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3년 한국원자력연구소가 발족되었다.

여동활 2013. 12. 1. 13:15

대덕연구개발특구 40년사’ 출간한 장인순 고문


	[주간조선] 스페셜 리포트 : 대덕특구 40년…“일류로 가려면 향후 10년이 중요 기초과학연구원 설립해야”

대덕연구개발특구가 설립 40주년을 맞았다. 한국과학기술의 메카가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었다. 대덕연구개발특구(이하 대덕특구)가 없는 대한민국의 오늘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지난 11월 27일 대전역에서 택시를 타고 한국원자력연구원으로 향했다. 오전 9시 한국원자력연구원 앞에서 장인순(73) 고문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택시를 타고 가는데 탐스러운 함박눈이 쏟아졌다. 대덕대로를 접어들었을 때 이미 주변 야산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장 고문은 전화통화에서 “한국원자력연구원 입구 직전에 있는 기숙사 길로 올라오면 된다”고 말했다.

장인순 고문은 ‘대덕연구개발특구 40년사’ 편찬위원장이다. ‘대덕연구개발특구 40년사’(이하 40년사)는 12월 중 출간 예정이다.

대덕특구는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3년 11월 ‘교육 및 연구지구’로 정한다는 법률이 제정되면서 만들어졌다. 앞서 1973년 1월 박 대통령은 과학입국을 선포했다.

장인순 고문은 대덕특구 1세대이다. 동시에 대한민국 원자력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린다. 약속장소인 기숙사동(棟)에 택시가 다다랐을 때는 백발의 노신사가 현관에 나와 있었다.

그는 대덕포럼 한쪽 공간을 사무실로 쓰고 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앞서 그의 서가를 훑어보았다. 거의 대부분이 인문서였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시집들. 마치 국내에서 나온 시집이 모두 이곳에 전시된 것 같았다.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이승만 대통령이 1959년 설립했다. 미국이 건설비의 절반을 지원해 연구용 원자로를 만들었다.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3년 한국원자력연구소가 발족되었다. 1976년 한국핵연료개발공단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상용원자로가 건설되었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인터뷰를 시작했다. 12월 초에 나오는 ‘40년사’ 이야기부터 물었다.

- 40년사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가게 되나. “설립 당시부터의 역사와 성과가 들어간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줄 생각이다. 40년 성과도 중요하지만 비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40년사를 만들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인가. “워낙 많은 연구소가 있다보니 성과를 선별해 내기가 어려웠다. 직원이 4000명이 넘는 데도 있고 150명밖에 안 되는 곳도 있다. 연구소 역사도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한 연구소마다 대표적인 성과를 3개씩 제출하도록 했다.”


	박정희 대통령, 오원철 경제수석, 최형섭 과학기술부 장관, 오명 차관.(왼쪽부터)
박정희 대통령, 오원철 경제수석, 최형섭 과학기술부 장관, 오명 차관.(왼쪽부터)

- 대덕특구를 만든 공로자로 누구를 거론할 수 있나. “박정희 대통령, 오원철 경제수석, 최형섭 과학기술부 장관, 그리고 1980년대 들어 오명 차관을 거명할 수 있다.”

장 고문이 대덕연구단지와 인연을 맺은 1979년 3월. 대덕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그는 직전까지 미국 아이오와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캐나다 웨스턴온타리오대학에서 불소화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아이오와대학으로 갔었다. 1978년 여름방학 때 해외 과학자 초청 세미나를 위해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의 재변환연구실 실장으로 대덕 생활을 시작했다. 실장 밑에 연구원은 6명.

오늘날 대덕특구에 처음 와보는 사람은 환경과 시설에서 감탄한다. 1970년대 말의 대덕특구를 기억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 1979년 대덕에 왔을 때는 어땠나. “대덕단지에 건물이 딱 두 동이 들어서 있었다. 실험실에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는 왕복 2차선 시골길이었다. 갑천에 다리가 놓이지 않아 대전 시내를 가려면 유성으로 돌아서 가야만 했다. 그래서 택시비도 두 배로 받았다. 상수도 시설도 되어 있지 않았다.”

- 그때 외국에서 온 과학자들은 어디서 살았나. “7개 국책연구소가 출자해 지은 ‘유치 과학자들을 위한 공동관리 아파트’ 150세대에 1호 입주자로 들어갔다. 첫해에 수도관이 터져 집안에 물난리가 여섯 번이나 났었다. 그때 우리는 쇠파이프 수도관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 귀국을 후회하지 않았나. “연구 기반시설이 전혀 안 되어 있었다. 실험실을 보고 너무 실망했다. 연구비도 턱없이 부족했고. 워낙 여러 가지 환경이 열악해 많은 과학자가 대덕을 떠나 대학으로 갔다. 나도 그런 유혹이 있었지만 대학에 가지 않았다. 대학은 가르치는 곳이지 연구하는 곳이 아니다. 지금도 그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 당시 원자력에 대한 국민 인식은 어땠나. “아주 부정적이었다. ‘엽전들이 무슨 원자력 기술이냐’라는 말부터 공개적으로 우리를 비방한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국민이 원자력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때였다. 그런데 그런 비방이 우리를 자극했다.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일에 매달렸다. 유치 과학자들은 원자력을 통한 에너지 자립을 해야만 우리 국민이 선진국 생활수준을 따라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80시간을 연구실에서 지낼 때가 많았다. 연구시설이 부족하다 보니 몸으로 때우는 일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많이 들었다.”

1979년 10·26 사건은 대덕연구단지에도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장 고문의 말이 이어진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면서 1980년 12월 핵연료개발공단에서 한국에너지연구소로 간판을 바꿔 달아야 했다. 연구원들 입장에서 보면 일제강점기의 창씨개명에 가까운 굴욕감을 맛보았다.”

연구원들은 1989년 핵연료 국산화에 성공했다. 누구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을 에너지연구소가 해냈다. 그리고 연구소 측은 옛 이름을 돌려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89년 한국원자력연구소로 환원됐다.

“다시 이름을 찾은 우리 연구원들의 기쁨은 말도 못했다. 마치 조국을 다시 찾은 광복의 기쁨과도 같았다.”

1996년 한국원자력연구소는 한국표준형원전 개발에 성공했다. 원전 수출국을 향한 첫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장 고문은 1999년 한국원자력연구소장에 취임해 6년간 조직을 이끌었다. 한국원자력연구소는 2007년에 한국원자력연구원으로 이름을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9년 12월, 한국은 아랍에미리트(UAE)와 ‘400억달러 원전수출계약’을 맺었다. 한국이 원자력기술 독립국으로 태어난 것을 전 세계에 공표한 것이다. 역대 대통령 중 한국원자력연구원을 직접 방문해 연구원들을 격려한 대통령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김영삼·이명박 5인이었다.

그는 1940년 일본에서 태어나 전남 여수에서 자랐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그가 과학자가 되는 인생역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학생 시절 등록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시험도 보지 못하고 쫓겨난 적도 있다. 수학을 워낙 좋아해 여수고 시절 수학자가 되고 싶었으나 교사의 권유로 고려대 화학과에 진학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대학원까지 합해 6년 중 5년을 입주 가정교사를 하면서 다녔다. 재학 중인 1961년 군에 입대했는데 도중에 폐결핵이 발병해 제대를 했다. 결핵약을 먹으면서 치료를 해야 했다. 그때 가장 큰 고민은 결핵이 전염성이 있어 가정교사를 하는 학생에게 전염이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었다. 의사 말이 약을 먹고 있어 전염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행히 우려하던 일은 없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간강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폐결핵을 앓아 유학은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어느날 학교에서 “캐나다 웨스턴온타리오대학에서 장학금을 준다고 하는데 공부하러 가는 게 어떠냐”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때 영어시험을 보는 데 5달러였다. 시간강사가 무슨 돈이 있었겠나. 전부 모아서 환전하니까 100달러가 되었다. 그야말로 장학금 하나만 믿고 빈손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유학 떠나기 전날 밤 어머니께서 하얀 종이로 싼 것을 제게 주었다. 열어봤더니 태극기였다. 깜짝 놀랐다. 그래서 이민가방에 태극기를 펴서 넣고 떠났다.”

그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런던시에 있는 웨스턴온타리오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했다. 불소화학을 전공하며 박사학위를 1년 남겨놓은 시점에 실험실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그는 목숨은 건졌지만 온몸에 중화상을 입었다.

“병원에서 피부이식을 받는데 한 번도 아프다는 소리를 안 했습니다. 백인 의사 앞에서 아프다고 하는 게 당시는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소매를 걷어 팔뚝을 보여주었다. 팔뚝은 흉터투성이였다.

“병원에서 퇴원했는데, 지도교수가 실험을 포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면 학위를 받는 게 3년 늦춰진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그 실험을 하지 못하면 공포 때문에 다른 실험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도교수 몰래 실험실에 들어가 실험을 했고 결국 성공해 보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지도교수는 자기 말을 어기고 위험한 일을 했다고 굉장히 화를 냈다. 결국에는 제 보고서를 인정했고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 불소화학 전공은 어떻게 원자력 연구와 연결되나. “불소화학은 우라늄 농축을 하는 데 필요하다. 우연히 그렇게 됐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불소화학을 공부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를 필요로 했다.”

- 청계천에 조국 근대화 공적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무슨 뜻인가. “1980년대 이야기다. 연구를 하다 보니 장비, 부품 등 없는 게 너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청계천으로 가곤 했다. 청계천에 가서 부품을 찾으면 반드시 며칠 내에 구해다 줬다. 국적불명의 부품이긴 하지만 청계천에는 없는 게 없었다. 사실 우리 같은 과학자들에게 청계천 공구상가는 최고의 부품 공급처였다. 그래서 공적비를 세우자는 주장을 했는데, 알아듣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 최근 잇따른 원전비리사건으로 원전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졌다. “차라리 잘 터졌다. 이번 기회에 완전히 털고 가야 한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아무것도 없는 나라다. 에너지원(源)의 97.3%를 수입한다. 값싸고 질 좋은 전기를 공급하려면 결국은 원자력밖에 없다. 왜 사우디아라비아, UAE 같은 산유국에서 원전을 짓고 있는가. 그들은 100년 뒤에는 화석연료가 고갈된다며 100년 후를 내다보고 원전을 건설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한때 주춤하다가 다시 원전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 원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예로 든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대한민국은 정말 운이 좋은 나라다. 우리는 가장 안전한 가압경수로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원자력 기술의 우수성이 입증되었다.”

- 원자력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무엇을 당부하고 싶은가. “원자력 과학자들은 대접을 잘 못 받는다. 원전비리 등으로 신뢰가 떨어졌다. 하지만 애국적인 마인드를 가지라고 말한다. 다음 다음 세대를 위해서 일하자고 말한다. 완벽한 원자력 기술 자립을 물려줘야 한다. 우리나라 IT산업이 이렇게 발전한 것은 양질의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했기 때문이다. 원자력이 버텨줬기에 가능했다.”

- 40주년을 맞은 상황에서 현재의 대덕특구를 평가한다면. “대덕특구는 지금까지 선진국을 따라가는 추격형 연구를 해왔다. 다른 말로 하면 응용연구 중심이었다. 대덕특구는 미국, 독일, 일본 같은 톱클래스 수준은 되지 못한다. 이제는 기초연구 중심으로 옮겨가야만 일류 연구단지가 될 수 있다.”

현재 세계 일류 과학기술단지로 평가받는 곳은 독일과 일본에 있다. 독일 드레스덴시의 아들러스호프 연구단지와 일본의 쓰쿠바 과학기술도시. 미국의 경우 한 곳에 모여있지 않고 각 대학 주변에 연구소가 흩어져 있다.

- 기초연구 중심 단지로 가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현재 기초과학연구원 설립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기초과학연구원이 설립되어 과학비즈니스벨트와 연결되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럽지 않은 일류 연구단지가 된다. 여기에 중이온가속기 등과 같은 대형 시설이 완공되면 가능하다. 지금부터 10년이 대덕특구가 세계적 연구단지 수준으로 가느냐를 결정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덕특구를 만들었는데, 40년 뒤에 그 따님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누구보다 대덕특구의 중요성을 잘 알 것으로 본다.”

- 그런 하드웨어만 되면 세계 일류가 될 수 있나. “앞으로 연구원의 절반쯤은 외국인으로 채워져야 한다. 사실 미국의 과학기술이 발전한 것은 머리 좋은 가난한 나라의 유학생들을 받아들여 연구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기초과학은 외국 학생들이 다 한 것이다. 우리 인력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대덕특구에서도 외국 학생들이 유학 와 공부할 수 있는 정주(定住)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인터뷰가 끝나고 짐을 정리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던졌다. “과학자가 왜 시를 좋아하나?” 그가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시는 내가 어려웠을 때마다 나를 잡아준 정신적 지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