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박 대통령이 1만3000t 프레스 앞에서 눈시울 붉힌 이유는 |
박근혜 대통령은 1998년 4월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국회에 입성한 그는 첫 상임위로 산업자원위원회를 선택했다. 이공계 출신(서강대 전자공학과)이고 국가산업 발전의 초석을 다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산자위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국영 기업체였던 한국중공업은 매년 국회의 국정감사를 받는 피감기관이었다. 때마침 국회의원이 된 박 대통령은 그해 외부 국감 현장으로 창원국가산업단지 내 한국중공업을 찾았다.
- 창원 국가산업단지 내 두산중공업 공장에는 국내 최대 규모인 1만3000t급 프레스가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인사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중공업을 찾은 국회의원 대부분은 남자였고 박 대통령만 여자였다. 다른 국회의원들이 외부에 나가 술자리를 겸한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박 대통령은 게스트하우스인 영빈관에 묵었다. 홀로 적적하게 지내실 것 같아 한국중공업 여직원 모임인 ‘한화(韓花)회’ 회장이 방으로 찾아가 말벗을 해드렸다. 다음 날 현장 시찰 때 박 대통령이 대형 프레스 앞에서 한참 동안 서 계셨던 기억이 난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눈물을 지켜본 한국중공업의 1만3000t급 초대형 프레스는 창원산단을 상징하는 핵심 설비다. 당시에는 대한민국에서 한국중공업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던 설비였다.(최근 창원산단 내 세아베스틸도 도입했음.) 원자로 외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철을 압착하는 이 초대형 프레스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이 프레스를 갖고 있는 한국중공업은 ㈜현대양행이 전신으로, 1970년대 초반 창원산단에 설립된 기업이다. 박정희 정부가 창원산단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외자유치 등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대한민국의 대표적 중공업 업체다. 현대양행은 1980년 공기업으로 전환, 한국중공업으로 바뀌었고 2001년 민영화가 추진되면서 현 두산중공업으로 사명이 변경됐다. 현재 두산중공업은 발전소, 대형 선박, 플랜트에 들어가는 터빈과 모터 등 핵심 부품을 제조하는 연매출 8조원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두산중공업의 생산품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세계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두산중공업 등 국내 40여개 대기업과 2300여개 중소기업이 밀집한 창원산단은 오는 4월 1일로 설립 40주년을 맞는다. 창원산단은 1970년대 초반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직접 지시해 건설한 산업단지로, 현재 국내에 가장 많은 고용인원과 입주업체 및 매출액을 기록 중인 산업화의 심장이라 불린다.
마산, 진해와 통합되기 전 인구 50만명이 거주하는 옛 창원시는 산업단지가 조성될 1974년 당시만 해도 행정구역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창원시는 경상남도 창원군의 일부였다. 당시 창원군 일대는 염전이 많았고 넓은 들에 간간이 초가집이 보일 정도의 시골이었다. 지역 인구는 1만1600명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창원시 성산구, 창원군으로 나뉠 정도로 커졌고 거주인구는 50만명으로 44배나 늘었다. 현재 마산, 진해를 포함하는 통합 창원시는 인구 110만명에 육박하는 메가시티다.
기초공사가 마무리되고 기업체의 입주가 시작된 1974년 당시 창원산단에는 24개 업체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당시 고용인원과 매출액, 수출규모 등은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창원시 기업사랑과 송성재 과장은 “당시는 공장을 짓는 단계라서 매출이랄 게 없던 시절이다. 창원시라는 행정구역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자료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경남 창원군이 쪼개져 창원시와 마산시라는 새로운 행정구역이 탄생된 건 지난 1980년의 일이다.
1980년 창원 시정이 시작된 이후의 자료와 비교해도 창원산단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1980년 기준 120개의 입주업체는 2013년 말 현재 2410개로 늘었다. 고용인원은 1980년 당시 2만8000명에서 현재 약 10만명으로 늘었다. 산단 전체의 매출 규모도 1980년 총 4500억원에서 지난해 약 50조원을 달성했다. 34년 전과 비교해도 약 100배 이상 커졌다. 단일 국가산업단지의 매출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해외수출액은 1980년 약 2억3000만달러에서 지난해 200억달러로 증가했다.
창원산단은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 시절 8차례나 방문했을 정도로 많은 공을 들인 산업단지다. 농기계를 만들 경공업 설비조차 변변치 않던 시절, 박 대통령은 국력 보강과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창원단지 조성에 팔을 걷어붙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창원산단을 설계한 사람은 오원철(86) 전 청와대 경제2수석이다. 그는 최근 주간조선과 만나 창원산단 40돌을 맞은 소회를 밝혔다. “벌써 40년이 지났군요. 우리는 병기 생산과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단지가 아닌 기지를 지었던 겁니다. 지금도 이런 산업단지 모델이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했던 것처럼, 이를 테면 ‘공업 조직가’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미래를 내다보고 산업의 방향을 정하고, 또 실제로 현장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창원산단에는 탱크와 장갑차 등의 방위산업체들이 대부분 입주해 있다. 비행기 부품과 각종 화기의 부품도 모두 이곳 창원에서 만든다. 원자력발전소에 들어가는 원자로와 부품, 터빈 등의 국산화가 가능해진 것도 창원산단 덕분이었다는 분석이다. 한때 창원산단이 국내 핵무기 개발을 위한 전초기지였다는 말이 회자된 적도 있지만 박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면서 관련 자료가 모두 사라져 확인할 길이 없는 상태다.
박정희 대통령은 창원산단을 일종의 국가 병참기지로 고려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안에 바다와 닿을 수 있으면서도 넓은 평야지대를 가진 창원을 선택한 것은 군사적 활용가치를 먼저 고려했기 때문이다. 실제 이곳에 입주한 대기업들은 모두 정부의 방산물량을 받아 생산하며 성장했다.
오원철 전 수석은 “국력을 키우려면 무기가 있어야 하고 무기를 만들려면 기계가 있어야 한다. 원자력발전소를 짓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 육성이 절실했다. 미국이 창원기계산단을 왜 집요하게 조사하고 그토록 반대했는지는 잘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창원을 공장지와 배후지로 구분 짓는 창원대로는 당초 폭 50m, 왕복 10차선(현재는 8차선으로 축소)으로 조성됐다. 유사시 비행기 활주로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창원대로변의 일부 신호등은 1990년 중반까지 비행기 이착륙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도로와 평행으로 접을 수 있게 설계됐었다고 한다.
- 창원 국가산업단지 전경.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1980년대 중후반 남성 기능공들의 메카로 성장한 창원산단은 노사분규로 홍역을 앓기도 했다. 산단 내 근로자 수가 많았고 특히 중공업 중심의 금속노조는 창원산단에서 강성 파업으로 악명을 떨쳤다. 통일중공업이 대표적 업체로 꼽힌다. 한국산업단지공단 황석주 동남지역본부장의 설명이다. “1980년대 노사분규는 정말 심각했다. 당시 근로자들은 연간 10% 이상의 임금 인상 요구를 관철시켰다. 하지만 지금은 노사분규 자체가 사라졌다. 과거 분규가 심했던 기업이 무너지고 노사문화가 선진화된 결과다. 공단이 집적화돼 있어서 특정 업체가 횡포를 부릴 수 없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금세 외부에 노출된다. 요즘에는 현대자동차의 노사협상 정도만이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관심을 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통일중공업처럼 회사의 이름이 바뀐 곳도 꽤 있다. 통일중공업은 현재 S&T그룹이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창원산단에 둥지를 틀었던 대한중기는 기아기공에 인수됐다가 부도가 나면서 현대자동차로 넘어가 현재 현대위아라는 회사로 남아 있다. 주로 공작기계를 생산하는 현대위아는 연매출 5조원 안팎의 알짜회사가 됐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기업 인수합병의 대가였다. 그런 그가 직접 공장을 세운 첫 번째 회사가 바로 대우중공업이었다. 그러나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되면서 두산인프라코어로 사명이 바뀌었다. 이곳에서도 공작기계를 만든다. 삼성 계열 회사로는 방산업체인 삼성테크윈만 남고 삼성항공 등은 창원산단을 떠났다. 창원산단에서 회사 명칭을 유지하고 있는 대기업은 LG전자가 대표적이다. 산단 입주 당시 금성사에서 현재의 LG전자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오너는 그대로다.
황 본부장의 말이다. “산단이 처음 생길 때 박정희 대통령께서 재벌 총수들을 불러놓고 창원에 공장을 한 개씩 지으라고 했다. 당시 재벌들은 창원의 옛 지명인 어창군이 어딘지도 모를 때다. 각종 정부 지원과 입주 여건이 워낙 좋아 반대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30여개가 넘은 국내 대기업들이 창원산단에 입주했고 협력사가 모이면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삼성과 LG 정도를 제외하면 상당수 대기업들이 무너지며 이름이 바뀌었다. 산단 내 기업들의 변천사가 한국 기업의 변화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요즘 산업단지공단은 단지 내 입주기업의 신증축을 비롯해 다양한 민원을 대행해 주고 있다. 창원대로 중간쯤에 위치한 산단 동남본부 사옥은 1972년 박정희 대통령 당시 건설된 것으로 1992년 증축됐다. 과거에는 산업단지공단 동남본부 자체가 창원산단 내에 위치한 독립된 공단이었다. 초대 이사장은 상공부 고위관료를 지낸 최종명씨였다. 동남본부 사옥의 대각선 방향에는 과거 박근혜 영애가 설립한 한백직업훈련원이 있었다. 1977년부터 이 훈련원에서 배출된 인력은 산단의 기능공으로 충원됐다. 현재는 한국폴리텍대학 등이 부지를 사용하고 있다.
황 본부장의 사무실에는 1972년을 전후한 시기 박정희 대통령이 산단을 방문한 사진들이 여러 장 걸려 있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박 대통령뿐 아니라 아들 박지만 EG 회장과 최각규 전 장관, 차지철 경호실장 등이 자주 등장한다. 안경모 당시 수자원공사 사장도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국가기반시설 공사는 모두 수자원공사에서 맡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찍은 당시 사진들은 공단에 오랫동안 재직하다가 퇴직 후 사진관을 차린 공단 출신 인사가 제공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 이후 전직 대통령이 방문했을 당시 사진도 꽤 있다. 동남지역본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8차례 이곳을 다녀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경호가 가장 삼엄했던 걸로 기억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선 유세 당시 잠시 들러 화장실만 이용하고 가셨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방문 일정을 잡았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취소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다녀가지 않으셨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 2차례 이곳을 찾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4월 1일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초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당이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해 참석을 포기했다고 한다.
동남지역본부에서 산단으로 진입하는 간선도로 입구에는 산단 근로자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낡은 상가가 하나 있다. ‘내동상가’로 불리는 이곳은 1980년대 이후 산단의 근로자들이 즐겨 찾던 곰탕집 등이 아직 운영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주인이 바뀌고 상가는 낡았지만 산단 근로자들의 땀과 사연이 맺혀 있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초창기 산단 내에는 포장마차가 많았다고 한다. 기업이 입주했지만 배후단지 조성이 늦어지면서 저녁을 겸해 술을 한잔 하려면 마산시까지 나가야 했다. 그래서 산단 근로자들이 퇴근할 때쯤 공장 주변에 수백 개의 포장마차가 순식간에 들어서고 새벽이면 다시 철수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고 한다.
창원산단은 이곳에 입주한 한 업체의 사장 말대로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IMF 외환위기 시절에도 체감경기가 떨어지지 않은 지역 중 하나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기능공 또는 단순 숙련공 위주의 산업이 낡은 패러다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경남도청, 창원시청, 그리고 입주기업이 만든 창원시 상공회의소, 한국산업단지 등 산단의 유관 기관은 모두 창원산단의 낡은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창원시 정충실 경제재정국장은 “이제 중저가 기술의 한계점에 와 있다. 다가올 100년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고부가가치산업으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산학연의 끈끈한 연계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창원시는 이를 위해 구조고도화사업과 산단 혁신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창원시는 향후 산단 구석구석에 각종 편의시설을 건설하고 문화와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확보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산단 내에서는 구멍가게조차 허가되지 않았다. 근로자의 불편함이 가중되면서 숙련된 인력의 이직률이 높아졌고 산단 내 제조업 근무를 기피하는 연구원이 늘었다. 민간 주도의 대형 R&D센터도 만들어진 적이 없다. 대기업 중심의 연구인력이 있다지만 주말이면 서울로 올라가기 바쁘다. 노후 산단을 문화와 기술이 공존하는 ‘행복산단’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지적은 이런 배경에서 제기된 것이다.
경남도에 따르면 국내 기계산업기술의 경쟁력은 세계 8위 수준이라고 한다. 그러나 속살을 들여다보면 8위라는 순위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고급기술이 필요한 분야에서의 수준은 계속 하락해 왔고 외국 의존도가 커졌다. 일반기술, 즉 단순기능공이 맡는 낮은 단계의 기술력만 높아졌다. 경남도 윤주각 사무관은 “첨단기술 수준은 한때 최고 30% 이상 확보된 상태였지만 최근에는 11%대로 떨어졌다. 나날이 발전하는 첨단기술을 따라가기는커녕 일본, 독일, 미국 등과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첨단기술 시장은 1~2등 기업이 시장을 장악하는 구조라는 점에서 산단의 미래는 어둡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산단 내 대기업들은 협력업체에 첨단설비를 갖출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 현재 국내 중소업체는 중공업 제품 설계 및 생산을 위한 첨단장비 대부분을 일본과 독일 등지에서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창원산단에는 국책연구기관으로 전기연구원과 재료연구소가 있다. 이곳에 있던 기계연구원은 대덕으로 옮겨갔다. 첨단기술을 연구하는 국책기관을 유치하고 이를 산업체와 연관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고급 인력을 배양하기 위한 교육기관의 추가 설립도 경남도와 창원시가 함께 고민하는 부분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원산단은 현재 구조고도화와 산단혁신 프로젝트를 통해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구조고도화는 단지 내 다양한 편의시설과 거주시설을 만들어 고급 인력을 유치하는 데 필요한 기반을 구축하는 걸 말한다. 여기에는 각종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소프트웨어적인 부분도 포함된다. 산단의 혁신을 위해서는 향후 4년간 총 8500억원이 투입된다. 첨단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제조업과 연계하는 융복합화를 통해 현재 11%대인 첨단기술 수준을 2034년까지 50%대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창원산단은 세계 5대 명품 기계산업 클러스터로서 일본,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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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회고, "무조건 히타치보다 크게”
정장열 부장대우
입력 : 2014.03.30 15:52 | 수정 : 2014.03.30 15:55
- 창원산단의 산파,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사진=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1973년 봄인가, 박정희 대통령이 진해에서 열린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나서 창원으로 가보자고 해요. 창원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설 현장을 직접 보자는 거예요. 함께 차를 타고 진해에서 창원으로 들어가는데 비가 와서 길이 엉망이었죠. 달구지길 정도의 소로를 가다가 운전사가 ‘더는 못가겠다’고 해요. 그때 뒷좌석의 박 대통령이 ‘어디쯤 지을 거냐’고 묻더군요. 제가 가물가물 보이는 산들을 가리키며 ‘저기 저기까지 다 쓸 겁니다’고 답했죠. 박 대통령이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됐구먼’ 그래요. 배포가 큰 양반이 구상한 규모랑 맞아떨어진 셈이죠. 비오는 날 그렇게 오케이를 받았습니다.”
창원산단의 산파 역할을 한 오원철(86)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아흔이 가까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창원산단의 탄생에 얽힌 과거사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오 국보(國寶)”라며 아낀 오 전 수석은 1971년 신설된 청와대 경제2비서실을 이끌며 우리나라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추진 업무를 전담했다. 창원을 비롯해 울산, 포항, 온산, 구미, 여수 등 6대 국가산업단지의 밑그림을 그린 장본인이다. 지난 3월 1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찻집에서 만난 오 전 수석은 올해로 탄생 40주년을 맞는 창원산단의 밑그림을 그릴 때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규모’였다고 강조했다.
“창원산단은 처음부터 종합기계 메이커를 지향했습니다. 정밀기계부터 초대형 제품까지 모든 걸 한 곳에서 만들자는 계획이었죠. 이때 모델이 일본의 히타치였습니다. 미쓰비시 등도 있지만 히타치가 모든 기계를 다 만드는 종합기계 메이커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박 대통령은 처음부터 모든 걸 히타치보다 크게 만들라고 했습니다. 당시 우리 조사로는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히타치 공장에서 일하는 전체 종업원 수가 8만명이었는데 창원산단은 최대 종업원 15만명의 규모로 짓자는 것이었죠.”
오 전 수석에 따르면, 창원산단은 처음부터 3300만㎢(1000만평)가 넘는 대규모로 계획됐다고 한다. 그가 첫 현지 방문을 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설명한 단지 규모는 ‘폭이 5~6㎞에 길이가 12㎞, 넓이가 1500만평(약 5000만㎢)’이었다. 부지 안에 창원역·상남역·성주역 등 철도역 3곳과 3개 면이 포함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당시 차 안에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이 부지 안의 인구와 가구 수, 농지 규모도 꼼꼼하게 물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인구 1만명, 1700여가구에 농지가 420만평(1388만㎢)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400만평의 농토가 없어지고 1500만평의 공업기지가 생겨난다고 생각하면 되겠군”이라며 “이주민에 대한 빈틈없는 대책”을 주문했다는 것이 오 전 수석의 회고다.
실제 창원단지는 조성과정에서 현장을 돌아본 한 외국 경제 전문가가 “자유경제 체제하에서 약 2000가구, 1만명의 주민이 큰 불상사를 야기시키지 않고 이처럼 빨리 정부 계획에 순응하며 공업지역 건설을 가능하게 한 사례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할 만큼 빈틈없이 이주민 대책이 마련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원칙은 △땅값을 제대로 줘서 다른 고장에 가도 같은 면적의 농토를 살 수 있도록 하고 △공장 건설에 이주민을 우선 쓰도록 하며 △이주민의 자식들에게 무료로 기술을 가르쳐서 창원산단에 취직시키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종합기계, 방위산업의 메카가 왜 하필 창원에 자리 잡았을까. 오원철씨는 창원이야말로 당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적지였다고 설명했다. “기계공업의 경우 따뜻한 날씨가 중요합니다. 추우면 옥외 작업을 하기가 불편하고, 날씨가 추웠다 더웠다 기온 차가 커도 철강 소재들이 줄었다 늘었다 하면서 정밀도에 문제가 생깁니다. 또 처음부터 방위산업체들이 입주할 것으로 구상했기 때문에 적의 공격에 대비해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또 1973년 1기가 완공된 포항제철에서 철을 싣고 오고 원자로 등 완성된 대형 제품을 수출하려면 수심이 깊은 만도 필요했습니다. 이걸 다 만족시켜 주는 곳이 창원이었죠.”
오 전 수석은 “창원산단 부지는 주변이 600m급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기 때문에 주변 산에 대공포를 설치하면 적의 공중 공격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는 판단도 했다”며 “기계산업에 필요한 용수는 남강의 물을 끌어다 쓰는 것으로 해결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창원산단은 구상 단계부터 난관도 적지 않았다. 구상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안팎으로 있었다. 정부 내에서도 “우리에게 기계공업은 맞지 않는다”며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고, 외부 용역을 맡긴 전문가들도 ‘유례없는 실험’이라며 반신반의했다. 오 전 수석에 따르면, 당시 사전조사 용역을 맡은 일본의 ‘동양엔지니어링’은 보고서에서 “기계공업 발전 과정으로 보거나 또는 세계적인 예를 통해 보더라도 대규모의 ‘종합기계공업 센터’ 같은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썼다.
오 전 수석은 “또 하나의 용역회사인 ‘일본 개발계획연구소’ 소장인 사사오 박사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창원공업기지 같은 것은 전례가 없기 때문에 성공 여부의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한국은 독특한 바이탤리티(vitality)가 있고 또 한국인의 예지가 있으므로 호기심을 가지고 앞날을 기대해 보겠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일단 계획 수립 후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여 40년 전인 1974년 첫 기업 입주가 시작된 창원산단은 우리 안보에도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 오 전 수석의 평가다. “처음부터 창원산단은 대한민국의 안전판으로 설계된 측면이 있습니다. 김정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미국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이 중요한 계기가 됐죠. 당시 미국 고위 관계자가 김 실장에게 ‘베트남은 농업국가이기 때문에 미국이 포기할 수 있고 일본은 공업국가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해요. 이 말을 전해 들은 박 대통령이 ‘우리도 방위산업을 기간으로 한 공업구조를 가지면 미군이 철군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창원 등 산업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겁니다.”
오 전 수석은 “창원산단이 모습을 드러낸 후 미국 고위 관계자들이 줄줄이 견학을 왔었다”며 “세계에서 유례없는 대규모 병기창을 보고 미국 측 인사들은 당혹감을 나타냈다”고 했다.
오 전 수석은 이날 인터뷰 자리에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낡은 화보집을 갖고 나왔다. ‘1977년 1월 문교부 발행’이라고 돼 있는 화보집에는 까까머리 젊은 남학생들이 기계를 깎고 다듬는 사진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사실 공장은 껍데기이고 사람이 다 이룬 거예요. 창원산단을 구상하고 중화학 공업정책을 펴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한 게 연 5만명 기능공 양성이었습니다. 이들 기능공이 없으면 공장을 지어봤자 물거품이란 걸 안 겁니다. 그래서 전국에 공업고등학교를 짓고 우수학생들을 선발하기 시작했죠. 이 젊은이들이 창원산단의 오늘을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오 전 수석은 “창원산단은 ‘3정 정신’이 구현된 곳”이라는 말도 했다. “3정 정신은 ‘정성을 들여 (도면대로) 정직하게 작업을 해야 정밀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에요. 이걸 박 대통령이 평소에도 강조했죠. 직접 ‘3정 정신’이라는 휘호를 써서 금오공고에 내려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날 오 전 수석은 거칠게 인쇄된 몇 장의 낡은 사진들도 보여줬다. 출처가 불명확한 사진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행사를 주관하는 장면들이 담겨 있었다. “창원산단 안에 직업훈련원을 만들었는데 이 설립자가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벨기에의 자금 지원으로 설립돼 1977년 1기생을 모집해 이곳도 기능공 양성의 요람으로 컸습니다. 벨기에 황태자가 도움의 주체로 나서 당시 영애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설립을 맡았죠.”
오 전 수석은 창원산단뿐만 아니라 현 창원시의 골격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창원시를 가로지르는 8차선 대로와 창원시의 명물인 둥그런 대형 광장(3만5000㎡)도 그의 작품이다. 오 전 수석은 “창원대로 역시 박 대통령이 얼마나 크게 만들 거냐고 해서 ‘폭 50m’라고 답한 게 지금의 8차선 대로가 됐다”며 “시청 앞 광장은 창원의 ‘창(昌)’이란 한자가 해(日) 두 개로 이뤄져 있어 태양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 전 수석은 2010년 창원시청 개청 30주년을 맞아 창원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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