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3.30 15:48 | 수정 : 2014.03.30 15:57
창원산단 비사
- 1974년 창원기계산업단지 공단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아들 지만씨(맨 오른쪽). /photo 국가산업단지공단
1973년 1월 초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경호실 지하에 국산 병기 진열실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66㎡(20평) 지하에는 국방과학연구소와 일부 업체에 맡겨 비공개로 개발한 탄환, 폭약류 등이 전시됐다. 지하실 입구를 제외한 3면을 빼곡히 채울 정도로 병기가 가득했다. 지하실 중간에는 회의탁자를 배치했다. 박 대통령은 아침 일찍 산책을 할 때 불시에 이 사무실을 방문하곤 했다.
얼마 뒤 박 대통령은 김종필 국무총리 등 15명의 각료 및 청와대 고위인사를 이곳에 집결시켰다. 큰 의자는 달랑 3개만 있고 나머지는 간이의자만 놓인 작은 방에서 국무회의 격인 회의가 개최된 예는 전무후무했다. 청와대 안에 병기진열실이 있는 것을 보고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이날 회의에서 발표를 맡은 오원철 수석은 이런 발언을 했다. “국민은 우리나라가 총 한 자루도 못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개인 화기는 물론 대포, 탱크, 잠수함까지 만들어 쓰고 있다고도 알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북한이 과거 20여년을 키워온 방위산업을 우리나라는 이번의 중화학공업 추진으로 북한이 감히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입니다. 이번 기회에 미국을 위시한 우방국에도 우리나라 국력을 과시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은 박 대통령은 빙그레 웃으며 “오 수석, 커피나 한잔씩 들고 계속하지”라고 말했다. 이날 회의는 박 대통령이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토록 하시오. 그리고 필요한 외자도입 조치를 하시오”라고 말하고 오후 5시에 끝났다. 당시까지 국산 병기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많았기 때문에 박 대통령은 각료들에게 창원산단 개발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국산 병기를 모아 놓은 경호실 지하벙커에서 장시간의 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창원산단을 추진할 당시 다른 대기업과 달리 이병철 당시 삼성그룹 회장은 공장 건설을 주저했었다. 그러나 막상 창원산단이 본격 추진되자 “자투리 땅이라도 공장 부지를 달라”고 입장을 바꿨다. 이병철 회장과 창원기지를 둘러본 이광덕 당시 상공부 기계공업국장이 청와대에 보고한 이 회장의 발언은 이랬다. “공장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정부가 해낼 수 없는 일을 민간기업에서 해낸 사례가 많다. 정부는 지원을 했고 주역은 어디까지나 민간기업이었다. 그런데 창원의 거대한 기지를 보니, 우리 민간기업으로는 도저히 엄두를 못 낼 일을 정부가 하고 우리에게 손짓을 하고 있다.”
이병철 회장은 정부 주도가 아닌 기업 주도의 산업화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광덕 국장은 이 회장의 발언에 대해 “아무리 큰 재력을 가졌고 외자 도입을 잘 해온다 하더라도 민간 기업의 힘으로는 창원기지 규모의 것을 구상할 수 없다는 실토였다”고 평가했다. 이 회장은 현지 시찰 후 창원산단에 삼성중공업 공장을 건설키로 결정했다.
창원산단 개발 타당성 검토를 했던 민석홍 전 대우그룹 전무는 창원 등 남해안 일대 조사과정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오원철 수석에게 전했다. “1972년 말 크리스마스 무렵인데 현지 해안을 답사하다가 해안경비부대와 마주치게 됐죠. 준장 계급의 경비사령관이 있는데 신원을 밝히고 답사를 보장받았지만 답사 목적은 밝힐 수 없었습니다. 경비사령부에서는 북괴간첩이 침투한 극비정보를 가지고 내려온 걸로 추측하고는 비상을 걸었어요. 그곳 경비부대 장병들에게는 큰 폐가 된 것 같아 여간 미안한 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