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7월 24일 경기도 수원 새마을지도자연수원에서의 수업 모습. 그해 7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동조 외무·정소영 농수산·이낙선 건설부 장관 등 장·차관과 대학 총장 등 50여 명이 새마을 교육을 받았다. [중앙포토]
마을마다 남녀 한 명씩 두 명의 새마을지도자를 뽑았다. 보수는 없었지만 새마을 사업의 기획자로, 집행자로 열심히 뛰었다. 주민을 설득하고 의견을 조정하는 일도 그들 몫이었다.
유엔은 1960년대를 ‘지역사회개발연대(Community Development Decade)’로 설정했다. 당시 농촌지역사회개발의 일반이론에 따르면 저개발국의 농촌을 개발하기 위해 훈련 받은 외부의 지도자(social worker)를 농촌 마을에 투입할 것을 권고했다. 전국의 실태를 조사했더니 새마을 사업 성과가 좋은 마을엔 이미 헌신적인 지도자가 있었다. 정부는 외부에서 지도자를 투입하는 대신 마을 내부에서 새마을지도자를 뽑아 양성하는 길을 선택했다.
1972년 1월 31일 경기도 고양의 농협대학 부설 독농가연수원에 각 지역에서 선발한 140명이 입교했다. 새마을지도자 교육과정의 출발이었다. 2주 간의 교육과정은 가나안농군학교(교장 김용기)와 안양 농민교육원(원장 김일주)의 훈련 과정을 참고해 만들었다. 농협대 김준 교수가 초대 원장을 맡았다. 교육 받을 사람이 늘면서 그해 경기도 수원의 농민회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새마을지도자연수원’으로 정식 출범을 했다.
교육은 성공한 새마을지도자의 경험을 듣고 그 사례에 대해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75년에는 새마을지도자와 사회 지도층, 공무원이 함께 합숙교육을 받으면서 상승 효과가 났다.
김준씨에 이어 2대 원장을 했던 정교관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농촌지도자는 흙색, 부녀지도자는 하늘색, 사회지도자는 회색으로 각자 다른 색 옷을 입었지만 같은 장소에서 같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농민뿐 아니라 장·차관, 대학교수, 기업인, 대학생, 문학인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많이 왔지요. 강제 교육 아니냐며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원하면 도중에라도 자유롭게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농촌의 새마을 성공사례를 듣고는 감명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전남 담양의 정회원, 전북 임실의 정문자, 충북 청원의 하상돈, 경북 영일의 홍성표, 충남 당진의 임광묵, 강원 삼척의 박재명…. 대통령 주재 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성공 사례로 발표됐던 훌륭한 새마을지도자들의 이름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무보수지만 자기 마을을 새마을로 발전시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기여한 새마을지도자가 있어서 새마을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다.
달마다 새마을국무회의가 열렸고 새마을 사업의 추진 상황, 문제점과 안건 보고는 내무부 지방국장인 내 몫이었다.
새마을운동의 큰 방향은 박정희 대통령이 제시했지만 새마을 정신을 현장에서 몸소 실천한 사람은 새마을지도자들이었다. 새마을지도자들이 무보수이면서 헌신적으로 쏟은 열정에 대한 보상은 정부의 표창과 사회적 인정감밖에 없었다. 아마도 제일 큰 보상은 자기 마을의 변화된 모습이었을 것이다.
새마을지도자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던 김준·정교관 전 원장 외에도 새마을운동이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숨은 조력자가 많았다. 현장을 누비고 청사에 돌아와서도 밤을 새우고 토론하며 함께했던 내무부 동료인 전석홍(현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김형배(전 강원도지사)·강우혁(전 국회의원)·이효계(전 숭실대 총장)·최인기(전 행정자치부 장관)…. 정종택(전 환경부 장관)·김종호(전 국회부의장)·송언종(전 체신부 장관) 등 청와대팀도 열정을 쏟았다.
새마을운동을 기획하고 연구했던 교수단도 빼놓을 수 없다. 원로로 농협대 학장을 했던 박진환 청와대 특보, 소장 교수로 이질현 서울대·김대환 이화여대·김유혁 단국대·정영채 중앙대·류태영 건국대 교수 등이 새마을운동 초기에 함께 했었다. 모두 새마을운동에 젊음과 열정을 바쳤던 분들이다.
정리=조현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