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출처; 국가보훈처.
1950년 6.25사변 동족상잔의 처절함을 잊어가는 6.25전후 세대들에게
, 그리고 전쟁고아로 피,눈물을 흘리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아비의 일생을, 나의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 전하여, 다시는 이 땅에서 6.25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 안보적인 차원에서 이 글을 쓴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터 누구와 인연을 맺고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좌우 된다고 한다.
나 또한 불행했던 한 시대에 태어나, 경찰관 이였던 아버지와 인연이 없었더라면, 혹독한 시련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해 본적이 없었다.
오늘날 청사에 길이 빛날 민주경찰의 초석이 되셨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켜준 경찰관이였던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경찰관의 길을 가고 있다.
1950년 나는 12살 초등학교 6학년 이였다.
그리고 그때 나의 가족은 부모님과 두 살 위인 누님 한분 등 4명이 살고 있었다. 당시 우리집은 송정여자 중학교 담장 바로 옆에 있었으며, 아버지는 전남 광산경찰서 사찰계 보도연맹 담당 형사였다
.
어쩌다 술 한잔 하시고 집에 들어오시는 날이면 무궁화 아름다운 삼천리강산 고귀한 우리겨레 살고 있는 곳 영광과 임무를 어깨에 매고 이 땅에 굳게 서다 민주경찰 (경찰 가) 그 노랫말이 지금도 내 귓가에 매아리 친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우리 아버지의 전부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비명에 가시면서 내가 어머니를 기억하는 전부를 가져가신것 같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다고 본다.
1950년 10월 깊어가는 가을 어느 날 밤으로 생각한다.
비명소리에 눈을 떠보니 피,투성이가 되어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어머니와 누님을, 후퇴하던 공비들이 잔인하게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있었다.
달빛이 비춰주는 창문사이로 아버지는 목에 죽창이 꽃인 체 말없이 누워 있었고, 나는 순간 공포와 불안속에서도 눈을 뜨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경찰가족은 씨를 말린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른쪽 무릅 관절에 죽창으로 상처를 입고서도 죽은척 하고 있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려 주위를 살펴보니 피,바다가 된 방안에는 아버지 어머니 누님 등 온 가족이 죽창에 찔려 참혹하게 죽어 있었다 . 그리고 어머니는 두 눈을 뜬체 였다.
날은 훤히 밝아오는데 나는 아버지 어머니 얼굴을 보는 순간 그렇게도 무서울 수 가 없었다.
나는 무서움과 다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서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얼마 후 동네 분 들이 오셔서 부모님의 시신을 거두어 마루에 안치해 주셨고, 그날 오후 태극기를 흔들며 아군들은 광주에서 송정리를 탈환하고, 진주 하였다 . 이렇게 해서 나의 부모님 생사의 갈림길은 불과 몇 시간 차이였고, 당시 주위의 아는 사람들의 안타가운 심정은 오죽이나 하였겠는가?
그 다음날 경찰서에서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친구 분들이 오셔서 부모님과 누님의 시신을 군용담요에 말아서 지개꾼이 지고 송정리 동 초등학교 뒤 공동묘지에 묻어 주셨다.
그때 아버지 친구 한분께서 이것은 아버지고, 어머니, 누님 묘소라고 분명히 일러 주었건만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찿을 길 없고, 이제 와서 이 못난 불효자는 땅을 치고 통곡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다만 서울 국립현충원 경찰간부 위패 봉안실에 경위 이금배 라는 이름 석자만 차디찬 대리석위에 새겨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비간부 위패 봉안실에는 6.25당시 영광 불갑산 전투에서 전사하신 삼촌 경사 이근체의 이름도 있다.
부모님을 공동묘지에 묻고, 그 다음 날 이였다.
경찰서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나에게 광주에 사시는 작은 아버지가 찿아왔다. 숙부께서는 아버지 친구 분들에게 조카가 20세가 되면 결혼시켜서 자립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남긴체, 우리집과 가제도구를 팔아서 처분하고, 나는 작은 아버지 집으로 갔다.
이곳에서 이틀밤을 잔 후, 나는 또다시 작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광주 양림동 소재 고아원에 수용 되었다.
당시 고아원에서는 미국에서 원조 해 주는 옥수수 가루가 우리들의 주식이 였다. 옥수수 가루에다 무 잎 말린 것을 썰어서 죽을 써주면 꿀 맛 같았다 . 그것도 하루에 두 끼 식만 먹고 살았다.
어느 봄 날 이였다, 너무나 배가 고파 하교 길에 논두렁에서 싹이 나오는 삐삐를 뽑아먹고, 식중독에 걸려 죽을 번도 하였다 . 그때 쌀밥 한번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 이였고, 지난날 나에게 이러한 소원도 있었는데, 오늘을 살아가는 신 세대들은 이해 하지 못 할 것이다.
1954년 2월 어느 날 이였다. 중학 3년을 고아원에서 졸업하고, 양말없는 검정 고무신에 내 키 만큼이나 긴 (구호품) 미군 시보레 잠바 을 입고 정처없이 송정리 역에서 열차를 탔다. 지붕도 없는 (연탄 싣는) 화물 열차 였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가며 서울역에 도착했다.
지금도 서울역 부근을 지나 칠 때면, 그 엣날 추억이 생각난다.
반세기가 훨신 지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역 본관 건물과, 남대문과, 남산길은 (지금은 소실) 변함이 없다
.
대합실 의자에 신문지 한 장을 덮고 새우잠을 자기 시작 했다. 신문지 이불에 대한 위력은 덮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모른다
.
어느 날 아침이 였다, 눈을 떠보니 20대 초반의 한 아가씨가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사과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사과를 다 먹고, 끌텅을 의자 밑에 버리기에 나는 그것을 주워 먹었다.
이것을 보고 가락국수라도 한 그릇 사 먹으라고, 몇 푼의 돈을 나의 손에 쥐어준 그때 고마운 아가씨가 칠순을 넘은 이 나이 에도 잊을 수 가 없다.
나는 성장 하면서 이것 저것 주서 먹어 내 배속에는 더러운 것이 많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병원 한번 가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는 성경 말씀을 나는 믿는다.
그 시절 서울역에서 생활하는 거지가 나뿐만이 아니였다. 그리고 모두가 손에는 깡통과 미군 수픈을 들고 있었으며, 밤이면 서로가 나무의자에서 자려고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나무의자를 차지하지 못 하는 날이면 세면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어느 날 몹시도 추운 아침이 였다.
전날 5-6세쯤 된 사내 아이가 손발이 붓고, 배가 고프다고 울고 있었는데, 대합실 문 옆에서 죽어 있었다.
이 어린 아이에게 따뜻한 물 한 모금이라도 주고 나무의자에서 쉬게 하였더라면, 오늘날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 겠는가?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내 일생을 통해 잊을 수 없는 아픈 추억이다.
1958년 고3때 일이다, 당시 서울역 건너편 언덕위에는 세브란스 병원이 있었다. 그리고 용산에서 서울역 경유 효자동까지 가는 전차가 다닐 때였다.
나는 전차표 한장이 없어 용산역에서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까지 걸어서 갔다 .한영사전과 참고서 을 사기위해 난생 처음으로 피,를 뽑아 팔았다. 링 켈 반병이 500cc다, 그때 받은 돈은 지금 물가시세로 약 15,000원 정도 였으며, 미군 야전용 식사 C레이션 한개도 받았다. 나는 이렇게 해서 돈이 필요 할 때 마다 피,를 뽑아 팔았다.
그리고 세번째 수혈을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 영향으로 이후 재생불량성 빈혈 의증이라는 진단을 받고도 잘 살고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 할 뿐이다.
그리고 그때 샀던 한영 사전은 나의 책장에 잘 보관하고 있다.
나는 언제인가 아들을 불러 아비의 피와 눈물 이였다고 말 하면서 전해줄 것이다.
현재 아들은 용인 대학을 졸업하고, 청와대 경호실 101경비단을 거쳐 서울시경 산하 경찰서 형사과 강력반 팀장으로 근무중이며,
딸은 영국에 유학하여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LG(영국현지법인)메니져로 국익을 선양하고 있다.
그리고 2007년 옥스포드대학 물리학 교수와 결혼하여 지난해 귀여운 딸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나는 전쟁고아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살아 왔지만, 아들 딸은 대한민국을 위해 봉사하는 훌륭한 일꾼으로 성장시킨 보람과, 더불어 인간 승리 라고 생각 한다.
그래서 2007년도 호국보훈의 달에 행자부 장관 표창장도 받았다.
내가 표창을 받기까지 수고 하신 국가보훈처 선양 사업과 李香淑 공무원에게 늦게나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도 남은 인생을 국가유공자 후예답게 6.25 전,후 세대들에게 결여된 반공 의식을 고취 시키고,
불우하게 살아온 6.25전몰군경 고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면서 훌륭하게 마무리 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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