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은행대출 청탁에 ‘대통령 빽’도 소용없었네

여동활 2009. 4. 9.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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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대출 청탁에 ‘대통령 빽’도 소용없었네
‘포청천 비서실장’ 김정렴 스토리
1997-04-30 김정렴(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ㆍ 現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김정렴 회장. 2009년 3월 ⓒ 좋아하는 사람들

대통령이 자신의 친인척을 엄격히 관리해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제가(齊家)에 실패한 대통령이 치국(治國)이나 평천하(平天下)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권으로부터 친인척을 떼어놓는 데에 무척 엄격했다. 아무리 가까워도 예외가 없었다.
내가 한국은행에 근무할 때 선배였던 김봉은 상업은행장이 73년 어느날 조심스럽게 나를 만나자고 했다. 사무실에서 만났더니 그는 어떤 이에 관한 얘기를 하며 “박 대통령의 친척 중에 그런 분이 있느냐”고 물었다. 은행장은 “그 사람이 ‘박 대통령과 가깝다’며 담보도 없이 융자해 달라고 한다”며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상의해 주어서 고맙다. 나도 도울 테니 절대로 소신을 굽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사람은 박 대통령의 바로 위 누님이었다. 제조업을 하는 아들이 어머니를 통해 쉽게 대출받으려 한 것이다. 그 아들은 원래 잡음이 많아 박 대통령이 청와대 출입을 금지해 놓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누님은 어머니 대신 박 대통령을 업어 키운 무척 가까운 혈육이었고 아들은 이를 이용하려 했던 것 같다. 이런 대출청탁이 바로 청와대에 보고된 것은 이권개입을 감시하는 제도 덕분이었다.

박 대통령은 금융기관과 조달청, 전매청에 “국회의원이나 권력기관에서 엉뚱한 부탁을 하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라. 보고하지 않으면 기관장을 문책하겠다”는 엄명을 내려놓고 있었다.
실제로 몇몇 은행장으로부터 “공화당의원 누구 누구가 대출을 부탁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박 대통령은 의원들에게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되며 다시 그런 일이 있으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친필 경고서한을 보냈다.

나는 박 대통령 누님 같은 청탁건이 또 있겠다 싶어 조치를 취했다. 김 행장에게 정례적인 은행장 회합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의 정식 요청”이라며 나의 얘기를 다시한번 전하도록 부탁했다. 나는 “대통령의 친인척으로부터 부당한 융자나 다른 요청이 있으면 응하지 말고 꼭 비서실장이나 경제수석 비서관에게 연락해 달라”는 당부를 전했다.

나는 그 대통령 누님에 관한 일은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가까운 누님에게 섭섭한 감정을 느낄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친인척 중 누가 이권에 개입한 것이 드러나면 청와대 출입을 금지하도록 했다. 내가 근무하는 동안 출입금지를 당한 친인척이 3~4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출입금지로 문책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민정비서실에서는 이 사람들을 포함해 이권에 개입할 소지가 큰 인사들의 명단을 만들었다. 비서실 직원들은 가끔 시중은행을 돌며 “이런 사람들이 대출을 부탁하지 않더냐”고 확인하곤 했다.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서울 강북의 큰 선거구가 두개로 나뉘어 선거구 하나가 증설되었다. 여기에 박 대통령의 6촌동생이 공화당 공천을 받으려고 당의 내정자인 정래혁(후일 국회의장 역임)씨와 심하게 경합하고 있었다. 그 친척은 상수도 공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국회의원에 출마할 정도의 인품은 갖추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친인척 중에는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속한 사람들이 많았다.
당의 난처한 입장을 보고받은 박 대통령은 일언지하에 정씨에게 공천줄 것을 결정했다.
그러자 이 친척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는 박 대통령과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내가 박 대통령이 마음 속으로 정한 진짜 후보”라며 맹렬히 선거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공화당은 바짝 긴장했고 법적으로는 그의 출마가 하자가 없는 것이어서 손을 쓰지 못했다.
이 사정을 전해들은 박 대통령은 화를 내었다
“국회의원은 아무나 하는 건가. 자격도 없으면서….”
박 대통령은 “국회의 존엄성을 위해 그 사람이 자진해서 출마를 취하하도록 하라”고 비서실에 엄명을 내렸다. 민정, 정무비서실은 많은 고생 끝에 겨우 그를 단념시킬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친인척의 이권개입뿐만 아니라 분수에 맞지 않는 이와 같은 처사도 엄히 다스렸던 것이다.
박 대통령 내외는 일가 친척에게 엄한 얼굴만 보인 것은 아니다. 생계나 다른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는 직접 자상하게 보살펴주었다. 그 대신 친인척 한사람 한사람에게 대통령 일가를 빙자해서 이권에 개입하면 절대로 안되며 이를 위반할 때는 엄벌하겠다는 방침을 알리고 자숙을 당부했다.

이권개입이 생기면 이를 예방하지 못한 비서실 담당자도 엄한 문책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문제가 있을 때는 시정을 엄하게 지시했기 때문에 친인척에 관한 정보보고는 사실과 틀려서는 안되었다. 민정비서실 직원들은 다른 비서실 못지않게 고생이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