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47년 전 派獨 광부, 그들을 아십니까?

여동활 2010. 12. 22. 09:24

47년 전 派獨 광부, 그들을 아십니까?

입력 : 2010.12.22 03:02

300여명, 처음으로 한자리 모여 회고… "우리들 땀과 눈물 기억해주길"
"온갖 설움 딛고 일한 청춘, 조국 근대화 밑거름 돼…" 기억 더듬다 눈시울 붉혀

"지하 1000m,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지하 막장에서 우리 파독(派獨) 광부들은 목숨을 걸고 탄(炭)을 캤습니다.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이 독일을 방문하셔서 석탄가루 묻은 우리들의 검은 손을 붙잡고 '건강하게 일 잘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을 때 우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김태우(70)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장이 2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파독광부 최초 파독 47주년 기념 특별강연 및 총회'에서 박 전 대통령의 독일 방문 당시의 감회를 얘기하자, 자리에 앉아 있던 60~70대 참석자 300여명이 눈시울을 붉혔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목소리도 들렸다.

2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파독광부 최초 파독 47주 년 기념 특별강연 및 총회’가 열렸다. 외화 획득을 통한 경제개발의 주역 가운데 하나였던 파독 광부 출신 인사들이 어려웠던 시대를 숙연하게 회고하고 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지금은 머리에 서리가 앉고 주름진 얼굴엔 검버섯도 피었다. 젊은 시절이던 1963년 12월 광부와 간호사로 서독에 갔던 이들이 독일 파견 47주년을 맞아 한자리에 모였다. 김 회장은 "수백명이 대규모로 모인 것은 처음"이라며 "당시 못살던 우리나라가 지금은 G20 정상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선진국이 되기까지는 우리 파독 광부들도 밑거름이 됐다는 자부심에서 모임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1960년대 한국은 최빈국 중 하나였다. 당시 정부는 독일에서 상업차관 3000만달러를 빌려와 경제개발을 하려 했지만, 차관을 보증할 수단이 없었다. 결국 독일에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수출하고 이들이 버는 봉급을 담보로 차관이 가능했다. 이에 따라 1963년 12월 21일 최초 247명이 독일로 떠난 데 이어 1977년까지 7968명의 광부와 간호사 1만2000여명이 독일로 파견됐다.

고려대 경제학과 3학년에 다니다가 광부가 된 김태우 회장은 "당시 국제사회에선 '전후 한국의 경제 재건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했다"며 "우리 또한 먹고살려면 자원해서 광부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파독 광부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현지 광부들이 꺼리는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탄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서 탄을 캤고, 사고현장 복구 등 어려운 일을 도맡아 했다.

파독 광부들은 대부분 고졸 이상 고학력자들이었다. 첫 파독 광부 모집 땐 경쟁률이 10대 1이 넘었다. 고학력 광부들은 억척스럽게 일해서 고국으로 송금했고, 틈틈이 못다 한 공부도 했다.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에 따르면 파독 광부 출신 대학교수만 30여명에 이른다.

권이종(70)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이날 '파독 광부 시절을 회고하며'란 글을 읽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너무나 배가 고파 독일에 광부로 갔고, 노예 아닌 노예 생활을 했다"며 "막장에 처음 들어간 날 독일인 광부들로부터 온갖 조롱도 받았다"고 당시의 설움을 토로했다. 그의 얘기를 듣던 다른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도 눈물을 훔쳤다.

김태우 회장은 "파독 광부들의 땀이 조국 근대화를 이루는 불씨가 돼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것을 모두가 기억하도록 기념관을 세우는 게 목표"라며 "세계에 흩어진 파독 광부와 그 후손들이 모국을 찾았을 때 쉬어갈 작은 숙박시설도 지을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