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방위산업에 헌신한 엘리트 관료의 순직

여동활 2009. 4. 2. 22:31

방위산업 비서관 참변 “살려내!” 대통령 애절한 호통
방위산업에 헌신한 엘리트 관료의 순직 / 이석표 전 청와대비서관 위령비 이전 제막 / “고인이 있었기에 국방과학기술 꽃피었다”
2009-04-02

이석표 전 청와대비서관 위령비 이전 제막


▲1일 오후 국방과학연구소(소장 박창규)는 육군6군단 통합훈련장 안에 위치한 총포탄약시험장에서 방위산업에 헌신하다 순직한 이석표 전 청와대 비서관의 위령비 이전 제막식을 거행했다. ⓒ 대덕넷

북한의 로켓 발사를 앞두고 미국, 일본 등 국제사회의 우려와 경고가 연일 쏟아지는 일련의 사태와 더불어 한국의 방위태세에 대한 불안이 가시지 않고 있는 가운데, 자주국방의 전위에서 헌신하다 순직한 한 충혼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모임이 1일 경기도 연천에서 거행되었다.

1971년부터 1977년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청와대 경제제2비서실에서 방위산업 육성에 헌신하다 순직한 이석표 비서관이 그 주인공. 이날의 행사는 국방과학연구소(소장 박창규ㆍADD) 주관으로 ADD의 경기도 연천군 소재 종합시험단 총포탄약시험장에서 고인의 위령비를 이전한 제막식이었다. 

이 비서관 위령비의 이전 제막식에 관하여는 지난 3월 31일 문화체육관광부가 뉴스포털 사이트 ‘대한민국 정책포털’ 보도자료를 통해 예고한 바 있고, 이를 4월 1일 연합뉴스, 국방일보 등이 보도했으며 그중 대덕연구개발특구의 뉴스포털 ‘대덕넷’이 비교적 상세한 현지 보도를 했다.

육군6군단 통합훈련장 안에 위치한 ADD의 총포탄약시험장(일명 ‘다락대’)은 1970년 8월 ADD 창설과 더불어 만들어져 각종 화력무기체계의 화력 및 성능시험을 실시해온 시설이다. 최근 한탄강에 홍수조절용 댐이 건설되면서 강변 시험장 안에 있던 이 비서관의 위령비가 수몰이 불가피해 지난 1월 위령비를 보수한 후 시험장 연구동 앞으로 이전해서 제막식을 거행했던 것.

비서관의 참변에 애절하게 호통치던 대통령의 모습


▲고 이석표 비서관(왼쪽)과, 제막식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오원철 수석(오른쪽). ⓒ 대덕넷

이석표 비서관은 박 대통령의 강력한 방위산업 육성 지침에 따라 청와대 경제2비서실(수석 오원철)에서 주요 국산병기체계 개발과정을 직접 지휘하던 중 1977년 5월 17일 ADD의 총포탄약시험장 입구에서 실시한 20밀리 발칸포 사격시험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로 참변을 당했다.
이 비서관은 발칸포의 기능장애가 일어나자 이를 직접 살펴보던 중 포탄이 터지는 바람에 유혈이 낭자한 채 쓰러져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던 것.

‘대덕넷’의 보도에 따르면, 이를 지켜본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방위산업팀장인 오원철 경제2수석에게 크게 호통을 치고 서울대병원장에게 전화해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이 비서관을 무조건 살려내시오!”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오원철 수석은 “호통 치고 살려내기를 당부하던 대통령의 애절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오원철 수석은 또 이석표 비서관에 대하여 “평소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충만해 있었다”며 “부여된 임무는 반드시 달성하고 마는 책임감이 강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이석표 비서관은 5월 17일 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치료중 같은 달 26일 순직했다. 28일 고인의 모교인 서울대에서 영결식이 거행되고 그해 9월 1일 순직 현장에 위령비가 건립됐었다.

닉슨독트린이 방위산업의 단초 


▲1972년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국산병기 시험발사를 참관하던 중 병기를 손수 점검해 보고 있다. ⓒ 정부기록사진집

한편 오원철 수석은 저서 <한국형 경제건설>에서 1970년대의 방위산업 육성과 관련하여 미국이 1968년의 1.21 청와대 습격사건과 1월 23일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 일련의 도발행위에 대하여 응분의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닉슨 독트린에 따라 아시아에서 더 이상의 짐을 지지 않겠다는 의지만을 확고히 보여주었다”면서 “혈맹이라고 생각했던 미국으로부터 당한 엄청난 충격과 배신”이 국산병기 개발의 단초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으로부터 고성능 무기를 우리 마음대로 사올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파는 것도 엄청난 바가지를 쓰고 사와야 하므로 “우리 손으로 만들자”며 “박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기치로 내걸고 전력증강사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방위산업의 지휘본부는 청와대의 오원철 수석을 팀장으로 하는 경제2비서실. 오 수석은 상공부의 김광모, 이석표, 권광원 과장 등 엘리트들로 경제2비서실 진용을 갖추고 “국가대사를 맞게 되었으니 뼈가 가루가 되도록 노력하자”고 다짐했었다.
박 대통령이 이러한 오 수석을 공개적으로 “국보(國寶)”라고 칭찬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국립서울현충원 박 대통령 묘소를 찾은 오원철 수석. 그는 박 대통령 묘소를 항상 아침에 참배한다고 말하고 있다. ⓒ 오원철 홈페이지(http://www.ceoi.org)

고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국방과학기술 꽃피웠다

이석표 비서관의 동료였던 김광모 비서관의 공개 기록(김광모 홈페이지 http://kmokim.com)에 의하면 이 비서관을 앗아간 20밀리 발칸포는 미국이 전투기 탑재용으로 개발한 것으로 미국에서도 가장 현대화된 대공포(對空砲)였다. 남북대결을 예상할 때 남한이 가장 두려워한 것 중의 하나가 북한의 AN-2라는 프로펠라 비행기인데 이것은 레이다망에도 잡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잡힌다고 하더라도 이를 공격할 수 있는 병기가 없었다는 것. 그러므로 1분에 3천발을 연속발사하는 발칸포는 한국군에게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대공포였다.
방위산업 관계자들은 “순직한 이석표 비서관의 희생정신에 힘입어 20밀리 발칸포는 완전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으며, 특히  김광모 비서관은 2003년 서해에서의 남북 고속정 충돌사건을 예로 들면서 “그때 빛을 본 것이 20밀리 발칸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2월 부임한 ADD의 홍종태 총포탄약시험장장도 당시 발칸포 개발과정의 실무 담당자였던 관계로 이 비서관의 순직 상황을 지켜본 증인.
1일 위령비 이전 제막식에서 그는 “쾅 소리와 함께 이 비서관이 차량에서 떨어졌을 때(차량 탑재형 발칸포였음 : 편집자 주) 소리와 진동 때문인 줄 알아 안심하고 있었는데 결국 큰 사고를 당했다”면서 “앰뷸런스를 불러 101야전병원으로 후송하는데 셔츠가 다 젖을 정도로 피를 흘리면서도 현장을 걱정하신 그분은 진정한 국방과학기술의 기여자였다”라고 회고했다. 이어서 그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 실무자가 시험장장이 돼 고인의 위령비 이전 제막식을 거행하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면서 “앞으로도 시험장 내에서 다양한 시험평가를 수행할 때 ‘안전’을 최우선으로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박창규 ADD소장은 추모사에서 “국방과학연구소가 좀 더 철저하고 치밀하게 준비를 했으면 이런 참사는 없었을 것”이라고 애도하면서 “조국근대화와 자주국방을 위해 헌신적으로 공무를 수행하다 순직한 고인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국방과학기술 발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ADD에는 이석표 비서관의 아들 이병용 박사가 부친의 뜻을 이어 30년간 복무하고 있는 사실이 알려져 추모객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고인의 위령비 이전 제막식이 거행된 총포탄약시험장은 1973년 6월 19일 박 대통령이 직접 무기체계 시사회를 참관한 곳으로 최근에는 155밀리 K-9 자주포, K-2 흑표전차의 시험평가를 수행하는 등 군 전력증강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ADD 측은 향후 한탄강댐 건설과 관련하여 시험장이 부분 이전되는 것을 계기로 국방 특수화력시험장으로 기능을 확대보완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석표 비서관 유가족의 분향. ⓒ 대덕셋

‘대덕넷’은 이날 제막식에 고인의 부인 정순영 여사 등 유가족과 박창규 ADD소장, 오원철 수석을 비롯해 청와대 국방비서관, 군지휘관(이홍기 6군단장, 권혁순 5사단장, 박남수 26사단장, 박종선 28사단장, 허일회 65사단장, 김진원 포병여단장, 조성수 5사단 기무부대장), 방산업체 관계자(류진 풍산회장, 남영선 한화 사장, 김기호 삼성테크윈 상무) 등 50여명이 참석했다고 전했다. ◎

[좋아하는 사람들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