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수호 첨병 역할 다하는 ‘국가수호정책연구소’ | |
‘로버트 김 사건’의 핵심인물 백동일 대표 | |
이종납 편집장, ljn1124 |
등록일: 2012-04-19오후 4:49:02 |
그는 조국수호에 한치의 빈틈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좌익세력의 어떠한 방해도 용납하지 않고 요청이 있으면 어느 곳이던 달려가 호국안보강의를 행하며 국민들의 호국안보의지를 다지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지난달 좌파세력들이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싸고 ‘기지건설반대’‘해적발언’이 나오자 가장 먼저 이들을 규탄하며 “해군이 해적이면 육군은 산적이냐?”라고 규탄한 뒤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등 조국해양주권 수호에 역행하는 어떤 정치세력이나 집단을 거부하며 그들의 활동을 저지해 나가야 한다”고 해군예비역 출신들을 이끌고 제주도로 날아가 해군기지 건설을 촉구하는 한편 반대자들을 규탄하기도 했다. 백동일 대표는 지난 1999년 한.미 간 양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로버트 김’사건의 당사자로 안구에 회자된 인물이기도 하다. | ||||
‘로버트 김’ 사건은 지난 1996년 백동일 대표가 미국 주재 한국대사관의 해군무관으로 근무할 당시 미국 해군정보국에서 18년 동안 근무하던 중이던 로버트 김(본명:김채곤)과 함께 북한 관련 군사 첩보자료를 수수하던 중 미 방첩기관인 연방수사국(FBI)의 감시에 노출된 사건을 말한다. 이로 인해 로버트 김은 약 9년의 감옥생활과 함께 가정이 파탄 나는 지경에 처했고, 백 대표는 즉시 귀국조치 된 이후 4년여 만에 군 생활을 마감해야만 했다. 백동일 대표는 로버트 김이 조국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조국을 위해 일한 것이 미국 국익에 배치된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한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왔고 그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백동일 대표 역시 해군무관으로서 북의 위협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한 것이 역시 미국으로부터 배척을 당해 결국 군문을 나와야 했지만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한 대한민국 무관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했기에 결코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백 대표는 최근 들어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 등 대북관련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당시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국가수호정책연구소’설립 백동일 대표는 ‘로버트 김 사건’을 겪으면서 미국 등 선진국의 방첩능력과 국가적 시스템이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다는 것을 새삼 체험하게 됐다고 한다. 백 대표는 “특히 외국의 선진 방첩기관들은 외국 스파이와 자국 정부 내 정보 유출자 등 요주의 인물들을 발견하게 되면 지속 감시하면서 체계적으로 관리할 뿐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 혐의가 포착될 경우 온갖 수단을 동원해 범행 증거를 확보하고, 그에 대한 죗값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고 주장했다. 백동일 대표는 해군무관으로 근무할 당시 습득한 대북정보 분석경험 등을 사장시키는 것이 너무 아까워 이를 재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지난 2001년 ‘국가수호정책연구소’를 설립했다. 백동일 대표는 “32년간 군 생활을 하면서 26년을 대북정보 및 공작 분야에서 일했습니다. 천안함 폭침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적화야욕은 여전한데 우리의 대북 인식은 갈수록 느슨해지고 있어 안타까웠습니다. 제 경력에 맞는 국민운동을 펼치고 싶어 연구소를 설립했죠.” 그는 이 연구소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확신하고, 국가 안위와 국민의 의무, 조국, 국민통합에 매진한다는 등의 다섯 가지 행동강령도 마련했다 | ||||
국민안보의식 다지는 활동 주력
여동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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