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공업 열정 담은 박정희의 ‘현대판 어찰’ 1960~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재미 과학자 김완희 전 컬럼비아대 교수가 나눴던 서신이 처음 공개됐다. 서울과 뉴욕을 오간 현대판 ‘어찰’이다. 박 전 대통령의 친필 서신 103통의 주제는 ‘전자공업’이었다. 서신에 담긴 대통령의 전자공업에 대한 열정은 오늘날 전자강국 코리아 도약의 원동력이 됐다.
한국 전자산업의 대부로 통하는 재미 과학자 김완희 박사가 1967년부터 79년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서 받은 서한을 보여주고 있다. 김 박사는 박 전 대통령의 친필 서한 103점을 2일 국가기록원에 기증했다. [김성룡 기자] | |
-박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은.
“1967년 8월 30일 대통령 요청으로 귀국해 한국의 ‘전기기계공업’(당시엔 전자산업이란 말을 쓰지 않음) 현장을 나흘간 둘러봤다. 이어 청와대에서 전자산업의 정의부터 선진 기술, 제품 동향, 각국의 육성책 등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 2시간 동안 놀라운 집중력으로 브리핑을 경청한 대통령은 즉석에서 내게 전자산업 육성책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 달라며 당시로선 거금인 20만 달러 지원을 약속했다.”
-막 태동하던 당시 한국 전자산업 현장을 둘러본 소감은.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시골 벌판에 벽돌로 대충 만든 공장에서 일제 라디오를 카피한 제품 등속을 만들고 있었다. 시멘트도 아닌 흙바닥에서 작업을 하는데, 부품이 바닥에 떨어지면 여공이 이를 집어 입으로 훅 한번 분 다음 옷자락에 닦아 끼워 넣는 식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첫 인상은.
“솔직히 별로였다. 작고 깡마르고 새까만 사람이 꽤나 무뚝뚝해 보였다. 한데 막상 대화를 트고 나니 의외로 섬세하고 마음 씀씀이가 깊은 분이었다. 식사를 처음 같이할 때 대통령은 내 밥숟가락 위에 손수 깻잎을 올려줬다. 작별인사를 하면서는 여비에 보태라며 2000달러가 든 봉투를 주었다. 상공부로부터 항공료만 겨우 지원받아 온 처지라 매우 고마웠다. 이듬해 3월 중간 보고차 서울에 갔는데 9일 머무는 동안 세 번을 만났고 그중 두 번은 독대였다. 그러면서 그의 예리한 두뇌, 행동력, 사려 깊음에 매력을 느끼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의 첫 편지를 받은 때는.
“68년 4월 27일이었다. 봉투며 누런 색 편지지가 너무도 초라해 이것이 대통령의 친서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후 10여 년간 대통령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대사관이나 관료들을 통해 메모를 전달받기도 했다. 육영수 여사와 내 아내 사이에도 몇 차례 서신이 오갔다. 한국을 찾아 청와대를 방문하면 어김없이 친필 사인을 한 누런 봉투에 얼마간의 여비를 넣어 직접 건네주었다. 어쩌다 집무실에 달러가 준비돼 있지 않으면 위층 비서실까지 직접 뛰어올라가 돈을 구해오기도 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맏딸 근혜양(앉은 두 사람)이 1976년 8월 11일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의 영정을 사이에 두고 김완희 박사 부부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오른쪽 사진은 박 전 대통령의 친필 서신. [김완희 박사 제공] | |
-전자산업 발전과 관련해 박 전 대통령에게 수많은 서신을 보냈다. 이것이 어떤 기여를 했다고 보나.
“대통령에게 전자산업이란 무엇인가, 왜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구실을 얼마간 했다고 믿는다. 일종의 ‘세뇌’랄까.”
-가까이서 본 박 전 대통령의 최고통치권자로서의 꿈과 희망은 무엇이었나.
“그는 ‘청계천 다리 밑에 사는 사람도 거기서 나와 보통의 집에서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대덕단지가 처음 만들어질 즈음 함께 시찰을 갔는데, 근처 언덕에 올라가선 아래를 내려보며 ‘난 여기를 세계적 전자단지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런 꿈, 원대한 희망이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마음을 끈 걸 게다.”
-박 전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은.
“무엇이든 그 자리에서 해결했다. 뭐가 문제다 얘기하면 바로 벨을 눌러 비서를 불렀다. 한번은 ‘미국에서 들어올 때면 국군의장대가 큰 칼로 아치를 만드는 환영식을 하는데 그게 외려 국가 이미지에 안 좋은 것 같다’고 하자 그 자리에서 시정을 명했다. 그 다음 들어올 때 보니 정말 없어졌더라.”
-70년대 정부의 산업 진흥책에서 전자산업이 빠진 채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짜이게 된 원인이 뭔가.
“상공부로선 전자 얘기만 나오면 대통령이 ‘김 박사에겐 물어봤느냐’고 하니 그 주제를 다루기가 귀찮고 싫었을 게다. 나로서도 전자산업을 명칭도 이상한 ‘중화학공업’에 끼워 넣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요즘 생각엔, 당시 중화학공업 범주에 전자산업이 들어갔다면 지금보다 훨씬 발전했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전자산업 발전책에 대한 조언을 하며 느낀 가장 큰 어려움은.
“관료들이 이 산업을 너무 모른다는 거였다. 체신부 장관에게 그 중요성을 설명하면 ‘전화랑 전자산업이 무슨 상관이냐’는 답이 돌아올 정도였다. 전자산업은 건설·자동차처럼 거대하고 생색도 나는 업종이 아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하지만 높은 부가가치를 지닌 산업의 특성 자체를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60년대 말부터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구인회 금성사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등 수많은 기업인과 만남을 가졌다. 이후락·김종필·김형욱 등 권력 실세와도 만남이 잦았다. 누가 특히 기억에 남나.
“당시 대통령 중심의 청와대 인사들과 기업인들에겐 놀라운 열정과 애국심이 있었다. 재일 기업인들의 역할도 컸다. 구인회 회장은 결기가 대단했다. 이병철 회장은 매우 실질적이고 실행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주저 없이 묻고 배웠다. 그런 자세에서 오히려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김 박사로 인해 서강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게 됐다는데.
“육영수 여사가 그리 전해줬다. 본인은 가사과에 보내고 싶었는데 박 전 대통령이 내 얘기를 하며 전자공학 전공을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실제 근혜양은 훗날 퍼스트레이디로 일할 때 우리나라 전자산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나.
“74년 육 여사가 돌아가시자 박 전 대통령에게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청와대에 칩거하는 일이 잦았기에 나도 이전처럼 연락을 취하기가 조심스러웠다. 해서 대통령에게 꼭 전할 말이나 서신이 있으면 의전실이 아닌 (근혜양 쪽의) 부속실을 주로 통하게 됐다. 부속실 직원에게 편지를 주면 30분도 안 돼 ‘근혜양에게 전달했다’는 답이 오곤 했다. 근혜양이 나(를 포함한 전자산업 분야)와 대통령 간의 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전자공학을 공부한 근혜양인 만큼 모르긴 몰라도 박 전 대통령이 이런저런 결정을 내리는 데 많은 조언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자전람회 등에도 대통령 대신 참석해 기업인들을 격려해 주곤 했다.”
-84년 미국에 돌아가선 어떤 일을 했나.
“미국 실리콘밸리에 정보기술(IT) 컨설팅 업체인 TACI 를 차려 최근까지 운영했다. 해외의 첨단 기술을 한국 기업과 연결해 주는 일종의 ‘기술 복덕방’ 역할을 자임했다.”
-70~80년대의 전자산업 진흥책이 밑거름이 돼 지금 한국은 세계적 IT강국이 됐다. 미래에 대한 조언을 한다면.
“무엇보다 정책 입안자들이 IT의 가치와 흐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또 대체에너지 산업처럼 당장은 돈이 안 되더라도 국가의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분야에 힘을 실어 줘야 한다. 지금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큰 힘도 오바마 정부의 강력한 그린IT 지원 정책이다.”
대담=곽재원 본사 중앙종합연구원장
정리=이나리 기자
김완희 박사는
▶ 1926년 경기도 화성군 출생, 경기중·서울대 공대 졸업
▶ 55년 미국 유타대 공학박사. ‘브루니 정리’의 예외 발견해 국제적 명성
▶ 57~79년 미 컬럼비아대 전자공학과 교수
▶ 67~79년 한국 정부 요청으로 전자공업 육성 진흥책 보고서 작성, 제 3·4차 전자공업 육성 5개년 계획 작성 보좌. KAIST·KIST 설립 지원
▶ 79~84년 컬럼비아대 종신교수직 내놓고 귀국, 전자공업진흥회 상근회장·전자공업협동조합 상근 이사장 등 역임
▶ 84년 전자시보(현 전자신문) 창간
▶ 84~2005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정보기술 시장조사, 컨설팅업체 TACI 설립·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