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경제 자립의 절대적 요인/인력자원 1. 경제 자립과 인력 활용 우리 나라에는 경제 자립을 위한 자원은 ‘한국인이라는 인력’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국민이 먹고 살고 또 나라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이 인력을 활용해야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다시 말하여 우리의 유일한 자원이라 할 인력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경제 자립의 성공 여부가 달려 있었다.
인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 국가는 부강하고 국민은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인력’에 관해서 아는 사람도 없었고 조사된 자료도 없었다.
모두가 감으로 느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래서 경제 자립을 위한 계획을 수립할 때마다 ‘한국인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2. 초기의 인력 활용/여성 인력 1) 인력의 양(量) ‘인력’을 양(量)과 질(質)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양(量)조차도 문제가 있었다.
‘공업의 수출체제로의 전환’에 있어서 농촌에서 남아도는 유휴노동력을 활용,
섬유제품 등 경공업 제품을 생산, 수출한다는 전략을 세우게 되었는데,
이 분야는 젊은 여성근로자〔女工〕들의 몫으로 고려되었다.
이를 위해 연도별, 학력별로 사회진출이 가능한 여성들의 총수만큼은 알아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통계는 구하려 해도 구할 수가 없었다.
국가통계상 가장 중요한 기초자료가 ‘인구통계’인데 이것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5ㆍ16 혁명정부는 국민에게 6년제 의무교육(義務敎育)만큼은 꼭 수행하겠다는 공약을 했다.
그래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따라 대대적으로 학교를 세우고 교실을 확충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교실 부족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더니 3부제는 보통이고 심지어 4부제까지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정부는 긴급조사팀을 구성하여 현지로 내려가서 내용을 파악해보았다.
당초 계획 작성시 기초로 삼았던 ‘인구통계’가 엉터리였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러므로 계획 당사자가 스스로 통계를 작성한 후 업무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윤곽이나마 파악하지 못하면 수립된 전략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작성된 통계에 의하면 1965년 봄, 사회에 진출한 여성의 총수는 26만 명이었는데, 이 중 초등학교 이하의 학력소지자가 78%를 차지하였다.
중학교 출신은 2만1천 명(8.2%)에 지나지 않았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일본이나 대만과 경쟁하려면 우리 나라도 중학교 출신이 주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이 중 30% 정도를 수출현장에서 활용한다고 가정하면 6천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정도의 인력으로는 국가적인 계획을 수립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부득이 초등학교 졸업생까지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30% 정도 활용한다고 가정하면 5만 명 정도가 되었다.
더욱이 당시 우리 나라 농촌 여성은 20세 전후가 되면 결혼을 했으니 인력으로서는 5년 정도의 수명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 나라의 여성 인력 총수는 6만 명이 5년 일한다고 보면 30만 명으로, 30%라는 가정을 상향조정하더라도 50만 명이 최대수치였다.
그리고 학력은 일본이나 대만보다 한 단계 낮은 초등학교 출신이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의 여성 인력자원의 전모였다. 2) 노동가치관 ‘수출체제로의 전환’ 정책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될수록 많은 수출공장을 단기간에 건설하여 수출하여야 했다.
그래서 각 도마다 20만~30만 평의 공업단지를 조성하기로 했다.
각 도는 제각기 공업단지의 규모를 크게 하기를 원했다.
정부(당시 상공부)는 인력 공급 계획에 의해 결정해주기로 했다.
그 결과 서울, 인천, 대구, 경남만이 충분한 인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자료를 제출했다.
이것이 서울의 구로동 수출공업단지, 인천 수출공업단지, 대구 공단, 마산 수출자유지역 등이었다.
이에 비해 다른 지방에서는 양상이 달랐다.
광주 공단의 예를 들면 도청이나 그 지역 출신 국회의원들의 열성은 대단했다.
도유지 약 100만 평을 공단화해서 낙후된 공업기반을 일시에 향상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나타난 결과는 신통치가 않았다.
공장대지가 팔리지 않아 결국에는 연탄공장이 9개나 들어서게 되었다.
이 지방의 여성 근로에 대한 가치관은 ‘딸자식은 바깥 세상을 구경시키지 않고 시집을 보내야지 어디라고 공장에서 일하게 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내공업’ 정책을 쓰기로 했다.
각 도마다 ‘가내공업센터’를 설립하여 기술교육을 실시한 후 작업은 각 가정에서 하기로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뜨개질’이나 ‘홀치기’ 등은 공장에서 재료를 받아 집으로 가서 여유시간이 생길 때마다 일을 해서 납품을 했다.
이 정책은 아주 효과적이어서 기혼 여성들도 대거 참여해서 수출에 큰 몫을 했다. 3) 여성 인력의 노임 이상과 같이 우리 나라 여성 인력은 다른 나라에 비해 학력에서 큰 격차가 났으나
더 큰 문제는 노임의 국제경쟁력이 없다는 데 있었다.
1964년 초에 시간당 노임은 일본이 미화 56센트, 한국과 대만이 20센트였다.
전후(戰後) 일본은 일찍부터 섬유제품 등 경공업제품을 수출하여 최신 설비를 설치했고 공정(工程)도 개선해서 1인당 생산량이 크게 향상되어 있었다.
품질도 고급화해서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고, 수출망도 구축돼서 안정적인 판매를 할 수 있었으며,
싼 물건을 대만에 위탁 가공시키고 있었다.
우리 나라는 일본과는 상대할 입장이 못 되었으며 목표는 대만 등 개발도상국가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인건비가 똑같은 조건하에서는 우리 나라보다 한 발 앞서가고 있는 대만과 도저히 경쟁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朴 대통령은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 일대 결단을 내렸다.
당시 환율 1달러당 130원을 약 2배인 1달러당 255원으로 인상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 나라 인력의 시간당 평균 노임은 미화 10센트가 되었으며, 비로소 대만이나 태국, 필리핀보다 인건비가 내려감으로 해서 국제경쟁력을 갖게 됐다.
이러한 값싼 ‘인력’이 ‘우리 나라 공업의 수출체제로의 전환’이라는 국가적 전략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유일무이한 자원이 되었던 것이다. 4) 60년대의 여인상 1960년에는 우리 나라 인구 중 65%가 농촌에 살았다.
조그마한 농가에 자식은 보통 5~6명이 되었고 그 중 반은 여아였다.
모두가 보릿고개를 겪으며 살아왔지만 특히 여성의 농촌생활이란 고래로
‘남존여비’의 사고방식 속에서 남성보다 훨씬 더 비참했다.
이들이 60년대의 수출을 뒷받침하는 인력자원이 되어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가난에 찌들려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의 배려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야간학교를 공단마다 설치하여 여공들의 원을 풀어주었다.
교과과정도 고쳐서 야간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 졸업장까지 주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제도를 설치함에 따라 자연히 협동심과 단결심도 생겨서 각 공장마다 배정된 월별 수출목표량을 스스로가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일하며 수입을 올리다보니 ‘남존여비’ 사상이 퇴조하고 ‘여성해방’, ‘남녀평등’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5) 여성 인력의 특성 1960년대 초의 여성 인력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단히 진취적이었다. 미지의 세계에 뛰어드는 용기가 있었다.
(2) 인내심이 강했다.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고 매일 10여 시간을 일했다.
(3) 향학심이 강했다. 머리가 좋고 손재주도 능했다.
(4) 가족을 생각할 줄 알았다.
(5)국가관이 있었다. 직장에 만족하고 목표량 달성에 헌신하고 보수에도 불평이 없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1964년에 1억 달러, 1967년에는 3억 달러를 수출했다.
3억 달러는 우리 나라가 미국의 원조에 의지하고 있던 시절의 원조액과 같았기 때문에 그 의의가 컸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1970년에는 10억 달러를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여공들의 힘이 컸으며 여공들이야말로 그대로 파산할 위기에 섰던 조국을 구한 역군이라 할 수 있다.
3. 성장기의 인력 활용/남성 인력 1) 남성 인력의 재발견 우리 민족은 중국의 원(元), 명(明), 청(淸)의 속국으로 지내오다 일본의 식민지, 그 뒤로 미국의 원조시대를 거쳤다.
이 비참한 기간에 우리는 타민족을 상전으로 모셨으며 심한 열등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인이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로 나갈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이 1965년부터 시작된 월남 파병이었다.
월남전은 6ㆍ25 동란과 본질적으로 같은 성격이나 전투양식이 게릴라전이었다.
월남전은 계속 확대되어 나가고 장기화되어 나갔다.
따라서 미국은 병력을 증강 파병하기에 이르렀고, 월남전 때문에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이 때 북한이 위협적인 존재로 대두되었다.
북한은 휴전 후 경제도 재건하면서 남한을 앞질렀다.
군사 면에서는 군장비를 소련 수준으로 현대화하고 대부분의 병기, 장비를 자급자족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우리는 구식병기 일색이었고 미국의 도움 없이는 나라를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주한 미군을 악착같이 붙들어놓고 있어야 했다.
이런 와중에 중국의 모택동이 ‘월남전의 베트콩식 무력해방을 남한에서 실시하라’는 강요에 따라 북한은 ‘청와대 습격’, ‘삼척ㆍ울진 침공사건’ 등 각처에서 무장게릴라의 소요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남한에서 일어난 게릴라전은 월남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주한 미군이 한국을 방어해주는 대신 파월 한국군은 미군을 대신하여 월남에서 싸웠다.
월남 파병과 동시에 많은 민간인이 월남에서 일하게 되었다. ‘
단순기능직노무자’일지라도 처음으로 일자리를 갖게 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하였다.
주로 외국업체에 고용되어 하역작업, 수송, 축항, 도로공사 등과 병원, 주택, 학교 및 군시설 공사에 참여하였다.
외국회사들은 한국의 남성 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고용을 늘려 나갔다.
인력 진출과 동시에 우리 나라의 파월 업체 수도 늘어났다.
월남에 진출한 한국 인력은 제대군인으로 20대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 인력의 수가 연인원으로 30~40만이 되었다.
이로써 ‘한국인은 우수하며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결코 뒤떨어질 게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월남 파병은 우리 나라 남성으로 하여금 오랜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자부심과 자신감 그리고 용기를 갖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부터 ‘한국의 남성 인력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오일쇼크와 연관한 중동 파견을 비롯해서 세계 각지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중동 진출 1973년 10월에 시작된 제1차 오일쇼크로 우리 나라는 제2차 경제 위기를 맞게 됐다.
이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월남에서 경험을 쌓은 남성 인력이 중동에 진출하여 그 진가를 발휘하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되었다.
중동 진출에는 단계가 있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미지의 나라인 한국에 공사를 줄 리가 없었다.
이럴 때 사우디의 수도 ‘젯다’ 시에서 종교행사 관계로 초긴급 도로공사 사업이 있었는데 공사기일을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업체가 없어 삼환기업에서 그 일을 맡게 됐다.
이를 수주 맡은 한국 노무자들은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횃불을 피워놓고 작업을 하니 수많은 횃불이 장관을 이루었다.
이곳을 지나던 ‘파이잘’ 왕이 이를 보고 크게 감탄하면서 “저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한 한국 사람들에게 공사를 더 주어라”고 지시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계속 공사를 맡게 되었다.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다 보니 ‘Korea 넘버원’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
다음에는 항만공사로 파고 들어갔다.
1976년에는 현대건설이 사우디에서 ‘주베일’ 항만공사를 수주 받았다.
그 액수가 무려 9억 4천만 달러인데 이 공사는 이름만 항만공사이지 철제구조물 건설을 위주로 하는 대규모의 플랜트 공사였다.
대량의 각종 기술인력이 모두 동원됐다.
이 공사에서 한국의 남아들은 진가를 발휘하여 계약기간보다 빨리 성공적으로 완공했다.
그 결과 이를 시공한 현대건설은 물론 한국건설업계가 세계 일류급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박 대통령이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에게 “정 회장, 중동에서 성공을 거둔 이유가 무엇이오?”
하고 물었더니, 정 회장은 “전적으로 성실히 일하는 근로자의 공입니다.” 라고 답변했다.
건축, 전기, 통신 시설 확충과 공장건설 등에도 진출했다.
그 결과 1965년부터 81년까지 17년간 해외건설 수주액 총계는 439억 5,280만 달러라는 막대한 액수가 됐는데, 중동지역 수주액이 411억 1,400만 달러로서 93.5%를 점했다.
1970년대의 기능인력은 기술이나 정신 면에서 참으로 훌륭했다.
우리 나라가 제1차 석유파동으로 난국에 처했을 때 이러한 기능인력이 이역만리 중동에서 피땀 흘린 노력으로 나라를 구한 것이다.
60년대는 여공들이 우리 나라를 구했고, 70년대에는 남성 기능인이 나라를 구한 것이다. 3) 중동 파견 기능사 1974년부터 진출하기 시작한 중동은 전혀 새로운 개척지였다.
중동 진출 첫해인 74년 말에는 수주액이 2억 6천만 달러, 다음해인 75년에는 무려 226.3%나 늘어난 8억 5천만 달러로 급속적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일감이 갑자기 늘어나자 기술인력 부족이라는 큰 애로에 봉착하게 되었다.
해외에서 수주 받은 일감도 처리 못할 지경이 되었고 일감은 더 딸 수 있는 데도 기술인력 부족으로 수주를 맡을 수가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토목, 건축 등에 소요되는 단순기능공은 단기훈련으로 공급이 가능했다.
그러나 설계도면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소유한 용접ㆍ배관ㆍ제관ㆍ전기 공사, 기계조립에 필요한 기능사는 단기훈련으로는 양성이 불가능하였다.
당장 보충해야 할 인원만도 1,600명이나 되는데 이만한 기능사를 국내에서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입장에서 공업고등학교 3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중동진출기능사 중점육성을 위한 시범공고제도’를 만들었다.
첫해에는 11개의 시범공고에서 1,500명을 양성키로 했다.
해외진출 기능사 과정은 초비상 교육과정이었다.
요구되는 기술을 습득하려면 최소한 800시간이 필요한데 부득이 과외로 400시간을 더 교육시키기로 했다.
하루 7시간 이상의 실기교육이 실시되었다.
중점양성 교육기관의 교사와 학생은 참으로 피땀 어린 노력을 다했다.
그 결과 6개월의 교육이 끝난 후 기능사(2급) 자격시험에 전원이 합격했다.
각 학교에서는 불합격 될지도 모를 학생 수를 감안해서 목표인원 1,500명보다 640명이 더 많은 2,140명을 훈련시켰는데 모두가 합격하여 무려 43%를 초과 달성하였다.
기능사 자격을 딴 후 현장실습에 들어갔다.
현장과 똑같은 조건하에서 현장에서 사용되는 작업기자재를 갖고 경험이 풍부한 현장기사의 지도로 실시되었다.
정상적으로는 약 2년이 소요된다는 현장경험을 2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끝낼 수 있었다.
이들은 신고식 때 “우리 일동은 중동파견 기능사 과정을 끝마치고 중동파견을 명 받았기에 이에 신고합니다.
중동에 근무하는 동안 선생님들의 가르침대로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것을 명심하고 국가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모교의 명예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열심히 일할 것을 서약합니다.
”라고 신고하고 곧바로 중동으로 떠났다.
우리의 젊은 역군들은 단지 8개월간의 훈련으로 일류 기능사가 될 수 있는 소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고, 하려고 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동 진출 기능사 양성과정’은 인기학과가 됐다.
다음해부터는 첫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유 있게 교육을 시킬 수 있었다.
학생 수도 매해 증가되었다.
이들은 졸업 후 즉시 중동으로 떠났다.
그리고 ‘조국 근대화의 기수’ 역할을 다했다.
중동 진출이라는 무대는 이들 기수와 단순기능공들이 주역이었다. 4) 국가안보 비상사태 발생 1969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닉슨은 월남전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닉슨 대통령은 1970년 2월 18일에 발표된 외교백서에서 “미국은 아시아 및 극동에 있어
①우방군이 핵 공격이 아닌 형태의 공격을 당할 경우 미국은 군사와 경제적 지원만 제공하며,
②당사국은 미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제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이것은 주한 미 지상군의 철수나 감축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였다. 당시 우리 나라의 남북 대치관계는 해를 거듭할수록 긴박해졌다.
실제로 언제 전면전이 일어날지 모르는 초비상상태였다.
6월 22일에는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사건’이 발생하였다.
두 번째의 대통령(및 정부요원) 암살기도가 있었으며 이것은 전쟁을 도발하는 행위였다.
정부는 ‘닉슨 독트린’의 거센 물결이 언젠가는 한국에도 밀어 닥쳐올 것을 예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나,
‘현충문 폭파 사건’이 있은 지 2주일 후인 1970년 7월 상순에 미국 정부는 주한 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의 철수 방침을 통고해왔다.
이어 8월 24일에 내한한 애그뉴 미국 부통령은 1년 후인 1971년 6월 말까지 철수시킬 방침임을 밝히는 동시에 “앞으로 5년 이내에 나머지 주한 미군도 완전히 철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1971년 3월 주한 미군 1개 사단을 철수시켰다. 애그뉴 부통령이 통보한 날짜보다 3개월이나 앞서 주한 미군을 철수한 것은 미국의 중국과의 ‘핑퐁외교’의 영향이었다
. 이 때 우리 국민은 심한 배신감과 약소국의 설움을 느꼈다.
주한 미군 철수로 크게 고무된 것은 북한이었다.
소련 현역군 수준으로 무장된 북한군은 6ㆍ25 전쟁 때의 경험으로 한국군을 얕잡아보았으며 70년대를 ‘적화통일의 해’로 설정하고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 전략은 베트콩식 게릴라전이었으며 남한 내부를 붕괴시키자는 작전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나라는 ‘국가 안보 초비상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는 ‘자위국방’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해왔으며 이것은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우리 나라를 방위한다는 방어적인 개념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한국에서 손을 떼겠다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Go man go!(미군이여, 갈 테면 가라!)” 하며 분연히 일어섰다.
국방개념도 ‘자주국방’으로 바뀌었다.
‘자주국방’의 가장 큰 과제는 ‘국군 장비의 현대화’였다.
특히 게릴라전에 대처하기 위해 ‘예비군의 무장화’가 시급했다.
예비군이 조직되어 있었지만 카빈 소총뿐이었으며 기타의 개인무기, 공용무기, 통신기, 수송장비 등은 물론 전투모, 대검, 수류탄조차 지급되지 않았다
. 정부는 예비군 20개 사단을 ‘박격포까지 장비하는 경보병사단’ 수준으로 전력을 강화하기로 하고 이에 소요되는 병기, 탄약류 및 장비 등을 국산화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방위산업이 국가 초긴급과제로 등장했다.
우선 이들 병기에 대한 개발 연구가 시작됐는데, 우리 나라의 연구진은 이를 100일 만에 끝냈다.
놀라운 성과였다.
그리고 현역군의 장비 현대화, 즉 대구경화포ㆍ전차ㆍ항공기ㆍ함정 등의 개발에 나섰다. 그런데 무기 생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다름아닌 ‘정밀기능사’ 부족이었다. 5) 정밀기능사 병기란 초정밀가공품으로 100분의 1mm의 정밀도를 요구한다.
그러나 당시 우리 나라에서 가공할 수 있는 한계는 10분의 1mm 정도였다.
과거 식민지 시대부터 일본인들은 ‘한국인은 정밀가공을 할 소질이 없다’고 평해왔다.
‘정직’하게 작업해야 ‘정밀’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데 이 정성, 정직, 정밀 정신이 한국인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범 공업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일본 교사를 초빙해서 일본식대로 교육과 실습을 시켰다.
정신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군대식으로 교육을 시켰다.
그래서 해결하였다.
이 학교가 금오공업고등학교였다.
그 후 100분의 1mm를 가공할 수 있는 ‘정밀기능사’를 양성하기 위해 각 도에 하나씩 기계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금오공고와 같은 개념으로 교육을 시켰다.
박 대통령은 이들 공업고등학교에게「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휘호를 내리는 동시에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라며 분발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 학생들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자부심을 갖고 기술 연마에 나섰다.
그 결과 졸업 때에는 모두 정밀기능사 자격을 획득했다.
졸업 후 이들은 방위산업에 취업하여 병기 생산을 함으로써 국가 방위에 이바지하였다.
정밀가공까지 할 수 있는 기능사였기 때문에 어떠한 기술도 습득할 수 있었다.
그 증거로서 각 분야의 선수들이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하여 매해 종합우승을 했다.
우리 민족은 기능 면에서 세계 최고의 소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중동에 진출한 ‘조국 근대화의 기수’, 병기 생산 및 중요 기간산업에 종사하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들은 모두 공업고등학교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18세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희망이요, 소중한 자원이었다.
정부는 전국의 공업고등학교에서 이들 조국 근대화의 기수를 매해 5만 명씩 양성해나갔다.
4. 테크노크라트 활용/종합 1) 테크노크라트에 의한 개발 우리 민족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간에 그 소질을 발굴하고 연마하면 무한한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이에 눈뜨지 못했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원인은 과거 우리 나라의 통치체제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대경제는 과학기술을 근간으로 해서 성립되기 때문에 테크노크라트가 담당할 수밖에 없다
. 특히 후진국에서는 테크노크라트가 경제개발의 성패를 좌우한다.
명치유신 후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것이나, 전후 일본이 경제대국이 된 것도 일본의 테크노크라트 층이 이룩한 업적이다.
대만 또한 유사하다.
이것이 ‘테크노크라트에 의한 개발이론’이다.
1960~70년대 우리 나라의 테크노크라트들이
①어떠한 전략과 정책을 세우고,
②우리 나라 인력의 소질을 발굴,
③이를 연마해서
④이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면서
⑤경제를 발전시켰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어떤 전략을 수립할 때에는 ‘엔지니어링 어프로치’가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국가원수가 테크노크라트였다는 것이었으며 진두 지휘를 했다는 사실이다.
박 대통령은 테크노크라트에게 전략을 수립케 하고 이를 완전히 파악한 후 자신이 결단을 내렸다.
그 집행 또한 테크노크라트에게 일임했으나, 본인 스스로 철저한 점검을 했다.
탁월한 ‘사령관형 테크노크라트’였던 것이다.
1973년 1월 31일은 우리 나라 역사상 큰 획을 긋는 날이었다.
이 날 중화학공업 건설 추진을 위한 브리핑이 있었다.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하는 목적은「
①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 건설로 북한군 위협에 대처하고,
②원료, 원자재, 기계, 시설 등을 국산화함으로써 수입을 억제하여 선진국(특히 일본)과의 종속적 관계로부터 공업적 독립을 이룩함과 동시에 모든 공업의 생산능력에서 북한을 압도하며,
③1980년까지 100억 달러를 수출함으로써 국력 면에서 북한을 압도하고,
④국민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보릿고개를 완전 해소하여 국민 1인당 GNP를 1,000달러로 끌어올림으로써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킴」 등으로 강조되었다.
박 대통령이 취한 길은 군사적이 아닌 순수한 테크노크라트적인 전략이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경제총수도 테크노크라트적인 인사로 배치했다.
결론적으로 우리 나라 1960~70년대는 테크노크라트가 경제를 운영하는 우리 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특이한 시대였다. 2) 종합-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정신이란 환경에 따라 변하고 정신력은 단련할수록 강해진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상태’를 점검해보기로 하겠다.
고래로 우리 나라는 유교국가로서 우리 조상은 중국보다 더 유교 모범국이 되려고 노력했다.
이리하여 우리 조상들은 이 모든 것을 유교사상으로 해결코자 했다.
심지어는 가뭄이 들면 국왕은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하고 기우제까지 지냈다.
1960년대 초 우리 나라는 경제 면에서는 ‘보릿고개’로 표현되는 기아선상에, 정신 면에서는 패잔병과 같은 패배감과 절망감이 팽배한 가운데 놓여 있었다.
이러한 정신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급속한 산업화에 의한 수출신장 덕분이었다.
1964년 박 대통령은 우리 나라의 경제구조를 수출 위주의 체계로 개편을 단행하고
그 해에 1억 달러 수출을 지시했다. ‘
수출 제일주의’의 등장이었다. 그 결과 그 해 1억 2천만 달러를 수출하여 40%의 수출신장률을 이룩했다. 박 대통령은 그 후 매해 수출신장률을 40%로 잡고 박차를 가했다. 1
967년에는 3억 달러를 수출했다. 여기서 자신을 얻은 박 대통령은 40% 수출 신장을 계속 밀고 나갔다. 1969년도에는 상공부나 업계에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자리에서 7억 달러 목표를 제시하면서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다’며 명령조로 지시했다. 1
970년의 10억 달러 수출목표에 대해서 국민이나 언론계, 업계에서는 이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하면 된다’라며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이 해 우리는 10억 달러를 수출해냈다.
이 때 비로소 국민들은 자신과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었다.
박 대통령은 “우리 민족은 똘똘 뭉치면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고구려 시대에는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물리쳤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이 일어나 국난을 극복했다.
그리고 지금은 10억 달러 수출이라는 기적을 이루고 있지 않느냐 ……
선진국과 같이 잘살려면 우리 국민은 ‘선진국 국민이 어떠한 방법으로 선진국을 건설했는가’를 본받아 노력할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 개개인의 능력이 선진국보다 못한 것이 없다. ‘
하면 된다 우리 국민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 방법은
경제적 면에서는 ‘수출 제일주의’,
정신 면에서는 ‘자조, 근면, 협동’과 ‘근검, 절약, 저축’의 새마을정신이다.
”라며 ‘국가의 목적의식과 국민적 행동의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이 때 비로소 위정자와 우리 국민의 의식구조가 혼연일치하게 됐다.
그 후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의식구조는 70년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그 후로도 우리 나라는 40%라는 수출 신장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1977년에는 대망의 100억 달러 수출을 이룩하였다.
세계 경제학자들은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고 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경이적인 발전을 하고 있는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을 4마리의 용이라고 표현하며 그 중에서도 한국이 선두주자라고 했다.
미국의 잡지(≪Newsweek≫, June, 1977)는 커버스토리로「한국인이 몰려온다(The Koreans are coming)」라는 특집 기사를 썼다.
이 글에서 ‘한국인은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공업구조와 국민생활을 갖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일본인을 게으른 사람으로 보고 있는 세계 유일한 국민이다’라고 소개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은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서 ‘목적의식과 행동의식’을 제대로 심어주고 신념화하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대한 민족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였다.
그 후 30~40년이 흘렀다. 1969~70년대의 사건들은 이미 역사 속에 파묻힌 일들이지만 이 자료가 현재를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많은 부분이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를 경험 못한 새로운 세대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그 때의 감격은 현재까지 살아남아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실정을 모르거나 그때도 지금과 같았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현재의 잣대로 판단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 글이 이를 시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참 고 문 헌] 金正濂, 아 박정희 吳源哲, 한국형 경제건설(1~7권) 金光模, 한국의 산업발전과 중화학공업화 정책 대통령 비서실, 박정희 대통령 연설문집
[후 기] 한국은 1945년 해방되기까지 36년간의 일제의 철저한 식민지 정책과 북괴의 남침에 의한 50년대 초의 6ㆍ25 동란 등을 겪음으로써 불행이란 불행을 모두 겪어야 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 이승만 정권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모든 것을 미국의 원조에만 의지하고 있었으며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서문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보릿고개’ 신세를 면치 못하였으나
이승만 정권은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허세로 ‘북진통일’, ‘멸공통일’만 부르짖었다.
이후 196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음으로써 우리도 ‘잘 살아보자’, ‘하면된다’, ‘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경제개발에 나섰다.
그래서 1960년대 말에는 기아에서 해방되었고 1970년대에는 경제 자립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 박 대통령은 대북 대결에 있어서도 크게 정책을 전환하여 평화공존을 표방하고 어느 체제가 정말로 국민을 위하는 길인가 두고 보자며 경제적으로 경쟁하자는 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나 북괴는 변함없이 무기생산을 계속하면서 미사일과 핵개발 등을 비롯한 무력으로 미국 식민지로부터의 ‘대남해방정책’을 고수하였다.
그 결과 한국은 경제건설에 의한 선진국가대열에 들어선 반면 북괴는 수백만 명의 아사자까지 낳은 열등국가가 되었다.
어느 면에서나 한국은 북한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우선주의와 자주국방에 기초한 시정방침의 결과임에 틀림없다. 특히 1970년대에는 경제정책에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채택하여 산업구조를 완전히 선진국 형태로 개편 혁신함으로써 여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국제적으로 경쟁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건설에 대한 집념은 매년 있는 대통령 연두교서와 기자회견시의 경제정책 내용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1인당 국민소득에 있어서도 1971년도의 278불에서 중화학공업화 정책으로 80년대 초의 목표로 삼았던 1,000불을 1978년도에 앞당겨 달성하였고,
수출에 있어서도 1971년도의 불과 10억 불에서 1977년도에 100억 불을 달성하였으며
2000년도에는 수출만 1,700억 불을 목표로 하고 있고 무역수지만 하더라도 20억 불 이상을 전망할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몇 번의 정권교체가 있었으나 경제에 대한 뚜렷한 선정 없이도 우리 나라는 튼튼한 경제력을 가지고 OECD 회원국이 되었고, 북한을 아사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한 남북회담과 남북통일을 향한 접촉을 위한 기초를 닦은 것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업적임에 틀림없다. 우
리는 지금이라도 이 때의 성장요인과 잠재력을 분석하고 활용하여 오늘의 경제적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재도약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吳源哲 略歷]
ㆍ생년월일 : |
1928.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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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학 력 : |
1945. 4 |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공대 전신)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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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9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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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경 력 : |
1950. 12 |
공군 기술장교후보생으로 입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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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6 |
공군 소위로 임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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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8 |
공군 소령으로 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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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9 |
시발자동차회사 공장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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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6 |
국산자동차주식회사 공장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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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5 |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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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7 |
상공부 화학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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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6 |
상공부 공업제1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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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4 |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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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1 |
상공부 鑛工電차관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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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11 ~ 1979. 12 |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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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2 ~ 1979. 12 |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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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2 |
기아경제연구소 상임고문 |
[金光模 略歷]
ㆍ생년월일 : |
1933. 9.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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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학 력 : |
1956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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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경 력 : |
1957 ~ 1960 |
상공부, 호남비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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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1969 |
대한석유공사 공사기획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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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 1971 |
상공부 석유화학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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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1 ~ 1979. 1 |
대통령 비서실 비서관 겸 중화학공업추진위 기획단 부단장(1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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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1 ~ 1982. 1 |
코리아 엔지니어링 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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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 1983. 2 |
삼성그룹 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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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1986 |
봉명산업 및 봉명에너지 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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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현재 |
(주)테크노서비스 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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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훈 장 : |
철탑산업훈장(석유화학공업발전) 홍조근정훈장(모범공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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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저 서 : |
한국의 산업발전과 중화학공업화 시책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