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포항제철 건설 이야기
역사학도님 글
1960년대에 한국은 거지 나라로 해외에 알려져 있었다. 만약 노무현이 1964년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더라도 전혀 외국에 큰소리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니, 그 시대에 국제사회는 한국을 거지 나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가 예산의 90%를 외국 원조로 충당하던 거지 나라요, 아시아에서는 심지어 방글라데쉬로부터 원조를 받아야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거리에서 외국인들의 카메라에 잡힌 모습은 으례히 거지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 '88서울올림픽 대회를 유치하셨으며, 비록 '88서울올림픽의 두 주역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은 그 올림픽을 보지 못하였으나, 한국에서 일어난 경제 기적이 전세계인을 놀라게 하였다.
그런데, 한강의 기적 제1호가 포항제철 건설이었다. 아직 아무도 수출에 대하여 말하지 않던 시절에, 우리나라는 수출하기에는 너무도 가난한 나라라며 모두 수출을 꿈조차 꾸지 못하던 시대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가발 수출과 섬유수출의 아이디어를 내셨다. 그런데, 그런 노동집약적 산업은 다른 이라도 육성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기에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포항제철은 그렇지 않다. 포항제철과 같은 공장은 다른 개발도상국들에서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산업시설이요, 중국의 등소평이 부러워하여 많은 노력을 했으나 끝내 실패의 고배를 들여마셔야만 했던 산업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에 취임하시던 1964년에 벌써 그 구상을 하였다. 국제시장 동향을 연구하며 분석하시던 박정희 대통령은 향후 수년 내에 국제시장에서 철강 수요가 급격히 늘어날 것을 예상하고 포항제철 건설을 구상하셨다. 더구나, 그것도 한국 경제가 가장 어려웠던 해에 구상하셨다. 국가 재정 대부분을 미국 원조에 의존하던 나라에서 미국의 무상원조가 중단되었다. 국고에서 외화보유고가 텅비어 있었던 상황에서도 포항제철 건설을 구상하시고 추진하셨다는 데에 경제전략가로서의 그의 지도력의 위대함이 있었다.
1973년7월3일 오후2시 포항종합제철 1기 설비종합준공식이 현장에서 있었다. 朴대통령이 國運을 걸고 추진하던 중화학공업 건설의 첫 물증이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세계개발은행(IBRD)에서도 미국 국제개발처(USAID)에서도 한극같은 나라에서 제철공장 건설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차관 제공을 거절하였을 때 웬만한 이들은 포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많은 이들이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을 향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그 꿈은 몽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박정희는 몽상가로서의 애국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애국의 뜻을 강력하게 실천하였다.
이날 1973년7월3일 103만톤짜리 포항종합제철 준공식 치사에서 朴대통령은 3년 전을 회고했다:
<<"1970년 봄 롬멜 하우스 앞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김학렬 부총리, 박태준 사장과 함께 기공식 버튼을 눌렀는데, 지금 이곳에 이와 같은 초현대적인 제철소를 준공하게 된 데 대하여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요즘 흔히 우리 나라 공업이 중화학 공업 시대의 문턱에 도달했다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우리 공업이 중화학 공업 시대의 문턱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벌써 문턱을 훨씬 지나 상당히 깊은 분야에까지 진행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준공을 보는 이 포항 종합 제철은 생산 규모에 있어서는 1차적으로 조강 103만톤 규모가 됩니다. 선진 여러 나라에는 지금 현재 연산 1천만톤을 넘는 대규모의 공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이 공장은 이제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는 남을 따라가기 위한 출발에 있어서 첫 개가를 여기서 올렸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공장은 금년부터 계속해서 260만톤으로 확장 공사를 하고, 또 계속해서 79년 말까지는 700만톤 규모까지 확장할 계획을 지금 추진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는 1980년대에 가면 우리 나라의 철강 수요가 국내만 하더라도 약 1,200만톤 내지 1,300만톤을 넘을 것이라는 추정하에 포항 종합 체절의 1차, 2차 확장 공사와는 별도로 이와 병행하여 연산 약 1천만톤 규모의 제2종합 제철 공장 건설을 지금 예의 추진 중에 있습니다.
이러한 공장들이 전부 계획대로 순조롭게 추진되어서 80년대 초에 가면 우리가 지금 지향하고 있는 100억달러 수출이라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보는 것입니다. 100억달러 수출을 할 때가 되면 총수출량에 있어서 중화학 분야의 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약 60%를 넘게 될 것입니다. 100억달러 수출에서 약 60억달러 이상은 중화학 분양의 제품이 나가야 된다 하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을 할 때 오늘 준공을 보게 된 이 종합 제철은 앞으로 우리 나라의 중화학 공업의 하나의 근간이 되고 가장 핵심체가 된다는 것을 한 번 느끼게 됩니다. >>
박정희 대통령의 이 연설문을 이십 년이 지난 1990년대에 다시 읽어본 이들은 그의 예측이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적중하였음에 놀랄 것이다. 포항제철은 오년 만인 1978년12월8일 제3기 증설로 연산 550만 톤 규모를 갖추었다. 이어서 그의 후임자 전두환 대통렬이 취임할 무렵인 1981년2월18일엔 제4기 증설로 850만 톤 규모로 커졌다. 朴대통령이 예언했던 대로 전두환 정부는 1980년대에 광양제철소 건설을 추진하여 1990년대에는 연산 2000만톤 생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국가건설기의 경제 개발에 대해 무지한 이들은 국가 건설기에는 정권이 4년마다 교체되었어야 한다는 무식한 주장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에 발달한 중화학공업, 전자산업, 반도체, 원자력, 전기, 제철, 전자, 조선, 자동자 등의 산업들 중에서 포항제철 하나만 예를 들어 보아도 왜 미국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1930년대에 경제 개발 정책을 시작하였을 때 미국 국민들이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종신집권 권한을 부여하였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장차 국제시장에서 철강산업 호황산업 시대가 올 것을 남보다 일찍 예측하시고 제철소부터 건설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잘 사는 길임을 판단하셨던 때는 1964년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자금이 없었기에 1966년 12월에 이른바 KISA(대한 국제 제철 차관단)을 구성臼눼? 미국에 달려가 코퍼스사의 포이 회장에게 여러번 설득하였으나 IBRD가 미국의 수출입은행에게 한국의 종합제철소 사업은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를 했기 때문에 포이 회장은 한국에서는 노동집약적 산업이 적합하다는 말만 할 뿐 박태준의 청을 거절하였다.
어느날 11시가 넘은 시각에 박태준은 마지막 시도로 포이에게 전화를 하여 두사람이 마주 앉았다. 박태준은 가난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철소가 필요하다고 누누이 역설했지만 포이는 " 당신의 애국심은 이해하나 그것과 사업은 별개의 문제다."라는 반응이었다.그는 하와이 해변가에 콘도를 하나 가側?있으니 돌아가는 길에 잠시 쉬었다 가라는 말과 함께 돌아가 버렸니다. 하와이에 간 박태준은 신발을 벗고 하와이 백사장에 벌렁 누웠다. 이대로 돌아가 박대통령을 뵐 면목이 없다는 생각을 하던 그에게 떠오른 샹걱이 바로 대일 청구권자금이었다.
박태준은 박대통령에게 즉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놈들 하고는 다 틀렸습니다. 우리가 기만을 당한겁니다. 대일 청구권 자금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무상.유상 합치면 1억 달러는 안되겠습니까?" "그래.자네가 기막힌 생각을 했군. 그정도는 될거야."
이렇게 해서 박태준은 그길로 도쿄로 날아 갔다. 야하타제철소 의 사장인 이나마야 요시히로와 후지제철소의 나가노 시게요에게서 박태준은 포철의 건립과 기술이전약속을 받아냈지만 문제는 또 있었습다. (일제시대에 남한을 농업국으로 만들려던 정책을 계승한 탓이었는지) 1억불의 청구권자금은 반드시 농업발전용으로만 쓰이도록 돼 있었기 때문이다. 박태준이 이 자금의 전용을 일본정부에 요구하자 일본정부는 난색을 표명했다. 박태준의 끈질긴 설득의 성과로 마침내 아이치 외무장관은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에 1억달러를 재정차관으로 제공하는 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오오히라 통산성장관이 반대하고 나섰다. 산업의 첫단계는 농업자립화이므로 비료공장,농기계공장부터 세워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습니다. 박태준은 "제철소건설의 목표는 국가안보이다.한국은 여전히 전시상태이다.안보를 고려할 때 제철소가 반드시 필요하다.한국이 적화되면 일본도 좋을 것이 없는 게 아닌가."라는 논리로 결국 오오히라를 설득한다. 박태준이 귀국해서 김학렬 부총리에게 일의 경과를 보고하자 김학렬은 구두로는 안돼고 문서를 가져오라고 해서 박태준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3대 철강회사의 협조각서를 받아온다.
1969년 8월 26일,도쿄에서 열린 제 3차 한일 각료회담에서 일본측은 포철건립에 대해서 원칙적으로는 찬성하나 일본 철강연맹과 상의한 후 자세히 검토하겠다는 발언을 한다. 이에 김학렬은 단상에 올라가 그 각서를 들어 보이며 "여기 3대 일본 철강사들의 협조 각서가 있다. 이것은 한국의 100만톤 규모의 제철소가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일본 각료들을 추궁했다. 더 이상 답변을 할 수 없었던 일본의 각료들은 마침내 포철 건립을 지원한다는 각서에 서명한다.
장소와 자금을 확보했으나 일본은 기술이전을 꺼렸다. 호랑이새끼를 키운다는 것이었는데 박태준은 매일같이 일본의 철강회사를 찾아 다니며 기술이전을 요청했다. 이에 제철소 사장들은 박태준을 피해서 일부러 휴가를 가기도 했는데 박태준은 휴가지까지 따라가는 집요함을 보였다. 마침내 신일본제철이 기술이전을 하기로 결정이 났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1970년 4월 1일 착공식에서 박태준은 이렇게 말한다. "공사 기일을 맞추지 못하면 우리는 전원 저 오른쪽에 보이는 영일만에 들어가 빠져 죽는다."
이렇게 시작된 공사는 밤낮이 없었고 건설에 참여했던 전 임직원은 대일청구권자금으로 공사를 하느니만큼 실패하면 민족의 반역자가 된다는 각오로 임했다.
박태준은 빌려온 대일청구권 자금을 가르켜 "선조들의 피의 댓가이다. 이돈으로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우리는 모두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다.
자,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에 제철산업 구상을 했으나, 대일청구 자금 1억불을 가지고 실제로 공사가 시작된 때도 1970년이었다. 그리고, 그 1억불을 농업용이 아니라, 산업용으로 쓰기 위한 허락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아내는 것이 그렇게 도 힘들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김정일 핵무기 개발 자금으로 공식 확인된 것만 5억 달러를 비밀송금하였다.
그리고 포항제철 건설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 당시 대통령이 박정희였다는 사실이 있다.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구상만 해 놓고 예산이 확보되기 전에 정권이 교체되었다면 포항제철 건설이 계속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1973년 6월 9일 마침내 마침내 제 1고로에서 쇳물이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일관제철소가 생긴 것이다. 포철은 설비가동 1년만에 그동안 투입된 외국자본을 모조리 갚고도 흑자를 기록한다. 첫해에 242억원의 흑자를 기록한 이래 포철은 2004년까지 단 한해도 예외없이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1973년 이래 설비와 자산규모는125배로 성장하고, 매출액은 287배로 성장하고. 순이익은 239배로 성장했다. 당시 103만톤의 조강능력은 2003년에는 2800만톤이었다.
1960년대에 한국은 거지 나라로 해외에 알려져 있었다. 만약 노무현이 1964년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더라도 전혀 외국에 큰소리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니, 그 시대에 국제사회는 한국을 거지 나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가 예산의 90%를 외국 원조로 충당하던 거지 나라요, 아시아에서는 심지어 방글라데쉬로부터 원조를 받아야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거리에서 외국인들의 카메라에 잡힌 모습은 으례히 거지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 '88서울올림픽 대회를 유치하셨으며, 비록 '88서울올림픽의 두 주역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은 그 올림픽을 보지 못하였으나, 한국에서 일어난 경제 기적이 전세계인을 놀라게 하였다.
그런데, 한강의 기적 제1호가 포항제철 건설이었다. 아직 아무도 수출에 대하여 말하지 않던 시절에, 우리나라는 수출하기에는 너무도 가난한 나라라며 모두 수출을 꿈조차 꾸지 못하던 시대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가발 수출과 섬유수출의 아이디어를 내셨다. 그런데, 그런 노동집약적 산업은 다른 이라도 육성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기에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포항제철은 그렇지 않다. 포항제철과 같은 공장은 다른 개발도상국들에서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산업시설이요, 중국의 등소평이 부러워하여 많은 노력을 했으나 끝내 실패의 고배를 들여마셔야만 했던 산업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에 취임하시던 1964년에 벌써 그 구상을 하였다. 국제시장 동향을 연구하며 분석하시던 박정희 대통령은 향후 수년 내에 국제시장에서 철강 수요가 급격히 늘어날 것을 예상하고 포항제철 건설을 구상하셨다. 더구나, 그것도 한국 경제가 가장 어려웠던 해에 구상하셨다. 국가 재정 대부분을 미국 원조에 의존하던 나라에서 미국의 무상원조가 중단되었다. 국고에서 외화보유고가 텅비어 있었던 상황에서도 포항제철 건설을 구상하시고 추진하셨다는 데에 경제전략가로서의 그의 지도력의 위대함이 있었다.
1973년7월3일 오후2시 포항종합제철 1기 설비종합준공식이 현장에서 있었다. 朴대통령이 國運을 걸고 추진하던 중화학공업 건설의 첫 물증이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세계개발은행(IBRD)에서도 미국 국제개발처(USAID)에서도 한극같은 나라에서 제철공장 건설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차관 제공을 거절하였을 때 웬만한 이들은 포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많은 이들이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을 향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그 꿈은 몽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박정희는 몽상가로서의 애국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애국의 뜻을 강력하게 실천하였다.
이날 1973년7월3일 103만톤짜리 포항종합제철 준공식 치사에서 朴대통령은 3년 전을 회고했다:
<<"1970년 봄 롬멜 하우스 앞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김학렬 부총리, 박태준 사장과 함께 기공식 버튼을 눌렀는데, 지금 이곳에 이와 같은 초현대적인 제철소를 준공하게 된 데 대하여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요즘 흔히 우리 나라 공업이 중화학 공업 시대의 문턱에 도달했다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우리 공업이 중화학 공업 시대의 문턱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벌써 문턱을 훨씬 지나 상당히 깊은 분야에까지 진행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준공을 보는 이 포항 종합 제철은 생산 규모에 있어서는 1차적으로 조강 103만톤 규모가 됩니다. 선진 여러 나라에는 지금 현재 연산 1천만톤을 넘는 대규모의 공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이 공장은 이제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는 남을 따라가기 위한 출발에 있어서 첫 개가를 여기서 올렸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공장은 금년부터 계속해서 260만톤으로 확장 공사를 하고, 또 계속해서 79년 말까지는 700만톤 규모까지 확장할 계획을 지금 추진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는 1980년대에 가면 우리 나라의 철강 수요가 국내만 하더라도 약 1,200만톤 내지 1,300만톤을 넘을 것이라는 추정하에 포항 종합 체절의 1차, 2차 확장 공사와는 별도로 이와 병행하여 연산 약 1천만톤 규모의 제2종합 제철 공장 건설을 지금 예의 추진 중에 있습니다.
이러한 공장들이 전부 계획대로 순조롭게 추진되어서 80년대 초에 가면 우리가 지금 지향하고 있는 100억달러 수출이라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보는 것입니다. 100억달러 수출을 할 때가 되면 총수출량에 있어서 중화학 분야의 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약 60%를 넘게 될 것입니다. 100억달러 수출에서 약 60억달러 이상은 중화학 분양의 제품이 나가야 된다 하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을 할 때 오늘 준공을 보게 된 이 종합 제철은 앞으로 우리 나라의 중화학 공업의 하나의 근간이 되고 가장 핵심체가 된다는 것을 한 번 느끼게 됩니다. >>
박정희 대통령의 이 연설문을 이십 년이 지난 1990년대에 다시 읽어본 이들은 그의 예측이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적중하였음에 놀랄 것이다. 포항제철은 오년 만인 1978년12월8일 제3기 증설로 연산 550만 톤 규모를 갖추었다. 이어서 그의 후임자 전두환 대통렬이 취임할 무렵인 1981년2월18일엔 제4기 증설로 850만 톤 규모로 커졌다. 朴대통령이 예언했던 대로 전두환 정부는 1980년대에 광양제철소 건설을 추진하여 1990년대에는 연산 2000만톤 생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국가건설기의 경제 개발에 대해 무지한 이들은 국가 건설기에는 정권이 4년마다 교체되었어야 한다는 무식한 주장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에 발달한 중화학공업, 전자산업, 반도체, 원자력, 전기, 제철, 전자, 조선, 자동자 등의 산업들 중에서 포항제철 하나만 예를 들어 보아도 왜 미국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1930년대에 경제 개발 정책을 시작하였을 때 미국 국민들이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종신집권 권한을 부여하였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장차 국제시장에서 철강산업 호황산업 시대가 올 것을 남보다 일찍 예측하시고 제철소부터 건설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잘 사는 길임을 판단하셨던 때는 1964년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자금이 없었기에 1966년 12월에 이른바 KISA(대한 국제 제철 차관단)을 구성하였다. 미국에 달려가 코퍼스사의 포이 회장에게 여러번 설득하였으나 IBRD가 미국의 수출입은행에게 한국의 종합제철소 사업은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를 했기 때문에 포이 회장은 한국에서는 노동집약적 산업이 적합하다는 말만 할 뿐 박태준의 청을 거절하였다.
어느날 11시가 넘은 시각에 박태준은 마지막 시도로 포이에게 전화를 하여 두사람이 마주 앉았다. 박태준은 가난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철소가 필요하다고 누누이 역설했지만 포이는 " 당신의 애국심은 이해하나 그것과 사업은 별개의 문제다."라는 반응이었다.그는 하와이 해변가에 콘도를 하나 가지고 있으니 돌아가는 길에 잠시 쉬었다 가라는 말과 함께 돌아가 버렸니다. 하와이에 간 박태준은 신발을 벗고 하와이 백사장에 벌렁 누웠다. 이대로 돌아가 박대통령을 뵐 면목이 없다는 생각을 하던 그에게 떠오른 샹걱이 바로 대일 청구권자금이었다.
박태준은 박대통령에게 즉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놈들 하고는 다 틀렸습니다. 우리가 기만을 당한겁니다. 대일 청구권 자금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무상.유상 합치면 1억 달러는 안되겠습니까?" "그래.자네가 기막힌 생각을 했군. 그정도는 될거야."
이렇게 해서 박태준은 그길로 도쿄로 날아 갔다. 야하타제철소 의 사장인 이나마야 요시히로와 후지제철소의 나가노 시게요에게서 박태준은 포철의 건립과 기술이전약속을 받아냈지만 문제는 또 있었습다. (일제시대에 남한을 농업국으로 만들려던 정책을 계승한 탓이었는지) 1억불의 청구권자금은 반드시 농업발전용으로만 쓰이도록 돼 있었기 때문이다. 박태준이 이 자금의 전용을 일본정부에 요구하자 일본정부는 난색을 표명했다. 박태준의 끈질긴 설득의 성과로 마침내 아이치 외무장관은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에 1억달러를 재정차관으로 제공하는 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오오히라 통산성장관이 반대하고 나섰다. 산업의 첫단계는 농업자립화이므로 비료공장,농기계공장부터 세워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습니다. 박태준은 "제철소건설의 목표는 국가안보이다.한국은 여전히 전시상태이다.안보를 고려할 때 제철소가 반드시 필요하다.한국이 적화되면 일본도 좋을 것이 없는 게 아닌가."라는 논리로 결국 오오히라를 설득한다. 박태준이 귀국해서 김학렬 부총리에게 일의 경과를 보고하자 김학렬은 구두로는 안돼고 문서를 가져오라고 해서 박태준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3대 철강회사의 협조각서를 받아온다.
1969년 8월 26일,도쿄에서 열린 제 3차 한일 각료회담에서 일본측은 포철건립에 대해서 원칙적으로는 찬성하나 일본 철강연맹과 상의한 후 자세히 검토하겠다는 발언을 한다. 이에 김학렬은 단상에 올라가 그 각서를 들어 보이며 "여기 3대 일본 철강사들의 협조 각서가 있다. 이것은 한국의 100만톤 규모의 제철소가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일본 각료들을 추궁했다. 더 이상 답변을 할 수 없었던 일본의 각료들은 마침내 포철 건립을 지원한다는 각서에 서명한다.
장소와 자금을 확보했으나 일본은 기술이전을 꺼렸다. 호랑이새끼를 키운다는 것이었는데 박태준은 매일같이 일본의 철강회사를 찾아 다니며 기술이전을 요청했다. 이에 제철소 사장들은 박태준을 피해서 일부러 휴가를 가기도 했는데 박태준은 휴가지까지 따라가는 집요함을 보였다. 마침내 신일본제철이 기술이전을 하기로 결정이 났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1970년 4월 1일 착공식에서 박태준은 이렇게 말한다. "공사 기일을 맞추지 못하면 우리는 전원 저 오른쪽에 보이는 영일만에 들어가 빠져 죽는다."
이렇게 시작된 공사는 밤낮이 없었고 건설에 참여했던 전 임직원은 대일청구권자금으로 공사를 하느니만큼 실패하면 민족의 반역자가 된다는 각오로 임했다.
박태준은 빌려온 대일청구권 자금을 가르켜 "선조들의 피의 댓가이다. 이돈으로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우리는 모두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다.
자,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에 제철산업 구상을 했으나, 대일청구 자금 1억불을 가지고 실제로 공사가 시작된 때도 1970년이었다. 그리고, 그 1억불을 농업용이 아니라, 산업용으로 쓰기 위한 허락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아내는 것이 그렇게 도 힘들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김정일 핵무기 개발 자금으로 공식 확인된 것만 5억 달러를 비밀송금하였다.
그리고 포항제철 건설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 당시 대통령이 박정희였다는 사실이 있다.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구상만 해 놓고 예산이 확보되기 전에 정권이 교체되었다면 포항제철 건설이 계속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1973년 6월 9일 마침내 마침내 제 1고로에서 쇳물이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일관제철소가 생긴 것이다. 포철은 설비가동 1년만에 그동안 투입된 외국자본을 모조리 갚고도 흑자를 기록한다. 첫해에 242억원의 흑자를 기록한 이래 포철은 2004년까지 단 한해도 예외없이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1973년 이래 설비와 자산규모는125배로 성장하고, 매출액은 287배로 성장하고. 순이익은 239배로 성장했다. 당시 103만톤의 조강능력은 2003년에는 2800만톤이었다.
포철은 그동안 세금으로만 5조원을 납부했고 포항공대설립등 사회기금으로 1조 8000억원을 지출했다. 박정희와 박태준의 집념이 이루어낸 영일만의 기적으로 인하여 국가 재정이 살찌고 국민 모두의 살림이 넉넉해지는 혜택을 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포철이 우리나라가 진정한 독립국가가 되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1960년대 중반 이전에 우리나라는 외국 원조로 국가를 운영하여야 하던 나라였다. 그러나 이제 1970년대에 비로서 국민 기업의 세금으로 국가가 운영되고도 35배나 GNP가 껑충 뛰는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또 한가지 특기할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 준공식을 몇 달 앞두고 1972년 10월 17일에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한 유신적 결단을 발표하셨다는 사실이다. 본래 수출산업은 국제시장의 수요에, 혹은 국제적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에 한국 경제의 커다란 버팀목이 또 하나 필요하였으니, 바로 그것이 중화학공업이었다. 그리고 서구에서 150년 걸려 발전한 중화학공업을 한국에서는 10년 내에 발전시킬 구상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있었으나, 도중에 정권이 교체되면 물거품이었다. 경제 개발은 이렇듯 장기적 전략을 요하는 것이기에 미국의 애국자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16년의 장기집권을 지지하듯이 한국의 애국자들도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연장을 국민투표로 적극 지지하였던 것이다.
[출처] 박정희 대통령의 포항제철 건설 이야기 |작성자 맘착한 토끼아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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