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박정희대통령,,, 남덕우에게 "전쟁나면 미군 뒤로 빼야해"

여동활 2013. 5. 25. 10:51

떠나는 이 앞에 옷깃 여미고 고개 숙임은 같으나 다른 것이 있다. 애도가 아닌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우러름이다. 그 인생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한 시대의 돋을새김으로 남기고 있다는 것에 대한 우러름이다.

남덕우(1924~2013).

부인 최혜숙 여사와 2남1녀를 둔 가장(家長), 6척 장신에 음악을 좋아하고 기타를 잘 쳤다는 것은 개인 남덕우로되, 경제 고속열차 ‘대한민국 호’를 이끌고 달려온 10년 장수(長壽)의 ‘백두(白頭) 장관’ 남덕우는 그가 살았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모습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조국근대화 시대의 고도성장을 이끌고 이제 그가 역사 속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열정이 용솟음치는 격동의 시대에 그는 모난 데가 없이 늘 조용했다. 흠잡을 데도 없어 특별나게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그가 ‘정밀(靜謐)한 바다’로 크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 ◇(좌)2005년 6월 1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박정희 대통령은 신(神)이 아니다’ 제하의 조찬 강연 모습. ⓒ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우)회고록 〈경제개발의 길목에서〉(2009년 9월 삼성경제연구소) 표지.(자료사진)

“무명교수가 어느날 신문에 나더니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대한민국을...”

그가 남긴 회고록 '나의 삶 나의 길-경제개발의 길목에서'가 처음 동아일보에 연재를 시작했을 때(2009년 4월 1일) 서강대 시절의 제자가 남덕우 교수의 저서 '가격론'을 상기하며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었다.

-62년 '가격론'을 남 교수에게서 들었는데, 5분 전에 들어오셔서 땡하면 강의를 시작하고, 땡 소리가 날 때까지 조용조용하나 쉽게 정성들여 강의를 하셨다. 그 모습과 내용이 지금도 생생하고, 4년 중 존경하는 교수는 이분 한분밖에 없다. 무명교수가 어느날 신문에 나기 시작했고, 박정희 대통령과 어울려 대한민국을 일으켰다. 8.3 사채금리 동결 때 기자들이 퍽이나 모욕을 주는데도 남 교수님은 끝까지 설득하였다. 기자들이 모질게 모욕을 하는데도 온화한 낯빛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평생 나의 스승님이다.

박정희 시대의 남덕우를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무명교수가 어느날 신문에 나기 시작했고, 박정희 대통령과 어울려 대한민국을…”이라는 대목이 그러하다.

저서 '가격론'은 그가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1960년에 쓰기 시작해 1965년에 책으로 나왔다. 미국에서 정규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국내를 통틀어 10명도 안될 때 그가 한국에 처음으로 ‘미시경제학’을 소개할 목적으로 썼다는 이 책은 대부분의 경제학도들이 이것을 보고 경제학에 눈을 떴다 할 정도로 큰 화제였다.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경제 전문가들의 참여가 필요해짐에 따라 1965년 국무총리 소속의 기획조정실 주관으로 평가교수단을 구성했다. 국내 경제학자들이 총동원된 그 자리에 서강대 경제학 교수 남덕우가 포함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거기서 처음 박정희 대통령과 만났고, 박 대통령은 금융ㆍ통화ㆍ외환 정책에 대한 평가를 보고하는 그의 정연한 이론과 경제 문제를 조목조목 날카롭게 비판하는 충실한 내용을 주목했다.

“남 교수 가족을 돌봐줘라”

그러던 어느날 박 대통령은 평가교수단 회의에 참석하고 교수들과 악수를 하다가 총리실 관계자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각하, 남 교수는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게 되어 이제 평가교수단 회의에는 안 나오게 되었습니다.”

걸음을 멈춘 대통령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아주 갑니까?”

“아닙니다. 1년 뒤에 돌아옵니다.”

남덕우는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초청으로 1년간 교환교수로 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럼 나 좀 보고 가시오.”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는 따로 택시를 타고 청와대로 갔다.

난생 처음 청와대라는 곳을 가본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을 때 우선 그 방의 검소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 집무실이니까 굉장한 방이겠지’하고 들어섰는데, 책상이 하나 있고 그 앞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한 세트의 소파가 있을 뿐이었다.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통령이 다시 물었다.

“갔다가 반드시 돌아옵니까?”

“예.”

“집안의 처자와 부모는 어떻게 하고 갑니까? 누가 따라 갑니까?”

“그냥 두고 저 혼자 갑니다.”

대통령은 ‘壯途’라고 쓴 봉투를 그에게 주었다. 미리 준비한 금일봉이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소. 약소하지만 여비에 보태 쓰시기 바랍니다. 집 걱정은 하지 말고 연구 열심히 하고 돌아오시오.”

그러더니 벨을 눌러 비서실장(이후락)을 불렀다.

“남 교수가 1년 동안 집을 비우고 미국에 공부하러 간다는데, 집에 없는 동안 가족들의 생계를 도와주도록 하시오.”


대통령의 관심과 배려는 전혀 뜻밖의 놀라움이었다.

▲ 박정희 대통령이 1969년 10월 21일 재무부장관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각하, 한번 불러다 혼 좀 내십시오”

그는 1968년 6월 미국 스탠퍼드대 교환교수로 갔고, 이듬해 여름 돌아왔다.

그가 대통령의 뜻을 알게 된 것은 그해 가을이었다.

저서 '가격론'의 수입이 꽤 보탬을 주어 화곡동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있다가 지프를 타고 허겁지겁 달려온 동료 교수(이승윤)를 만났다. 청와대에서 대학으로 전갈이 왔는데 곧 개각 발표가 있을 것이니 급히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는 공중전화가 있는 곳으로 갔다. 김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에게 전화를 하니, 그를 찾느라고 무척 애가 탔던 모양으로 재무장관으로 임명됐으니 당장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명령조 말투였다.

대통령은 공사판에서 흙이 묻은 구두를 신은 채 얼떨결에 나타난 그에게 임명장을 주고 나서, 신임 장관들과 환담하는 자리에서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대통령에게 재무장관 남덕우의 임명 사유를 그렇게 건의한 사람이 있었다. 경제기획원 부하들에게 걸핏하면 욕설을 퍼부어 닦달을 하면서 열정과 뚝심으로 경제정책을 밀어붙이던 ‘욕쟁이 장관’ 김학렬이었다.

“남덕우 교수가 평가분석회의 때마다 비판을 잘하는데 장관 일은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맡겨서 혼 좀 내십시오.”

김학렬의 말에 대통령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1969년 10월 21일, 그렇게 재무부장관으로 박정희 시대에 등장한 그는 1974년에는 경제부총리에 올라 중화학공업육성 등 굵직한 국가 프로젝트를 지휘했고, 79년에는 청와대 경제담당 특보로 자리를 옮겨 조국근대화에 기여한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가 박정희 시대와 함께 한 세월은 10년이나 되었다.

그는 10년을 “그 분을 위해 파란 많은 세월을 보냈고 사적으로는 단맛보다 쓴맛이 많은 나날이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본 정주영

그러나 그는 이론과 실무를 양어깨에 걸치고 한 시대를 풍미했다. 경제의 안정성장이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으면서 당대의 펄펄나는 기업인들과 함께 고도성장 가도를 질주했다.

“대통령은 무엇이든지 해내는 사람을 좋아했다”고 그는 말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정주영이다.

경제사령탑 남덕우가 본 정주영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재벌답지 않게 소탈한 모습이다.

비행기를 같이 탈 때 옆에서 본 정주영은 옛날에나 볼 수 있는 비닐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날은 재봉틀로 기워 입은 바지를 입고 골프장에 나타나더니, 오른손 장갑 한짝을 왼손에다 끼고 골프를 치는 것이었다. 왜 장갑이 한짝뿐이냐고 물으니 왼손 장갑을 잃어버려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남덕우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 정주영이 자기가 생각하는 공법을 사용하면 비용이 반감될 수 있다고 해서 재원 조달에 고심하는 대통령에게 용기를 주었고, 소양강댐을 건설할 때도 흙을 많이 사용하는 공법으로 제방을 쌓는 게 더 견고하고 비용이 절감된다고 해서 그대로 성공시킨 것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1978년 대통령 특사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을 때 정주영의 안내로 주베일 항만 방조제 공사 현장을 보고는 그 웅장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이를 국제 입찰에 부쳤을 때도 다른 나라의 기업들은 13억 달러 내외의 가격을 써냈는데 정주영의 현대건설은 9억3천만 달러를 써내 낙찰을 받았다.

남덕우가 “그러고도 수지가 맞느냐”고 물으니 울산 조선소에서 공사에 필요한 모든 철재를 가공해 바지선으로 끌어오면 공사 비용을 크게 절감해 충분히 수지가 맞는다는 것이었다.

천하에 못할 일이 없다는 듯 대형 프로젝트에 덤벼들어 시원시원하게 끝내주던 정주영이 조선(造船)사업을 권하는 대통령에게 그것만은 못하겠다고 꽁무니를 빼다가 대통령에게 등떠밀리다시피 현대조선(지금의 현대중공업)을 만든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에 대한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과 후원을 든든히 믿고 정주영이 남덕우를 찾아가 조세 감면을 요청했다.

남덕우가 어떻게 반응했을까.

정주영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소가 흑자를 내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고 한 말을 떠올리며 지금도 남씨를 만나면 손에 장 지졌냐고 농담을 걸곤 한다.”

그의 창의와 결단력에 감탄해 있던 남덕우가 현대조선의 성공을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현대조선이 성공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디 한번 내 손에도 장을 지지도록 해내 보시오”라고 격려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박정희 정부가 60년대의 경공업 시대를 끝내고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이 1973년 초였다.

그해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 선언을 발표한 후 재무장관 남덕우는 대통령에게 중화학공업 계획을 보고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가 문제라고 고언(苦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를 남덕우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나라와 민족의 명운을 걸고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다가 패망했다. 그러나 일본은 다시 일어나서 지금은 세계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는데 그 배후에는 중화학공업 건설이 있다. 나는 지금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거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경제의 명운을 걸고 중화학공업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어 “장관!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일을 해 봅시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알겠습니다. 자금계획을 만들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청와대를 나왔다.

그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자금 조달이었다. 내자는 물론 외자의 조달 방안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 세계은행을 찾아가고, 미국과 유럽공동체(EC)의 정부와 금융기관을 돌아다녔다.

그는 세계은행 총재 로버트 맥나마라에게 새마을사업뿐만 아니라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자금까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지원이 매우 각별해 그를 ‘한국의 은인’이라고 했다.

▲ 경제 부총리 시절인 1975년 10월 15일 주한 외교사절 초청 오찬 리셉션에서 스나이더 주한 미대사(좌측),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중앙)과 환담하는 모습. ⓒ국가기록원

“전쟁 나면 미군을 뒤로 빼겠다”

그러나 불운도 없지 않았다. 경제 부총리라는 중책을 맡은 1974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오일쇼크였다. 그는 여기에 정면으로 대결해 환율 현실화, 취로사업 등 유명한 12.7조치를 단행함으로써 파동을 잠재웠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량실업을 방지하고 경제의 8.7% 높이뛰기 성장을 이뤄내면서 77년 수출 1백억달러 달성, 78년 국민소득 1천달러를 실현한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시작된 ‘율곡계획’ 즉 방위산업의 내자 조달을 위해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협의한 끝에 방위세가 신설됐고, 그로써 각종 국산 병기의 개발로 자주국방을 뒷받침하면서 주한미군 철수와 월남 패망에 따른 내외 정세의 안보 불안을 지워가면서 격동의 70년대를 거뜬히 통과하는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낮추고 대통령의 자주국방을 앞세웠다.

방위세안(案)을 보고하러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대통령과 그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

“만약 김일성이 또다시 남침을 하면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서부전선에서 미군을 빼는 일이야.”

대통령이 말했다.

“전쟁이 났는데 왜 미군을 뺍니까?”

“아냐, 빼야 돼.”

어리둥절해 있는 그에게 대통령이 설명한 내용을 그의 회고록에서 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미군을 빼지 않으면 미국 병사들이 뻣뻣이 서서 총을 쏘다가 모두 거꾸러질 것이다. 그러면 미국의 TV는 물론 신문기자들이 그 참상을 낱낱이 보도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미국 의회와 언론이 화전(和戰) 양면으로 분열돼 전쟁 개입에 대한 결정이 늦어지고, 그러는 동안 미8군사령관은 작전 수행이 어렵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런 상태가 한 달만 계속되면 우리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예방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전쟁 발발 직후 미군을 서부전선에서 철수시키고 38선 전역을 우리가 맡아야 하는 것이다. 북은 평소에 공격 태세를 완비하고 있었으니까 당초 일주일 동안은 우리가 밀릴 것이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면 아군이 반격으로 전환해 밀고 올라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코리아는 역시 베트남과 다르다. 그들은 자력으로 싸우려 한다. 우리는 이러한 우방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하면서 공군 지원과 병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국에 기대할 것은 공군과 병참이고, 육상 전투는 전적으로 우리가 맡아야 한다.


이러한 대통령의 자주국방 신념과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그는 회고했다.

▲ 재무부장관, 경제 부총리 시절 박 대통령에게 받은 봉투(좌)와 1978년 12월 21일 개각을 앞두고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내용의 박 대통령 친서(우).(자료사진)

“헌법 바꾸고 물러날 거야”

대통령을 모신 10월 세월을 “쓴맛이 많은 나날이었다”하는 그에게 쓰디쓴 맛을 안겨준 것으로 부가가치세를 들 수 있다.

1977년 여름 부가가치세가 시행되면서 반감 여론이 들끓었다. 기업도 영세상인도, 또 세금을 더 내라는데 좋아할 국민은 없는 노릇이었다. 여름 무더위보다 혹독하게 악화된 여론은 가을, 겨울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식을 줄 몰라 1978년 12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이 패배,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로 나타났다.

정국 불안은 12월 23일, 11부 장관을 경질하는 개각을 가져왔고 남덕우 부총리를 비롯한 경제 각료 대부분이 물러났다. 부가가치세는 살고 경제 장관들이 죽은 셈이었다.

그가 고별 인사를 하러 청와대에 들어가니 대통령이 위로금 봉투를 주면서 “잠시 쉬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심신이 지쳐 어차피 잘 됐다고 홀가분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와 있는데, 20일밖에 지나지 않은 이듬해 1월 12일 대통령은 그를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경제담당특별보좌관 직책으로 대통령 바로 옆에다 세워놓은 것이다.

그런데 임명된 대통령특별보좌관 중에 눈여겨봐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닌 법률특보 신직수였다. 법률문제 로 특보를 둔다는 것이 의아스러웠다.

대통령은 어느날 특보들과 식사를 같이하는 자리에서 시국담을 듣다가 모두가 깜짝 놀랄 말을 불쑥 꺼냈다.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날 거야.”

그제서야 비로소 법률특보를 둔 까닭을 이해하게 됐고, 신직수 특보는 은밀히 법률 개정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게 뒤늦게 밝혀졌다.

그해 10월 11일 대통령은 주한 외교사절을 경주 보문단지로 초청해 리셉션을 베풀었고, 그때 남덕우는 대통령과 어울려 골프를 치다가 골프공이 제대로 잘 맞아 멋지게 날아가는 것을 보고 흐뭇해하는 대통령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는 거기서 서울로 돌아와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청와대의 특보 3인(남덕우, 김경원, 함병춘)이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 각국을 방문해 한국 정치발전의 기본방향 및 경제현황, 대외경제정책 등을 설명하는 계획에 따른 미국행이었다.

그는 워싱턴에서 정부 요인들을 만나고 뉴욕으로 가 한미경제협의회가 주최한 오찬 강연을 했다. 그리고 휴스턴에 가서 한국 정세에 대한 TV 인터뷰를 끝내고는 귀로에 아들이 유학하고 있는 하와이에 들렀다.

거기서 점심을 먹고 있다가 헐레벌떡 달려온 아들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비행기에서 신문기사를 읽고 김포공항에 도착해 곧바로 청와대 빈소로 달려갔다.

“헌법 바꾸고 물러날 거야.”

그 말은 대통령의 결단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돌발적으로 막을 내린 한 시대의 통절(痛切)한 울림소리가 되고 말았다.

▲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 국장 때 현충원 안장식에서 분향하는 남덕우 전 총리. ⓒ 국가기록원

그의 소원

고도성장 시대의 중심축에 섰던 그가 남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한국이 어떻게 짧은 세월 동안에 기적 같은 경제발전을 했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는 “시장경제 체제의 채택과 이 체제를 유지토록 한 정부의 역할” 이 두가지가 급속성장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역할’ 부문에서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이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그리고 우수한 관료들의 열정과 헌신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들을 국정의 전면에 포진시켜 맘껏 일할 수 있게 정치 외풍을 막아 주었고, 남덕우의 10년이 말하듯 장기간 중책을 맡기는 인사 정책으로 이들의 능력과 경험을 최대한 국정에 반영했다. 이른바 엘리트 관료들의 전성시대였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박정희처럼 18년이나 집권하고, 남덕우처럼 10년이나 감투를 쓰고 있다면 누구라도 그만한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그러나 가마솥의 국물을 다 떠먹어야 맛을 아는 것이 아니다.

▲ 남덕우 전 총리는 1998년 3월 12일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초청 강연에 나와서 박정희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고인이 된 대통령을 매도하는 정치권력의 작태를 준열히 비판했다. ⓒ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 1999년 10월 25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어록 출판기념회에서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와 함께 자리한 남덕우 전 총리(왼쪽). 신현확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 이만섭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윤주영 은행나무동우회장, 고건 서울시장이 모여 환담하고 있다. ⓒ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박정희는 고위 공직자들을 권력으로 복속시키지 않았다. 국익을 위한 소신있는 쓴소리를 면배복종(面背腹從)보다 훨씬 가치있게 평가했으며, 그들을 국익 창출의 동반자로 대우하면서 때로 수직 관계가 아닌 수평의 인간적 교감으로 그들을 보살폈다.

더불어 “하면 된다”,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과 공감대로 국민의 소망과 의욕을 폭발시켜 새로운 영광의 한 시대를 역사의 장에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리더십이 함께 자리매김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박정희 시대가 역사 속으로 흘러간 뒤, 남덕우는 1980년대에 국무총리를 거쳐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역임했었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그해 9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한국종합무역센터를 건립하면서 부지 한곳을 공간으로 남겨두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흉상이 들어갈 자리이다.

고도성장으로 오늘의 무역대국을 만든 지도자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그의 소원이라면서 “언젠가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박 대통령이 위치한 역사 속의 가장 가까운 자리로 옮겨갔다.

글/김인만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