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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활칼럼>"10월 유신,,제대로 알고 욕해라!"

여동활 2012. 9. 1. 12:12

 

<여동활칼럼>"10월 유신,,제대로 알고 욕해라!"

1972년 10월 대한민국은 바람앞에 등불이었다!

여동활 칼럼니스트 기자2012.09.01 10:56:34

<더타임스 여동활칼럼니스트>이제까지 잘 살아놓고 왜 지금와서 ‘10월 유신(維新)을 욕하나? 유신의 혜택은 모두 누리고 왜 유신 욕 하나? 그래 유신 유신 하는데 제대로 알고 욕해라.

 

 

 

대한민국 근대역사는 송두리째 쳐박아버리고 무조건 잘못된 것만 골라서 육두문자 써가며 유신을 욕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수반으로서 발부동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분명히 적화되었다. 바로 바람앞에 등불이었다.

 

 

유신을 욕할려거든 시대적 환경을 보고 판단해야 될 것이다. 당시 북한은 분명히 북한괴뢰도당이었다. 북괴는 경제, 외교, 군사력 모두 대한민국을 엄청난 차이로 능가하였다. 자세한 국력비교는 직접 공신력있는 통계자료를 찾아봐라.

 

 

경제는 대한민국이 북한의 절반도 못따라갔고 경제적으로 월등한 북한은 중남미, 아프리카 등 신생국들에게 군사고문단을 엄청나게 파견하여 외교력을 확장하였다, 따라서 수교국 역시 북한에 비하여 엄청난 열세였다.

 

군사력은 도저히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아시아에 대한 정세변화가 절박한 시기였다. 155마일 휴전선은 바람 잘날 없었다. 피아간의 전투교전도 갑자기 증가하였다.

 

 

잘 알려진대로 1971년 미국 닉슨대통령은 ‘닉슨독트린’을 발표, 아시아는 아시안끼리 해결하라는 제2의 애치선 선언이 발표되었고 급기야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군이라는 카드를 내던졌다.

 

 

그리고 75년에 월남은 패망했다. 월남패망은 1970년도부터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은 이미 도저히 월남은 자력갱생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도 소련의 팽창정책을 억지하기 위하여 엄청난 전비를 쏟아부으며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나라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결국 월남은 패망하고 그 주변은 모두 공산화되었다. 몇 백 만 명이 나라를 잊어버리고 보트를 타고 탈출하였지만 과연 얼마나 생존했겠나?

 

 

그 당시 피맺힌 절규를 우리는 잊어버렸다. 75년에 북한 김일성은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등 북한은 4대 군사노선을 완료하고 모택동에게 찾아가 남한적화에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엄연한 사실이다.

 

 

베트남 패망을 먼발치서 지켜본 미국은 전쟁에 신물이 나서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은 급기야 대한민국에서 미군철군을 강행하기 위한 만반을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잘못되었다면 적화되는 길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용단이 아니었으면 오늘 대한민국은 영원히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지난 김대중, 노무현정권으로 이어진 좌파정권 10년동안 유린당한 근대 역사는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쳐박아 버렸다. 좌파들이 유신 욕하니까 이제 덩달아 우리의 젊은 세대들도 같이 독재. 유신타도를 외친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나 가르치고 욕하라고 해야되는 것 아닌가. 무조건 유신은 잘못됐다고 뻐꾸기처럼 앵무새처럼 가르친 좌파들 언제까지 후세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을 것인가?

 

 

유신을 욕하기 전에 북한인권에 대해 가르켜라. 유신을 욕하기 전에 처절하게 발부둥치며 경제를 일으킨 일화도 가르켜라. 유신을 욕하기 전에 어떻게 대한민국을 지켰나에 대해서도 제대로 가르켜라.

 

 

부흥된 국력으로 잘 먹고 잘 살면서 그 어려웠던 시절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완전 날조된 역사관을 만들고 가르키는 좌파들은 이 나라에 살 권리를 박탈해야 된다. 이 나라는 소리없이 오르지 잘살겠다는 민초들의 의지로 만들어진 나라다.

 

 

현재 북한을 보고 제대로 알고 10월 유신을 욕해라. 대한민국이 급성장한 시대는 바로 유신정부 이후다. 5.16 혁명으로 초근목피였던 시대를 탈출하고 겨우 배고픔을 면하고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장주한 발전은 바로 10월유신 이후다.

 

 

그것이 바로 세계10대 경제강국으로 만든 초석이었다. 기술도 자본도 없이 자력갱생을 한다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지만 오늘 대한민국은 악착같은 근성으로 경제대국을 만들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이렇게 일취월장한 것은 오르지 ‘하면 된다’는 정신력으로 일으켜 세운 나라다. 어설픈 민주화를 부르짖은 월남은 패망했다.

 

그 패망한 나라의 국민들은 공산치하가 싫다면서 월남을 탈출했지만 처절하게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재수좋은 사람은 살아남았겠지만 나머지는 모두 수장된 역사를 우리는 두눈으로 똑똑히 봐왔다.

 

월남은 재수 없어서 망한 나라가 아니다. 바로 좌파의 준동을 못막아서 스스로 자멸해버렸다. 과연 지금 그 베트남은 완벽한 인권이 보장되어있나?

 

 

지금 북한은 인권이 보장되어있나? 언제까지 우리는 국론이 분열돼야 하는가. 목소리 큰 극소수 좌파들의 준동이 이 대한민국을 이제 송두리째 좀 먹어버릴 기세다.

 

 

그 좌파들의 준동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멍들어가는 이 나라의 젊은 기둥들 미래가 걱정된다. 유신을 제대로 알고 유신을 욕해라. 개뿔도 모르는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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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외교문서에서 드러난 '北의 제2 한국전쟁 준비']

金, 6·3사태·베트남 파병 등으로 어수선한 南韓 노려
"유엔軍 철수시키라" 주장하며 1·21사태 등 끊임없는 도발
1975년 訪中때도 제2의 남침 요청… 中 정부 부정적 반응

중국 외교문서를 통해 김일성이 1965년 '제2의 한국전쟁'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북한이 1950년 6·25전쟁 이후에도 '무력 통일'의 꿈을 버리지 않고 구체적인 전쟁 시기와 방법, 심지어 중국의 파병 문제까지 고민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왜 1965년인가?

북한이 제2의 남침을 저울질하던 1965년은 우리 정부가 베트남에 전투 부대 파병을 시작한 해다. 앞서 1964년 6월 국내에서는 한·일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6·3사태가 일어나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미국과 남한의 군사력이 분산되고 국내 사정이 어수선한 틈을 타 재침(再侵)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북한 내부적으로는 김일성이, 1958년 친소(親蘇) 및 친중(親中)파 인사들이 집단지도체제를 주장하며 그에게 도전했던 이른바 '종파사건'을 진압한 후 주체사상을 만들고 반대파 숙청을 하면서 유일 독재 체제를 강화하던 시점이었다.

1965년 4월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김일성(왼쪽) 당시 북한 수상은 현지 사회과학원을 방문해‘북반부 혁명기지’‘남조선 혁명역량’‘국제혁명역량과 단결’등 3대 혁명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그해 김일성은 마오쩌둥(오른쪽) 주석 등 중국 측 인사들과 ‘제2 한국전쟁’을 계획하고 중국의 파병(派兵) 지원 등을 논의한 것으로 중국 측 연구 결과 드러나고 있다. /조선일보DB
북한은 1965년 2월 26일 유엔에 "진정으로 유엔 헌장에 부합되게 행동하려면 유엔군을 철수시키라"고 주장했고, 이어 4월에는 적화통일을 위한 '3대 혁명역량'의 강화를 강조했다.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1965~ 1966년 무렵 북한과 소련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던 반면 중국과는 밀착된 시기였다"고 했다.

◇"북 1962년부터 재침 준비"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과 북한의 이른바 '혁명 1세대'들은 제2의 남침 시도와 관련된 긴밀한 대화를 자주 나눴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외교협회가 발행한 전문지 '외교' 2008년 7월호에 실린 '김일성 발언록'에 따르면 1965년 중국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남조선 인민이 게릴라 투쟁을 시작하도록 (북한이) 지도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남조선에는 해안이 많고 산이 벌거벗었으며 교통이 비교적 발달해 있는 데다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다"고 답했다.

중국 '텅신(騰迅)평론' 등에 지난 3월 기고된 글에 따르면 김일성은 또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이었던 양융(楊勇)에게 "우리는 이미 베트남에 사람(군사고문단)을 보내 그들의 경험을 배우고 있다"며 "더 늙기 전에 한 번 더 (남쪽과) 겨뤄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이 짐을 아랫대로 물려준다면 우리가 싸우는 것보다 반드시 더 잘한다는 법도 없다. 경험 있는 우리가 이 무거운 짐을 질 테니 당신들과 함께 싸워보면 어떻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양융은 6·25 당시 중국의 인민지원군 부사령관으로 참전했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은 1962년 12월 당 중앙위 제5차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과 국방건설 병진노선을 채택하면서 사실상 남침 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북한의 '제2의 한국전쟁' 시도 전후 상황.
 
1965년 북한의 재침 시도는 행동에 옮겨지지 않았지만, 이후 1972년 남북 7·4공동성명이 나올 때까지 1·21 사태, 푸에블로호 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침투 사건 등을 일으키며 대남 도발 수위를 높였다.

중국은 이후 닉슨 미국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 등을 계기로 북한의 무력 통일 방침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으로 변했다. 김일성은 1975년 4월 중국을 방문해 베트남 공산화 통일을 거론하며 제2의 남침을 요청했으나 중국 정부는 이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력 통일 기회는 이미 상실"

북한은 지난 6월 헌법이나 노동당 규약보다 상위 규범인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39년 만에 개정했지만, 한반도 적화통일을 규정한 제1조 4항('조국 통일과 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위하여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은 그대로 유지했다. 하지만 중국 전문가들도 시대적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남·북한의 군사력 수준도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북한의 무력통일 시도는 이미 현실성을 상실했다고 보고 있다. 다만 핵무기 보유를 통해 군사적 긴장을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청샤오허 중국 런민대 교수는 24일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리는 평화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발표문을 통해 "중·미 관계의 긴장 완화 및 한·중 외교 관계 수립으로 인해 북한은 이제 무력 통일이라는 역사적 기회를 상실했다"고 했다. 그는 "북한의 군사 도발은 과거처럼 러시아와 중국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라며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한반도에서 무력 사용을 지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력을 통한 정책 목표 실현 또한 반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