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박정희대통령 중화학공업의 육성(1973∼1979)

여동활 2012. 5. 18. 21:40

중화학공업의 육성(1973∼1979)

1. 배경

중동지역의 정치적 불안의 여파와 전세계적 석유수요 급증에 기인한 제1차 석유파동으로 선진국은 물론 당시 경공업 중심의 수출주도의 경제성장을 추진하던 우리 경제도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었음.

1970년대 초 제3차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던 정부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을 통해 중화학공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973년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였음.

- 철강, 화학,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등 6개 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선정하여 금융, 조세, 재정, 기술지원 등 다양한 분야의 정부지원과 함께 막대한 자원을 이들 산업에 집중적으로 투입하기 시작하였음.

○ 중화학공업화 추진 배경

- 첫째, 제1, 2차 경제개발5개년 기간중 수입대체 또는 공업구조고도화 차원에서 육성하던 철강, 석유화학, 조선, 자동차, 기계 등 중화학공업은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 산업으로 당시의 제한된 소규모의 국내 시장만으로는 적정규모의 설비를 갖추기 어려웠음.

- 둘째, 1970년대 세계적인 불황으로 대선진국 수출이 부진한데다 신보호무역주의가 대두되고, 저렴한 노동력을 가진 후발개도국이 당시 우리 경제의 주력 수출제품분야로 수출을 확대함에 따라 경공업을 통한 수출과 경제성장의 지속적인 확대가 점차 어려위지기 시작하였음.

- 셋째, 1960년대 중반이후 수출산업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으로 우리나라 수출상품 구조가 종래의 비내구소비재 중심에서 내구소비재와 노동집약적 중간재 중심으로 변해감에 따라 기계 설비 등 자본재와 석유화학, 철강 등 자본집약적 중간재의 국내생산 필요성이 크게 증대되었음.

- 넷째, 미국의 탈공업화, 일본의 공해문제 및 석유파동 등으로 인해 선진국의 조립가공형, 공해유발형, 에너지 다소비형 중화학산업들이 후진국으로 이전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음.

- 다섯째, 국제정치 환경과 남북관계의 변화로 인해 북한과의 체제 경쟁을 위한 국력증강과 자주국방의 필요성이 커졌고 이에 따라 정부는 필요시 방위산업으로 즉시 전환할 수 있는 중화학공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고자 하였음.

2. 주요 산업의 발전상

197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수출상품구조가 종래의 비내구소비재 중심에서 내구소비재와 노동집약적 중간재 중심으로 변해감에 따라 기계, 자동차 등 자본재와 철강, 석유화학 등 자본집약적 중간재의 국내생산의 필요성이 크게 증대되었음.

-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의 공업화는 석유화학, 철강 등 중간재 산업과 조선, 자동차 등 수송기계 산업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었음.

<석유화학산업>

중화학공업중에서 가장 먼저 발전기반을 갖추고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간 산업은 석유화학산업이었음.

석유화학산업은 1960년 수출주력 업종이었던 섬유, 의복 등 경공업의 자립 기반 확충 차원에서 그 어떤 산업보다 필요한 산업이었음.

- 1963년 한국나일론이 생산을 시작한 이후 화학섬유 산업이 면방업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였음.

이러한 화학섬유산업의 발전은 함섬섬유를 만드는 석유화학 산업의 성장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1972년 울산 석유화학 콤플렉스가 완공된 이래 주요 중간원료의 해외 수입의존도가 급격히 낮아지기 시작하였음.

수요산업과 연계되어 발전을 거듭한 석유화학산업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내수와 수출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1979년 기초유분에서 유도품에 이르기까지 일관생산체제를 갖춘 여천석유화학단지 콤플렉스가 구축되기에 이르렀음.

이러한 화학섬유와 석유화학산업은 당시의 산업발전과정의 수요산업과 중간재 공급산업간의 긴밀한 관계형성에 주목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민간의 과감한 투자를 기반으로 발전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음.

<철강산업>

석유화학산업과 마찬가지로 대표적 중간재산업인 철강산업도 제1, 2차 경제발전계획을 통해 어느 정도 성장 기반을 구축하였으나 생산능력은 상당히 부족한 실정이었음.

1970년대 초반 강재생산은 겨우 내수를 충당하는 수준이었으며, 제강능력은 빈약하였고, 제선능력은 더욱 심각한 수준이었음.

그러나 1973년 연산 백만톤의 조강능력을 갖춘 포항종합제철소가 완공되고, 이후 그 규모를 확장해 감에 따라, 조선, 자동차, 일반기계 등 자본재산업과 국내 건설, 사회간접자본 구축에 소요되는 철강의 원활한 공급이 가능하게 되었음.

또한 1972년 5개업체, 43만톤 생산수준에 불과했던 전기로 설비업체가 이 기간 중 급속히 증가하면서 1985년에는 14개업체, 910만톤 수준으로 성장, 우리나라의 공업발전에 필요한 핵심 소재의 수급상 애로를 해소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음.

<조선산업>

1960년대만 하더라도 경제재건 움직임과 함께 해상수송량이 증가하면서 연근해 수송에 필요한 선박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그동안의 목선건조 체제에서 강선건조 체제로 전환하였음.

- 최대 건조선박은 1만2,000톤급에 불과하였음.

○ 그러나, 1970년대 들어와 우리나라 조선산업은 정부의 중화학공업화 추진에 따라 주요 전략산업으로 육성됨에 따라 현대화된 대형조선소 건설과 함께 세계 조선시장에 본격 진출하는 도약기를 맞게 되었음.

1974년 현대중공업이 600미터 대형도크를 건설하고, 450톤급 골리앗 크레인을 설치하여 세계 최대 규모의 대형조선소로 등장하면서 조선산업의 대형화와 현대화가 적극 추진되었음.

- 1973년부터 해외로부터 대형 탱커(VLCC)를 수주받음으로써 조선산업의 경쟁력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이룸.

대우중공업, 삼성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등의 대형 조선소들이 그 이후 건설되었으며, 이 결과 1979년 우리나라 조선능력은 약 280만톤으로 1970년에 비해 15배 가량 증가하였음.

- 건조 가능한 최대 선박의 크기도 12만 6,000톤으로 10배 이상 증가하였음.

<자동차산업>

197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의 장기 자동차공업진흥계획에 따라 국내수요는 물론 해외시장 진출을 목적으로 하는 고유 모델개발과 양산체제 구축을 목표로 하는 수출산업화 전략이 추진됨에 따라 자동차산업의 발전이 본격화 단계에 진입하기 시작하였음.

1974년 자동차산업은 현대, 기아, 지엠코리아(76년에는 새한, 83년에는 대우)라는 새로운 3사체제로 개편되었음.

- 현대자동차는 1975년 국산화율 90%의 고유 모델 포니를 개발하고, 1976년부터는 수출을 하기까지에 이르렀으며, 이 결과 1977년부터는 자동차의 국내 생산이 국내 수요량을 상회하기 시작하였음.

<기계산업>

197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의 산업화는 필요한 설비와 기계를 해외에서 턴키( turn-key) 방식에 의존, 통째로 수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며, 우리나라의 자본재산업은 간단한 기술의 조립생산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었음.

- 농업, 광업, 섬유산업 등 경공업에서 사용되는 기계를 주로 생산하는 수준이었음.

그러나 1973년 정부가 장기 기계공업육성계획을 수립한 이래 창원기계공업단지를 건립하여 턴키방식을 지양하고 플랜트의 국산화를 추진하였음.

이와 함께 정부의 집중적인 육성정책, 중화학공업화에 따른 내수기반의 확충, 민간 기업의 활발한 투자, 포항, 여수 등 중간재 공업지역으로부터의 원활한 소재공급 등에 힘입어 1970년대 후반부터는 기계산업이 급성장하기 시작하고 자본재의 자급도가 향상되는 등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음.

자본재산업의 수급구조와 성장률

단위: 수출입은 백만달러, 기타는 10억원, %

연도

생산

수입

내수

수출

수출/생산

생산/내수

수입/내수

1966

7 (1.7)

89

31

1

2.5

23.0

77.6

1967

11

114

42

3

7.3

26.9

75.0

1970

20 (1.5)

250

96

3 (0.4)

4.9

20.4

80.6

1972

29

306

146

14

18.5

20.1

83.6

1973

65 (1.8)

478

246

24

14.8

26.3

77.6

1977

359 (2.3)

1,201

911

61

8.2

39.4

63.8

1980

854 (2.4)

1,705

1,756

208 (1.3)

14.7

48.6

58.5

1981

1,176

1,761

2,185

290

16.9

53.8

55.2

1985

2,640 (3.4)

2,574

4,467

483 (1.7)

16.0

59.1

50.3

1987

4,886 (4.3)

4,833

8,095

866

14.3

60.4

48.3

1988

5,429

5,750

8,615

1,375 (2.3)

18.5

63.0

48.6

67-72

26.3

22.8

29.2

65.2

연평균

성장률

73-80

52.4

24.0

36.4

40.6

81-88

26.0

16.4

22.0

26.6

67-88

35.1

20.8

29.1

41.4

자료: 한국산업은행조사부, 『자본재산업의 장기발전전망』, 1989

주 : 1. 생산 난과 수출 난의 괄호 속은 제조업에 대한 비중

2. 자본재산업의 범위는 한국표준산업분류에 의하면 기관·터빈 제조 업(3821), 사무·계산·회계용 기계제조업(3825), 대부분의 서비스산 업용 기계제조업(3826)등을 제외한 기계제조업

<전자산업>

1970년대 우리나라의 전자산업도 새로운 발전의 전환기를 거쳐 주도적인 수출산업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음.

- 특히 1974년 컬러 TV의 조립생산과 함께 정부가 전자제품의 중점 육성품목과 생산업체를 선정하는 등 다양한 지원 정책과 민간기업들의 노력에 의해 전자산업은 수출산업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음.

- 이 시기에는 보다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게 됨에 따라 선진국의 기술을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였음.

이와 같은 성장기반의 확충으로 인해 1966~1979년 기간 중 전자산업 생산과 수출의 연평균증가율이 각각 47%, 62%에 달할만큼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여 우리나라 산업의 고도화와 중화학공업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음.

3. 주요 정책과 정부의 역할

정부는 기존의 중화학공업화의 수출산업화를 위해 정부주도의 특정 산업 지향형 대규모 투자와 종합적인 지원체계를 갖추어 일관되게 추진하였음.

- 1973년 5월 범정부기구인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발족하여 ‘중화학공업 육성에 관한 지침’을 발표하여 강력한 지원체계를 구축하고, 1973년 12월에는 「국민투자기금법」을 제정하여 이를 뒷받침하였음.

구체적으로 철강, 비철금속, 석유화학 등 소재산업과 조선, 기계(자동차 포함), 전자 등 최종재 조립장치산업의 발전을 위해 1973~1981년간 약 2조 9800억원(1970년 불변가격기준)의 자금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수립함.

- 이러한 투자규모는 동 기간 제조업 전체 투자의 64%에 해당됨.

중화학공업화 6개 주요업종 개발계획 내용

목표연도

규모

자본조달(1973~81, 백만 달러)

대표기지장소

외수

내수

합계

구성비

(%)

철강

생산능력

1976

409.2만 M/T

1502

674

21769

24.6

포항

1981

1470만 M/T

비철금속(생산능력)

연10만 M/T

222

123

345

3.9

온산

아연

연8만 M/T

연5만 M/T

알미늄

연10만 M/T

기계공업(생산능력)

1981

48억달러

(GNP 13.6%)

1049

1137

2186

24.7

창원

조선

(생산능력, 수출)

생산

1980

545

416

352

768

8.7

옥포

죽도

1985

920

수출

1980

10억달러

1985

29억달러

전자

(생산능력, 수출)

수출

1981

25억달러

593

599

1192

13.5

구미

화학

석유정제

1981

1225만 배럴/일

1523

662

2185

24.7

여천

울산

석유화학

1981

60만 M/T

(에틸렌기준)

1986

150만 M/T

비료공장

1975

국제규모

합계

1981

-

5305

3547

8852

100

자료: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 「중화학공업육성계획」, 1973; 중화 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 「중화학공업 추진현황」, 1979.

당시 정부의 중화학부문에 대한 지원은 주로 재정투융자형식의 재정지원과 함께 금융지원 및 조세감면을 통해 이루어졌음.

- 정부는 재정지원과 함께 민간기업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다양한 금융과 세제상의 우대조치 등 정책적 지원정책을 추진하였음.

- 특히 금융지원은 앞서 제정되었던 개별산업의 육성법에 의해 일정한 기준에 해당하는 업종과 기업에 대한 개별 공업기금의 지원, 저리의 정책금융대출, 산업지원자금 형식의 저리자금대출 등을 통해 이루어졌음.

우선 중화학공업부문에 대한 투자촉진을 위한 재정융자는 국민투자기금법에 의해 설치된 국민투자기금의 저리융자를 통해 이루어졌음.

- 1974년 이후 1981년에 이르기까지 재정투융자에서 차지하는 국민투자기금의 비중은 80%~90%에 달하였으며, 그 중 중화학공업부문에 대한 지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기간 중 평균 67.9%에 달하였음.

국민진흥기금의 중화학공업 지원추이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1981

合計

국민투자기금(A)

626

1066

4607

2013

3626

4397

4384

5430

23149

중화학공업지원(B)

343

477

938

1485

2523

3152

2967

3830

15715

비율

(B / A)

54.8

44.7

58.4

73.8

69.6

71.7

67.7

70.5

67.9

자료: 재무부,「재정투융자백서」, 1982

주 : 1) 중화학공업지원은 연불수출을 포함한 것임.

2) 나머지는 식량증산사업, 새마을 공장, 전기업 등에 대한 지원임.

한편, 이러한 재정융자만으로는 방대한 규모의 투자재원을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화학부문에 대한 대기업의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 산업지원자금형식의 금융지원이 함께 이루어졌음.

- 이는 주로 당시 정부의 철저한 통제 하에 있던 산업은행의 대출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당시 산업은행자금의 대부분이 중화학공업에 집중적으로 대출되었음.

○ 이러한 재정 및 금융의 집중지원과 함께 조세상의 지원도 중화학공업부문에 집중되었음.

- 중화학공업이 중심이 되는 이른바 14개의 주요산업에 대해 처음 3년간 100%, 다음 2년간은 50%를 감면하는 내국세의 감면혜택과 70%~100%의 관세감면 혜택이 제공되었음.

이와는 별도로 중화학공업의 각종 시설재 수입시 관세감면, 설비투자시의 법인세 감면 등이 추가적으로 이루어졌음.

- 중화학제품의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수출에서 발생하는 소득에 대한 소득세 또는 법인세의 50%를 감면해 주 는 혜택이 부여되었음.

한편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위해 정부는 중화학공업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인력의 공급을 위해 각종 전문학교 및 직업교육기관을 확대·신설하였음.

또한 중화학공업이 요구하는 기술 확보를 위해 정부출연연구소를 신설하는 등 중화학공업의 발전과 관련된 인프라 구축에 많은 투자를 하였음.

이처럼 1970년대 초반 정부의 중화학공업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에 힘입어 우리나라의 제조업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선진국형 산업구조의 기틀을 잡아가기 시작하였음.

- 당시 정부의 집중지원을 받게 된 중화학공업은 1970년대 연평균 20.9%의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고, 1979년 중화학공업화율이 51.2%에 달하는 성과를 거둠으로써 우리나라 경제는 이 시기에 제조업의 본격적인 구조고도화 계기를 마련하였음.

- 동시에 수출에서 중화학공업제품이 차지하는 비중도 1970년 12.8%에서 1980년 41.5%로 증가하여 우리나라의 산업 및 수출구조가 비로소 선진국형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음.

중화학공업화의 진전추이

단위 : %

연도

공업화

수출상품구조

중화학공업

경공업

중화학공업

경공업

1차산품

1970

37.8

62.2

12.8

69.7

17.5

1973

40.5

59.5

23.7

63.4

12.9

1975

46.4

53.6

25

57.4

17.6

1976

46.8

53.2

29.1

58.8

11.8

1977

48.5

51.5

32.2

53.6

14.2

1978

48.8

51.2

34.6

45.5

10.9

1979

51.2

48.8

38.4

51.4

10.1

1980

52.6

47.4

41.5

49.4

9.1

자료:1) 한국은행 (1982), 「한국의 국민소득」

2) 한국무역협회, 「무역동향」, 각년도판

주 :1) 1975년 불변가격, 부가가치기준

2) 경상가격, 통관기준

1973-1979년 기간 중 정부주도의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성과에 대한 평가는 크게 부정적 평가와 긍정적 평가로 양분됨.

부정적 평가는 주로 이 기간 중 정부의 중화학공업부문에 대한 집중투자 결정이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여건이나 발전단계에 비추어 볼 때 합리적인 결정이 아니었다고 평가함.

- 또한 이러한 정부주도의 중화학공업부문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에 비해 경제적 성과가 크지 않거나 불필요한 경제적 왜곡 등 오히려 여러 가지 문제점만 야기했다고 평가함.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주로 정태적 비교우위론에 기초한 논리적 관점의 평가이거나 단기적 관점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 정책결과의 평가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음.

-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는 당시 대내외 여건 변화에 부응한 우리 산업의 구조전환의 필요성 등 내적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었던 것임.

- 또한 중화학공업화의 주요 대상산업들이 장치산업이며 자본회임기간이 길다는 산업특성에 비추어 볼 때, 이 기간 중의 정부정책에 대한 평가는 장기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임.

- 이와 함께 이 당시의 중화학공업 육성이 국가장기발전전략과 경제발전의 관점에서 기간산업의 발전기반 구축의 의미를 지니는 만큼 장기적인 산업발전과 경제발전의 관점 및 방위산업의 육성이라는 비경제적 측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평가할 필요가 있음.

- 이는 당시 중화학공업의 육성이 1960년대 경공업중심의 수출주도 공업화에 의한 경제성장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장기적으로 소득증대에 따른 국내의 내구재 소비수요에 대한 공급체계 구축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임.

긍정적인 평가는 이 시기의 중화학공업화가 당시 개도국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산업구조의 고도화 달성에 크게 기여한 점에 주목함.

- 개도국의 특성과 단기적 관점에서 수익을 추구하는 민간 기업의 특성상, 중후장대형의 중화학공업화는 지나치게 투자가 부족하던지, 투자가 이루어지더라도 적절한 투자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음.

-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세계은행과 저명 경제학자들의 부정적 타당성 분석 결과에도 불구하고, 정부주도의 과감한 투자와 집중적인 지원을 통한 조기 중화학공업화의 기반을 구축한 것은 개도국으로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임.

- 1980년대 후반 소위 삼저현상을 활용하여 만성적인 적자구조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1970년 당시 정부가 집중 육성했던 중화학공업부문이 1980년대 후반의 수출 증대를 주도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

- 특히 1990년대 말의 외환위기 극복과정과 2000년대 들어 중국이 새로운 수출시장으로 부상하였을 때 중화학공업부문이 적지 않은 수출증대의 주요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의미가 큼.

- 또한 최근의 세계 금융위기 회복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전자, 자동차 수출이 세계 시장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중화학산업발전의 기반이 있기 때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