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판에서 대학생이 내게 한마디… '권형, 나하고 독일 갈 생각 없수?'
가난에서 벗어나려던 나…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실업자가 250만명이던 시절 하루 16시간씩 악착같이 일하며
'광부와 간호사'로 결혼식 치른 나는 '교수 광부'가 되었다
매년 찬바람이 부는 겨울, 12월이 되면 아득한 옛일이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63년 12월 21일, 그날은 120명의 한국 광부가 외화벌이를 위해 이역만리 독일 땅을 처음 밟은 날이었다. 1977년까지 독일에 간 광부가 7968명.파독광부(派獨鑛夫)! 지금의 젊은이들에겐 낯선 단어겠지만, 과거 우리나라는 자원은 물론 수출할 만한 기술력도 없었기에 인력(人力), 사람도 수출했다. 광부뿐이 아니라 간호사 그리고 군인까지.
나는 1940년 오지 중의 오지 전라북도 장수에서 태어난 ‘촌놈’이다. 또한 춘궁기 보릿고개를 ‘제대로’ 겪은 빈농의 자손이다. 날마다 10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녀야 했고, 하루 두 끼 밥 먹기가 힘들어 칡뿌리·소나무 껍질·진달래꽃을 캐 먹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릴 적부터 간직해 온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북 전주로 가서 중학교 시험을 쳤다. 그러나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어머니는 쌀 한 가마니를 빌리려 동네 부잣집 앞마당에서 하루를 꼬박 버티셨다. 자식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으셨으면 그러셨을까? 돌아가시기 전 40여일이나 물 한 모금 못 넘기시면서도, 막내아들의 사진과 박사학위증을 품에서 안 놓으셨던 어머니였다.
간신히 고교를 졸업했지만 나이가 차 군입대 영장이 나왔고, 군복무를 마친 뒤 고향에 내려왔으나 가난의 그림자는 여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전 국민 2400만명에 실업자가 250만명이 넘던 시절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공사판에서 일하던 중 함께 일하던 한양대 공대생이 내게 한마디 던졌다. “권형, 나하고 독일 갈 생각 없수?” 파독 광부로 가자는 얘기였다.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해방되고 싶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아무리 안전모를 쓰고 있지만 돌이 떨어지면서 팔과 얼굴, 등에 난 상처에 석탄가루가 박히면서 그 자리가 곪고 아물면서 석탄은 그대로 있었다. 광부 문신이다. 나는 몸에 박힌 석탄가루를 일일이 파내고 타월로 빡빡 문지르기도 했지만 지울 수 없었다. 지금도 내 얼굴에는 검은 점들이 검버섯처럼 남아있다.
그런 위험 속에서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희미한 헬멧의 램프에 의존해 하루 16시간씩 연장근무를 하며 탄을 캐냈다. 막장일은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글뤽 아우프(Gl?jck auf)”라고 인사를 했을까. ‘죽지 말고 살아서 지상에 올라오라’는 뜻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국내로 보낸 돈이 당시 우리나라 외화수입의 3분의 1이 됐다니….
이렇게 힘든 3년이 지나 귀국을 앞둔 내게 독일 친구들 덕분에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인생의 두 번째 기회였다. 독일 국립사범대인 아헨교원대에 입학한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여전했고,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되어 강제 출국당할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파독간호사 출신 한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 같은 고향사람을 만났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그녀를 보기 위해 40km나 떨어진 곳을 자전거로 왕복하면서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2년 만에 우리는 황금커플이라는 ‘광부와 간호사’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주말이면 함께 된장국·청국장·김치찌개 등의 음식을 해 먹었다.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둘 다 아직 학생 신분인지라 집을 얻을 돈이 없어 처음에는 따로 살아야 했고, 간신히 합친 후에도 서로 학업과 생활에 바빠 아이를 독일인 가정에 맡겼다. 그러나 그만 사고로 생후 5개월 된 첫딸은 하늘나라로 갔다.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사랑을 제대로 베풀지 못한 죄책감에 서로 부둥켜안고 피눈물을 쏟았다. 나는 12년 만에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귀국했다.
‘교수가 된 광부.’ 파란만장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나의 삶이지만 어느덧 고희(古稀)가 됐다. 지금도 나를 일깨워주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이었다.
함보른 탄광에 1964년 12월 대통령 부부가 찾아왔고 식순에 따라 애국가가 시작되자, 감격에 찬 광부와 간호사들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곧이어 울음바다가 됐다. “가난 때문에 이역만리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새까만 여러분 얼굴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까지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대통령의 연설에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 육영수 여사도 한 사람 한 사람 껴안고 함께 울었다. 그날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기억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나를 또 울린다.
50-60년대 우리들의 옛날 생활상!
1차산업 농경사회 우리민족의 생활상을 재 조명한다.
예전엔 집에서 탈곡을 하였기 때문에 집주위가 엉망이죠~
어릴적 탈곡한 집단을 날랐었죠~소먹이(여물)
로사용 하였답니다.
보리타작 콩타작은 도리깨로 하엿답니다.
콩타작을 하엿나 봅니다. 잔일들이 많죠~
바람을 일으키는 풍로가 있엇는데 안보이는것 보면
60년대 이전인가 봅니다.
전형적인 초가마을
마을 주변에 버드나무들이 많앗어요~
여유잇는 가족의 모습..(살밖에서)
손으로 하루죙일 모내기 하고나면 허리는 물론 눈이 퉁퉁..
경상도말로 논도가리가 크네요~모내기하는
사람이 많아서 다행입니다.
예전에는 천수답이 많앗죠~
이맘때면 초벌 논매기 하였죠~손톱이 없으면 힘이들죠..
동네 아이들의 모습..
여름이면 매미잡고 구슬치기하고 놀았는데..
가야한답니다.
먼~ 시장길(신장로) 산중시골이라 오리나 십리길을
당시 까만 비누도 많았는데...
풀베기 운동(퇴비용)ㅡ4H 구락부기도 보이네요
새마을 모자를보니 생각이 나네요~
예전에 성남에 새마을 연수원 교육도 받았는데
지금도 잇나 모르겟네요~
남녀노소 불문하고 산과 들에서 풀을 베어 지게에 지고
새마을기를 든마을이장이나 작업반장의 뒤를 따라
긴 행렬을 이루며집합장소로 이동하던 그때...높은
분들이 지나가면
잘 보이도록 도로 옆 가장자리에 산더미처럼
최대한 높게 쌓아
실적에 따라 마을별로 시상도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초가집 이을때 이엉과 용마루를 엮고 잇네요~
초가지붕 이을때면 굼벵이들이 정말 많앗죠~
그땐 징그러워 먹지도 못햇는데..요즘에는
고단백으로 당뇨에 좋다죠..
내년에 심을 씨앗들 처마에 매달아 보관하였죠~
도리깨로 콩타작 하는가 봅니다.
당시 농촌에는 잔일들이 항시 많앗죠~
노오란 옥수수가 먹음직 스럽네요~
감나무 사이로 벼 탈곡하는 모습..
등목이라하여 예전에 많이들 하였죠~
집집마다 장독대가 잇었죠~
예전의 부억모습(경상도에서는 정지라 하였죠)
고부지간 맷돌에 메밀을 갈고 있나 봅니다.
짚신을 만들어 파는가 봅니다.
소는 재산목록 1호에 소가없으면 농사를 못지엇죠~
쟁기질 보기보담 어렵죠~
가을걷이에 새참을 나르고 있나봅니다.(막걸리에 국수..)
배가 고프면 허리가 더아팠어요~어찌나 기둘리던지..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이런 세상을 현대화로 바꾸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