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당신이 그리운이유가 대한민국을 사랑했기때문입니다(육영수여사)

여동활 2010. 9. 14. 10:40

1960~70년대 국민의 눈물을 닦아준 사람은 육영수 여사였다. 자신이 총에 맞아 죽은 74년 8월 15일, 육 여사는 남편에게 말했다.


“왠지 오늘은 행사장에 가고 싶지 않네요.”


아내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박정희 대통령은 무슨 소리냐며 등을 내리쳤다고 한다.

영부인이 죽은 후 언론엔 민초(民草)의 추억이 실렸다.


“71년 초여름의 서울 명륜동 판자촌. 좁고 지저분한 골목을 끼고 비탈길을 30분이나 오르면 산중턱에 쓰러질 듯한 집 한 채가 있었다. 남편을 잃고 떡장수로 억척같이 살던 홍연례 할머니는 위장병으로 몇 해나 몸져 누웠다. 방 안엔 병자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곳을 아무도 모르게 찾아온 사람은 육 여사였다. 할머니는 북받치는 감격을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여사는 반 시간을 머물렀다. ‘용기를 잃어서는 안 돼요. 꿋꿋하게 이겨나가야 해요’.”

 

“68년 여름은 호남 일대에 가뭄이 극심했다. 광주는 식수조차 마시기 어려웠다. 육 여사는 도지사 관저에 조석(朝夕)으로 전화, 마음이 불안하여 숭늉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으며 세수도 못하겠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직접 광주로 나들이를 하였다. 지사 부인의 안내로 가장 한발이 심한 나주 공산면 화성리 마을로 갔다. 논바닥이 발이 빠질 정도로 쩡쩡 갈라져 있었다. 여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눈물을 글썽거리며 정부에서 굶기기야 하겠느냐고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말라버린 웅덩이에 걸려 있는 양수기를 직접 돌려보며 혼자 울고 있었다고 한다.

 

 

 

한복 입은 여성과 유머는 걸맞지 않은 느낌을 준다. 우아한 한복 차림의 정숙한 표정에 유머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그러나 고정관념을 깨는 의외성이 바로 유머의 맛이다. 한복의 이미지가 강한 퍼스트레이디 육영수에게는 특유의 맛깔스런 유머가 있다.

1966년 2월, 태국 푸미폰 국왕이 한국 대통령 내외를 맞이해 베푼 만찬회에서 육영수가 국왕과 자녀교육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마담께서는 평소 자녀에 관해 어떤 교육관을 갖고 계십니까?”
“쓸모있고 지혜로운 인간으로 키우려 합니다. 대통령 가족이라고 해서 우월감이나 의타심을 갖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정서적인 면과 도의적인 면을 강조하는 편입니다.”
“박대통령께서는 자녀교육에 다른 의견을 안 가지셨는지요?”
“저는 엄하게 가르치려 하는데 대통령께서는 아이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시어 순하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대통령이 저보다 더 인기가 있답니다.”


여기까지 근엄한 표정을 짓던 국왕이 잠시후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국왕이 웃음을 참지 못해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어서 주위 사람들이 어리둥절했다. 좀체로 국왕에게서 볼 수 없는 모습인지라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영수는 대통령 남편이 자기보다 아이들에게는 인기가 있다고 했다. 그런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하지만 투표권도 없는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어봐야 무슨 소용이겠어요.” 이 한마디가 근엄한 국왕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만찬회장은 한층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1969년 9월에는 홍릉에서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한국 과학기술의 요람인 KIST의 준공식이 거행되고, 이어서 최신형 컴퓨터 ‘CDC 3300’의 성능 시험이 있었다. 국내에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서 1967년에 최초의 컴퓨터 ‘IBM 1401’을 들여온 이래 몇가지 기종이 더 있었으나, KIST의 ‘CDC 3300’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성능의 최고 컴퓨터였다.


 

대통령 내외와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컴퓨터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모나리자 그림도 찍혀 나왔으며, 그리고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 의해 한반도 지도가 작성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성능이었다.
이를 보고 육영수가 말했다.

“이 기계로 돈도 찍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러자 컴퓨터 성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분위기가 웃음으로 바뀌었다. 그때 KIST 전산실장 성기수는 대통령 부인의 말에 참석자들이 크게 웃었다고 전하고 있다.

(성기수 자서전 <조국에 날개를>)

제7대 대통령 선거 유세전이 뜨거웠던 1971년 4월에는 대구에 가서 그 지방의 각계 여성 대표들을 만났다. 대구는 육영수가 남편과 결혼해서 3년간 신혼생활을 했던 곳이고 그곳에서 장녀 박근혜가 태어났다.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라 친밀감 있는 대화가 오고갔다.

“각하께서 요즘 너무 수척해 보이시더군요.”
대구에 온 박정희 후보의 모습이 야위었더라며 한 여성이 건강을 염려하는 말을 했다.
“반찬 한가지라도 더 드리는데 왜 수척해 보이는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육영수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국민에게 욕먹지 않으려고 따라서 좀 야위었습니다.”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해 10월은 대학가의 교련 반대 시위로 위수령이 발동되고 정국이 크게 술렁거리는 가운데 청와대에서 소아과학회 의사들을 만났다. 칵테일이 나온 간담회였지만 의사들의 표정은 다소 굳어 있었다.


“평소에 느끼는 점과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해 주시면 제가 힘은 없지만 대통령께 건의해서 반영이 되도록 해보겠어요.”

 

육영수는 대화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어가면서 자기 앞으로 오는 민원 편지의 사연 몇가지를 공개했다.
“취직시켜 달라는 편지가 하루에도 여러 통씩 와요. 청와대가 취직시키는 데가 아니라고 정중히 거절을 해도 계속 편지를 보내오는 사람도 있고…… 정말 돕지 않으면 안될 절박한 경우엔 어떻게든 손을 써봅니다. 어려운 사정이 해결이 되면 그래도 뒷소식이 궁금한데 감감 무소식이라 야속하기도 해요.” 시간이 흐르면서 간담회는 웃음이 오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짓궂고 배짱 좋은 젊은이가 불쑥 앙똥한 말을 꺼냈다.
“육여사님! 가까이 뵈니 상당히 미인이십니다.”
젊은 의사의 능청스런 아첨에 폭소가 터졌다.
“결혼은 하셨어요?”
육영수의 물음에 대답이 또한 걸작이다.
“생물학적으로 완전무결한 총각입니다. 저의 조건만 좋다면 따님께 청혼해볼까 하는데요.”
또 한번 폭소가 터지고, 육영수는 그의 배짱을 격려해 주었다.
“뭐, 조건이 나쁜 것도 아니잖아요.”
그가 넙죽 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장모님!”
또다시 폭소로 장내가 뒤집어졌다.

아무리 정치가 시끄럽고 우울해도 육영수가 사람들을 만나는 곳에는 화기가 넘쳤다. 한복 차림에 온화한 미소와 우아한 모습이 대통령 남편의 딱딱한 이미지를 부드럽게 풀어내고, 또한 야단스럽지 않고 정감있는 유머는 은근한 웃음과 즐거움을 자아냈다.

육영수의 한복은 행사 때나 입은 옷이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의 일상복이었다. 현대 여성으로는 드물게 한복으로 일생을 보냈다. 대중 앞에 나설 때는 대통령 부인이지만, 가족들과 어울릴 때는 ‘당신을 알고부터’, ‘보슬비 오는 거리’ 같은 대중가요를 좋아하는 평범한 대한민국 주부였다.



남편이 제5대 대통령이 되어 처음 퍼스트레이디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을 때, 남편 박정희가 취임사를 미리 보여주며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의견을 말해 달라고 했다. 그것을 본 육영수가 한가지만 추가하면 되겠다고 하자 남편은 그렇게 하겠다면서 그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제부터 아내 말 잘 듣겠다고 하세요.”
탄산음료처럼 톡 쏘는 한마디에 남편은 고개를 쳐들고 웃음을 멈출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