. 박정희는 헤어지면서 경상도 선산 고향집 주소를 써주면서 한국이 독립하면 서로 왕래를 하자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수중에 있던 돈 385원을 건넸는데 그는 자기가 신고 있던 장교용 붉은 장화를 대신 벗어주더라.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면 건국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박정희는 고국으로 돌아가면 건국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는 중국인 친구의 증언은 박정희가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위원회에 만주군관학교 2기 대표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항간에서는 박정희가 해방후에 광복군에 임명되었다고 주장하나, 이미 그는 2월 10일 광복군 장교로 임명을 받았다.  그래서 만주국군 계급이 광복군에서 그대로 인정되었던 것이며, 박정희의 근무지도 8단 인근지역명 평진을 그대로 따서 "주 평진 대대"라 명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김학규 장군과 박정희 일행을 조선에서 새로 건국되는 나라의 국군 창설의 주체로 삼는 다는 것이 상해 임정의 계획이었다.  만약 박정희가 즉시 귀국하였더라면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하였을 것인데 중국에서 9년을 허비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상관 김학규 장군이 열병으로 병석에 누워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일행은 귀국할 수 없었다.  10월에 먼저 환국한 김구 선생이원래 계획대로 임정이 건국 주체가 되게 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이듬해 4월 결국 광복군이 해체되자 5월에 박정희가 비로서 광복군 귀국선에 몸을 싣게 된 것이었다.

 

   1935년 해방 직전에는 범독립운동세력이 이승만파, 김구파, 여운형파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박정희가 광복군 임명장을 받은 것도 사실이고 조선건국동맹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에게 중요한 것은 범독립운동세력이 공유하였던 조국 광복의 목표였다.  박정희 편에서는 그 목표와 희망을 공유하였을 뿐이었겠으나, 광복군 시각에서는 광복군 임영장을 전달했기에 그를 비밀광복군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림 파일로 캡쳐된 위의 문건에서 보듯 장창국 저 '육사 졸업생’ 26쪽이 그 장면을 세밀히 묘사한다.  여기서도 두어가지 오류가 관찰된다.  박정희는 8단에서 근무했는데 왜 7연대로 언급되는가.  또 2월 9일 현재 박정희는 아직 소위였는데 왜 중위로 언급되는가.  그럼에도 신태양극단이 그 무렵 만주국군 부대 위문공연을 간 것이 사실임 등 사건 정황은 정확하다.

 

   그 날 1945년 2월 10일 부대간부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독립군가를 불렀던 박정희는 독립군가에 얽힌 사연, 즉 그 군가는 신흥무관학교에서 부르던 군가였음을,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 시절 지청천이란 이름을 사용하셨던 이청천은 일본육사 출신이요, 그분이 바로 광복군 총사령관이심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 소위에게는 그 임명장은 큰 의미가 있었다. 

 

 위 기록대로라면 박정희의 상관 신현준 대위 역시 그 임명장을 받았으나 이청천이 누군지 모르던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밀과 보안이 중요했기에 신대위는 곧 그 일을 잊었다.  그러나 광복군 비밀요원 경력을 근거로 신대위 역시 8월 21일 제3지대 주(駐)핑진(平津) 대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신대위는 이청천이란 이름조차 잊어버리고 있었을지 모르나 광복군 편에서는 이것은 진지한 문제였다.  그리고 광복군 제 3지대에는 만주국군 조선인 장교들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절대로 신임하였다.

 

   자, 김학규 장군이 박정희를 제 2중대장으로 임명하던 즈음에 임정과 광복군 거물 김원봉은 제 2지대장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국내 진공 작전에 공산주의자 김원봉을 참여시킬 수 없다는 김학규 장군의 건의 때문이었다.  의열단 단장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들 세계에서 거목이었던 김원봉이 신원문제로 해임되던 때에 박정희 일행이 특채되었다.  이는 박정희 일행에 대한 김학규 장군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실이다. 

 

   박정희가 만주국군 군관시절 불렀던 독립군가를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여태껏 까맣게 모르고 있다.  1920년 이후 사라진 독립군가--이것이 이 독립군 노래에 얽힌 애환이었다.  그리고 그 애환은 공산주의 이념을 최우선으로 삼는 자는 결코 독립운동가가 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1921년 여운형 인맥의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이념을 독립운동의 가치보다 우선하였기에 그 결과는 공산주의 이념을 거부하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을 러시아 적군의 힘을 빌려 처형하거나 숙청한 자유시 참변이었다.  

 

   1921년 독립군끼리의 이념 분열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독립군이 전멸당한 자유시 참변의 비애와 유사한 비애를 박정희는 광복군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경험하였다.  아래는 12월 8일 광복군 군의관 엄재완과 신부 나상복의 결혼식에 들러리로 참석한 박정희 중대장(신랑으로부터 왼쪽 두번째) 사진이 있다. 신랑 바로 왼쪽은 윤영구(제3중대장).  결혼식은 1945년 12월8일 북경의 한 교회에서 치러졌다.  그리고 이틀후 박중대장은 비애를 맛보았다.

 

   해방 후에 바로 시작된 좌우익 대립은 광복군 내에서도 싹트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밤을 새워 사상논쟁을 벌이고 중대장 박정희의 명령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박정희를 중대장동무라고 부르며 시비를 걸어오는 연안계 부대원들의 도전을 받는 일도 있었는데 그때 박정희는 “동무가 뭔가? 내가 자네 동무란 말인가?”라며 반박했다.  그리고 위의 결혼식 참석 이틀 후였던 1945 년 12월 10일 오전 11시 경, 광복군 평진대대는 야외훈련중 무장한 중국군부대의 습격을 받고 전원 체포되고 북신교(北新橋)의 막사까지 연행되어, 부대원들은 모두 해산되고 간부들은 영창에 감금당한다. 몇 시간 뒤 모두 풀려났지만 부대내에 침투한 연안파(延安派 중국 공산당계)의 모함의 결과였음이 판명된다.  이 사건은 광복군의 치욕이요, 군인으로서의 박정희 치욕이었다.

 

   그럼에도 조국을 위한 박정희의 씩씩한 노래는 계속되었다.  군인으로서의 박정희의 가치는 화랑의 옛정신이었다.  독립운동시대와 군사건국기에 필요했던 화랑의 옛정신이 경제건국기에는 새마을정신으로 승화되어야 했다.  그것을 박정희는 그가 작사, 작곡한 "나의 조국"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백두산의 푸른정기 이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의 높은기상 이겨레 지켜왔네
무궁화꽃 피고져도 유구한 우리역사
굳세게도 살아왔네 슬기로운 우리겨레

영롱한 아침해가 동해에 떠오르면
우람할 손 금수강산 여기는 나의 조국
조상들의 피땀어린 빛나는 문화유산
우리모두 정성다해 길이길이 보전하세

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새마을 정신으로
영광된 새 조국에 새역사 창조하여
영원토록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세

(2009년 12월 2일 작성)   
  


☞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음을 입증한 김대중

만주국군 군관 박정희는 광복군 첩보장교였다

조작으로 판명된 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