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서로돕자…잘살자” 수로 내고 2모작… 알고보니 새마을운동

여동활 2011. 1. 18. 10:36

 

“서로돕자…잘살자” 수로 내고 2모작… 알고보니 새마을운동

 



‘한국에서 온 영웅’ 2년 전 트라페앙스나오 마을에 파견돼 서로가 서로를 돕는 품앗이형 원조사업으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한국에서 온 영웅’이라는 칭찬을 듣고 있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소속 김광욱 단원이 아이들과 함께했다. 1981년에 태어나 가난과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이 신세대 청년은 “가난한 이웃나라 사람들을 도우며 내가 얼마나 행복한 나라에 태어났는지를 알게 돼 새삼 애국심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photolink
《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동북 방향으로 차를 타고 80km를 달리면 바테이의 트라페앙스나오 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까지 들어가는 길은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어서 차가 다닐 때마다 먼지를 뒤집어써야 했다. 논과 밭 사이에 나무로 얽어놓은 집이 겉보기엔 한국의 옛날 농촌 모습과 비슷해 보였지만 상황은 더 심각했다. 앙상한 몰골의 돼지 닭 개들이 힘없이 돌아다니는 가운데 언뜻 보아도 병약해 보이는 맨발의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비쩍 마른 주민들의 옷차림에는 ‘가난’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

낯선 외국인을 보자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콴욱 콴욱’ 하는 소리가 들린다. 2년 전 이 마을에 와 주민들의 삶을 180도 바꿔 가고 있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소속 김광욱 단원(30) 이름을 부른 것이다. 그들에게 한국은 곧 ‘김 단원의 나라’와 동의어였다. 주민 1200여 명 250가구가 살고 있는 이 마을에서 그는 ‘영웅’으로 불리고 있었다.

김 단원은 2009년 4월 지역사회개발분야 봉사단원으로 이곳에 파견됐다. 그는 마을에 온 첫날 호기심 반 경계심 반으로 쳐다보던 주민들의 눈초리를 잊지 못한다. 며칠 동안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마을 어린이들의 피 묻은 발바닥이 생각났다. 모두 흙길을 다니느라 발바닥이 피투성이였다. 그로부터 6개월간 김 단원의 일과는 구급약 가방을 챙겨 마을로 출근하는 것이었다. 주민들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보건소가 7km 이상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보건소까지 간다 해도 돈이 없어 뼈가 보일 정도로 큰 상처가 나도 간단한 소독약조차 바르지 못하고 있었다.

김 단원은 자신이 배운 간단한 의료지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벅찬 상처를 입은 환자들은 사진을 찍어 서울의 아는 의사들에게 묻는 식으로 치료를 했다. 주민들이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이제 뭔가를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시급한 일이 식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마을에는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우물이 하나도 없었다. 우물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어서라기보다 심리적인 요인이 더 컸다. 30여 년 전 지식인과 부르주아 반동을 제거해야 행복한 농업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광기()에 빠졌던 크메르루주 정권이 200만 명을 고문하고 죽인 킬링필드의 체험은 이 마을사람들 머릿속에도 남아 공동체의식을 마비시켰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면 절대 나눠 먹는 법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이 팍팍했다”고 김 단원은 전한다. 마을 곳곳엔 고장 나 버려진 우물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외국 구호단체에서 만들어 놓고 간 것들이었다.

김 단원은 우물이 대부분 고가의 수입펌프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단순한 부품교체에도 100달러 이상이 들어 주민들은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는 지속가능하게 쓸 수 있는 우물을 만들기로 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우물 파기. 우물 하나에 10가구가 사용하는 것으로 해서 250여 가구를 묶어 24개 소공동체를 만들었다. 각 소공동체는 어느 위치에 우물을 만들지, 누가 관리를 할지 등 모든 사항을 스스로 결정하고 직인까지 찍어 문서를 남겼다. 굴착에서부터 식수 검사까지 모든 일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하게 했다. 김 단원은 “처음엔 할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던 주민들을 설득하는 게 가장 힘들었지만 나중엔 서로 돕는 것이 결국 자기를 이롭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주민들도 너도나도 나섰다”며 “우물 파기 품앗이로 공동체성을 회복한 게 가장 큰 소득이었다”고 말한다.

캄보디아인이 보는 한국
“코레!” 돈보다 마음 다하는 원조에 감사… “코레!” 수자원 등 개발 마스터플랜 각광



바테이의 총 마을 사람들이 마을회관 앞에 모여 ‘한국 최고’를 외치며 환한 표정으로 엄 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한국의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마을회관도 새마을운동 원조 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 것이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총(chong) 마을로 향하는 두 시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우리나라 경부고속도로에 해당하는 주요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요철이 심해 차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할 정도로 참담했다. 거리에 풀을 뜯어먹는 소들은 하나같이 뼈만 앙상해 ‘소가 아니라 말()인가’ 의심할 정도였다. 이 나라가 인구 36%에 달하는 460만 명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최저빈곤상태(월드뱅크)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어느덧 마을에 닿았다. 바테이 삼보에 위치한 이 나라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이 마을은 한국 농어촌공사가 2006년 12월부터 2008년 11월까지 한국식 새마을운동을 펼쳐 180도 바꾼 곳이다. 확성기에서 노래가 울려 퍼지는 것도 옛날 한국 농촌에서 보던 풍경이다. 마을개발위원장 미엣 남 씨(65)는 “한국의 도움으로 바뀐 생활의 변화란 게 말할 수 없이 크다”면서 ‘코레 코레’를 연발했다.

1991년 3만 달러로 시작된 대()캄보디아 무상지원은 97년 양국 외교관계가 재개되면서 매년 급증해 2008년 1311만 달러까지 늘었다. 2002∼2008년만 놓고 보면 한국은 일본 미국 중국 프랑스에 이어 캄보디아에 8번째로 큰 공여국이다. 그런데 캄보디아 사람들이 한국을 보는 눈은 그 이상이다. 마음을 다하는 원조, 정을 주는 한국형 원조를 이들도 진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총 마을 개조 작업을 도운 농어촌공사 해외사업팀 안성수 팀장은 “미국 일본 유럽은 원조규모나 시스템 면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많지만 이처럼 마을 한 곳을 대상으로 그 마을이 원하는 총체적인 것을 세세하게 돕지는 못한다”며 “맞춤형 밀착형이 한국형 원조의 특징”이라고 전했다.

훈센 총리는 공개적으로 정책 벤치마킹 대상으로 한국을 꼽고 있다. 이는 고위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캄보디아 농촌개발을 총괄하고 있는 농촌개발부 사오 시보안 차관(42)은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꼽았다.

이 나라에서 또 한국형 원조가 각광을 받는 대목은 개발계획 마스터플랜 원조. 2008년 한국수자원공사는 KOICA 무상원조금액 13억 원을 받아 기술진 100여 명을 동원해 수자원개발 마스터플랜을 짜줬다. 캄보디아 전역을 다니며 수자원 현황을 정밀 분석한 것. 현장 실측을 바탕으로 강 유역에 따라 지역을 나누고 사용량 저수량 유수량을 분석해 향후 물이 얼마나 필요한지, 가용할 수 있는 수자원은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주고 부족할 경우에 대비해 어디 어디에 댐이 필요하다고 조언하는 프로젝트였다.

수자원공사 이경환 팀장은 “이 나라 사람들은 자기네 나라에 뭐가 어디에 얼마 묻혀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행정력이 뒤떨어진다. 중·장단기 개발마스터플랜을 짜는 것은 그리 큰돈이 들어가는 원조사업이 아닌데도 받는 쪽에선 매우 필요한 분야라 인기가 높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