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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청와대 핵심 참모에게 건넨 친필 극

여동활 2009. 4. 6.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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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기자 칼럼] 더 이상 참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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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4.05 23:17

유용원 군사전문기자
'극비(極秘)! 유도탄 개발 지시… 사거리 200㎞ 내외의 근거리.'

1971년 12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청와대 핵심 참모에게 건넨 친필 극비 메모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사일은 물론 포탄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기술 수준이었지만 주한미군 철수, 북한의 잇따른 도발 등 절박한 안보위기 속에서 '무리한' 지시가 내려졌던 것이다.

그로부터 6년 9개월여가 지난 1978년 9월 26일. 충남 안흥 시험장에서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地對空) 미사일을 꼭 빼닮은 미사일이 화염과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껍데기는 나이키 미사일과 흡사하지만 속은 완전히 뜯어고친 첫 국산 지대지(地對地) 미사일 '백곰'이었다. 사정거리는 180㎞로 평양까지 공격할 수 있었다. 이날 백곰이 목표지역에 정확히 떨어짐으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탄도미사일 개발 성공국이 됐다.

당시 북한은 사정거리 55~70㎞의 구 소련제 프로그 5·7 로켓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 지대지 미사일은 없었다. 하지만 국산 미사일 개발 성공에는 '족쇄'가 따랐다. 개발과정에서 미국의 기술지원을 받으면서 '사정거리 180㎞ 이상의 미사일은 개발 및 보유를 하지 않는다'는 일명 '한·미 미사일 협정'을 체결했던 것이다.

그 뒤 남한의 탄도미사일 대북(對北) 우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1982년 전두환(全斗煥) 정권은 국산 탄도미사일 개발의 주역인 국방과학연구소(ADD) 미사일 개발팀을 해체했다.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과 그 운반수단인 탄도미사일 개발을 견제하던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북한은 1981년쯤까지 이집트로부터 사정거리 300㎞의 구 소련제 스커드 B 미사일을 도입해 분해한 뒤 역설계, 1984년 자체 생산한 스커드 B 시험발사에 성공한다. 그 뒤 북한의 탄도미사일 개발은 순풍에 돛을 단 듯 발전을 거듭했다. 사정거리 500㎞의 스커드 C 시험발사 성공(1986년), 일본 본토 대부분의 지역을 사정권에 둬 일본을 긴장하게 한 사정거리 1300㎞의 노동미사일 시험발사 성공(1993년)이 이어졌다. 1998년 8월엔 대포동1호가 일본 열도를 넘어가 1600여km 떨어진 태평양상에 떨어졌다.

이 기간 중 우리나라는 어떠했는가. 1980년대 초반 ADD 미사일 개발팀의 해체로 완전히 손을 놓고 있다가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이 발생하자 유사시 북한에 대한 전략 보복 타격수단으로 탄도미사일의 필요성이 급부상했다. 부랴부랴 탄도미사일 개발을 재개했으나 개발팀 해체의 후유증은 컸고 1986년에야 백곰을 개량한 '현무' 미사일(사정거리 180㎞) 시험발사에 성공한다.

그 뒤로도 북한의 탄도미사일이 500㎞·1300㎞·2500㎞로 사정거리를 늘려가는 사이 우리는 2001년 한·미 미사일 협정이 개정될 때까지 180㎞에 고착돼 있었다. 2001년 한·미 양국은 협상을 통해 군용 탄도미사일의 경우 사정거리 300㎞, 탄두중량 500㎏까지 생산·배치·보유할 수 있도록 하는 새 한·미 미사일 협정을 체결한다. 그러나 이 협정은 사정거리 300㎞ 이상의 탄도미사일에 대해 연구개발만 가능할 뿐 시제품 제작과 시험발사는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번에 북한은 장거리 로켓 발사에서 비록 인공위성의 궤도진입에는 실패했지만 98년 발사된 대포동1호(사정거리 2500㎞)에 비해 사정거리를 2배 이상 늘리는 데는 성공했다는 평가다. 이에 따라 우리의 탄도미사일 개발 전략도 완전히 새롭게 짤 때가 됐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족쇄'를 풀어버릴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