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잠실아파트는 무주택 서민을 위한 주거단지를 지으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건립됐다.
대한주택공사는 잠실 인근 한강변의 매립지 41만평을 매입해 용지를 마련하고 이를 5개 구역으로 나누어 1975년 2월부터 1978년 10월까지 5개 단지를 건립했다.
잠실아파트 단지 13평형 1천5백가구가 1차로 준공된 것이 1975년 8월이다.
9월 1일 박 대통령은 잠실아파트를 방문해서 민생 현장을 살펴보았고, 9월 2일자 조선일보는 대통령이 잠실아파트에 입주한 한 가족을 만난 기사를 상세히 보도했다.
그리고 최근 인터넷 포털 다음의 티스토리 블로그에는 당시 잠실아파트를 찾은 대통령을 보았던 한 소년의 목격담이 소개되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먼저, 1975년 9월 2일자 ‘잠실아파트의 진객’ 제하의 조선일보 기사는 다음과 같다.
27동 102호, 감격에 잠 못이룬 변재근씨 일가
대통령께서 다녀가신 집엔 이웃사람들의 경탄과 축하가 줄을 이었다. 잠실아파트 27동 102호.
박 대통령은 1일 오후 아무런 예고 없이 이 아파트에 들러 입주자들과 살림살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판자촌 철거민 마을에 세운 이 외진 곳까지 대통령의 마음씀이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고마워했다.
대통령을 손님으로 모셨던 102호의 변재근씨(44) 가족은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젠 평생을 이곳에서 살렵니다. 더구나 이 집은 결혼 13년만에 처음 가진 내 집입니다.”
안주인 김춘자씨(35)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박 대통령이 잠실아파트에 나타난 것은 1일 오후 2시쯤. 예고가 없어 아파트 건축사무소에서도 몰랐다. 김춘자씨와 시아버지 변석규 노인(73)이 이삿짐을 옮기고 도배를 하느라고 집안이 어수선한 때였다.
박 대통령은 열려져 있는 문 앞에서 “수고하십니다”고 말하면서 현관으로 들어섰다. 런닝셔츠 바람이었던 변 노인은 깜짝 놀랐다. 황급히 중절모를 벗어들고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라고 인사를 했고 며느리 김씨는 간신히 “영광입니다”라고 말하곤 넋을 잃었다.
현관에 선 채로 이들의 큰절을 받은 박 대통령은 시아버지 며느리와 차례로 악수를 나누고 마침 이사를 도우러 왔던 김씨의 친구 이경자씨(35. 주부. 종로구 신문동)와도 인사를 나눈후 자상스럽게 살림살이 걱정을 해주었다.
“살림살이가 많은데 너무 좁지 않습니까”라는 박 대통령의 질문에 김씨는 “그래도 저희 집인데 즐겁 게 살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수행한 구자춘 서울시장이 “이 아파트는 두 집의 벽을 터서 한 집으로 쓸 수 있다”는 설명을 하자 박 대통령은 “빨리 돈 벌어서 두 집을 쓰십시오”라고 격려했다. 박 대통령은 마침 부엌에 타일을 붙이다 나온 김씨의 시아주머니 변정대씨(48)에게 “주인입니까”라고 묻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돌아간 후 변정대씨는 “대통령께서 손수 우리 살림을 둘러봐 주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해 처음엔 비슷한 분도 있구나”하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구 시장에게 “노인네를 모시고 있는 가구는 1층으로 젊은 사람만 있는 가정은 위층으로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대통령이 머무르는 동안은 불과 5분 정도였지만 5시간이 더 된 듯하다고 김씨는 말했다.
“하루종일 기쁨과 고마움으로 어쩔 줄을 몰라했어요. 저녁 때는 닭 2마리를 사와 잔치를 벌였지요.”
남편 변정근 씨에게는 전화로 대통령께서 다녀갔다는 기쁜 소식을 알렸다. 남편이 “어, 어” 소리밖엔 못하더라는 김씨의 말에 가족들은 또 한번 웃음꽃을 피웠다.
변씨는 20년 전 부산서 상경, 6년 전부터 대학동창과 함께 정원실업(중구 수하동24)이라는 조그마한 전기공사 청부업체를 자영하고 있다. 변씨는 종업원 5명과 함께 우선 환타로 자축연을 벌였다면서 함께 기뻐해 준 이웃에게 막걸리라도 대접해야겠다고 했다.
“대통령께서 한 사람 서민의 집에까지 와 보시고 살림살이를 걱정해주시는 걸 생각하면 한층 더 열심히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의욕과 용기를 갖게 됩니다.”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켠 방안엔 가난하지만 힘껏 사는 한 가정의 행복이 넘치고 있었다. 아직도 대통령의 체온을 간직한 채…….
당시 대통령을 목격한 ‘seleucos’ 블로거가 2009년 7월 16일 인터넷 포털 다음의 티스토리 블로그에 올린 글은 아래와 같다.
박정희 대통령의 인자함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정말 많은 일을 하셨지만 그 중에는 허허벌판 뽕밭이었던 잠실을 개발하여 서민들을 위한 5층짜리 주공아파트단지를 만들어 당시 많은 집 없는 서민들에게 살 곳을 제공해 주시고 오래토록 부담없는 가격으로 갚아나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많은 가난한 서민들이 아파트라는 것이 별로 없던 시절 세상 태어나 처음으로 작지만 효율적이고 꺠끗하고 안락한 공간에서 살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국민학생이었고 우리 집도 잠실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요.
어떤 날인가 종합운동장 쪽에서 형제들과 모여 놀다가 집으로 돌아 오는 오후 무렵에 승용차 한대가 저만치서 오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그것이 대통령께서 탑승하시고 계신 것을 알 리가 없었고 대동하는 다른 차도 없었기에 그저 차가 무척이나 깨끗하게 반짝이는 느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차가 1단지 아파트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제 생각에는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께서 잠실아파트를 차로 시찰하시고 돌아가시는 길이었던 것 같은데 항상 아버지처럼 국민들 특히 서민들을 보살펴주시고 잘 살게 해주시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시므로 당시로는 규모면에서 상당히 컸던 잠실주공아파트가 잘 지어졌는지 또는 주민들은 편안히 잘 그곳에서 사는지를 한번 비공식적으로 시찰해보시러 가까운 수행자 한두분 정도와 나오셨던 것 같습니다..
그차는 우리들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었긴 했지만 스쳐 지나가시던 차의 창문을 여시고 그 안쪽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따뜻하게 미소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대통령이라는 권위에 찬 모습이 아닌 정말로 다정한 아버지와 같은 미소였습니다.
처음에는 금세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미소와 차가 떠난 후 곧 박정희 대통령이란 것을 알아보고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감탄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에는 어린 마음들에도 우리나라가 잘 되고 있고 이제 더욱더 잘 살게 될 거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누가 특별히 설명해 주지 않아도 어렸지만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김정일이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김정일 우상화를 세뇌하고 김정일이 위대하고 고마운 분이라는 내용의 노래를 강제로 부르게 하며 세뇌를 시킨다 한들 밥을 굶게 만드는 김정일에 대해서 북한의 어린이들의 깊은 마음 속에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어릴 때였지만 박정희 대통령께서 지어주셨던 그 미소의 따뜻함은 충분히 느낄수 있었고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박정희 대통령의 그 인자하신 미소는 곧 국민에 대한, 그리고 어린이에 대한 또 서민에 대한 애정과 사랑의 표현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신 분.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 안에는 언제나 국민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난 후 우리 국민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고아가 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마음에서 희망을 빼앗아간 김대중과 노무현에 시달리다보니 더욱더 그리워지는 분이십니다..
잊혀지지 않는 박정희 대통령의 그 다정하셨던 미소가 떠오릅니다.
‘seleucos’ 블로거의 글은 조선일보 기사와 함께 30여년 전 아스라한 추억의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해 주고 있다. 두 글이 보여주는 현대사의 한 부분에서 뚜렷이 각인되고 있는 것이 ‘서민 대통령’의 모습이다.
국민 여론 80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는 박 대통령의 가장 두터운 지지층은 서민대중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서민의 편이라는 믿음을 준 유일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민심을 얻은 권력은 그래서 강력했다.
조선일보 방우영 명예회장은 그의 저서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박 대통령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농촌 출신다운 소박한 면도 있었다. 그의 밥 먹는 버릇은 독특했다. 보통 사람들은 국그릇에 밥을 말아 먹는데, 박 대통령은 밥그릇에 국을 부어 먹었다. 김을 먹을 때도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김에 척 갖다 대면 탁 붙었다. 옷차림도 검소해 계절별로 양복 하나를 정해놓고 늘 같은 옷을 입는 것 같았다. 어찌나 다림질을 여러 번 했는지 옷 표면이 반들반들 윤이 났다. 넥타이도 자주 바꾸지 않았다.
그의 서민적인 풍모는 흔하디흔하면서도 모진 세월의 풍파를 강인한 근성과 억센 힘으로 견디는 들풀 같은 이미지를 주고 있다.
서민대중은 들풀 같은 존재다. 서민들은 “대통령이 우리와 함게 있다”라는 굳건한 믿음을 갖고 있었고, 대통령은 그로하여 강력해진 권력으로 국가경영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할 수 있었다.
서민층의 압도적인 지지와 존경은 그에 대해 “독재” 운운하는 정치 선동의 구호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역사 속의 대통령과 맞짱을 뜨려는 분수 모르는 도전자들이 있긴 있지만, 강력한 민심의 지지를 읽지 못한 헛된 구호로는 한국인의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게 돼 있다. ◎
[좋아하는 사람들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