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찍었다, 한국과학이 찍혔다
그것은 월남에서 국군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혈맹(血盟)의 우정을 경제원조로 갚으려 했다. 대학도 하나 지어주려 했는데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뜻밖의 제의를 했다. “제가 원하는건… 종합연구소입니다.”
1966년 2월 2일자 재산출연증서가 있다. 펜으로 쓴 이 낡은 서류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의 모태다. 작성자는 박정희, 개인자격으로 사재(私財) 100만원을 내겠다는 것이다. 당시 경제기획원장관 장기영이 인가(認可) 서명했다.
KIST 역사, 한국경제 성장史
삼성 반도체·현대 車·포스코 대표기업들 신화 이면엔 한국과학기술硏 뒷받침 있어…
그 현장 렌즈에 담아 행복했다
과학자들이 꼭 찾는 남자
눈에 안 보이는 국새의 틈, 물방울 튈 때의 순간 포착…
미세한 과학의 세계 찍느라 별짓 다했죠, 신나게
1978년까지 과학자 410명이 돌아왔다. 미국에서는 “세계 최초의 역(逆) 두뇌유출 프로젝트”라며 난리가 났다. ‘전자산업의 아버지’ 김완희 박사가 밝힌 비결은 이렇다. “대통령이 밥 숟가락 위에 손수 깻잎을 올려줄 만큼 간곡했다.”
- 33년7개월 동안 이순재는 과학의 현장을 기록해왔다. 그가 일했던 사무실에는 20만장에 달하는 필름과 슬라이드, 비디오테이프가 쌓여 있었다. 그것은 한국경제의 발전을 견인해온 KIST가 걸어온 길 그 자체였다. / 오종찬 기자 ojc1970@chosun.com
‘과학의 집현전(集賢殿)’이 들어설 터로 홍릉(洪陵) 임업시험장이 결정됐다. 농림부가 반발했지만 대통령은 지적도 들고 현장을 돌며 부지를 골랐다. 처음에 원한 땅이 5만평 정도였다. 대통령이 준 넓이는 정확히 8만2644평이었다.
60년대 세계후진국 중 ‘과학기술연구소’에 눈 돌린 나라는 대한민국뿐이었다. 그 불모지(不毛地)에 과학자 18명이 발을 디뎠다. 유명연구소와 대학에서 받던 연봉이 4분의 1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고급두뇌들은 돈 대신 조국을 택했다.
1969년 준공 후 KIST가 걸은 길이 우리 경제의 성장사다. 대일청구권 자금을 들고 박태준이 영일만에서 빚은 기적의 배경에 KIST의 계획서가 있었다. 이병철이 반도체, 정주영이 자동차에 달려든 것도 KIST가 보여준 희망 때문이었다.
이순재(李順載·59)는 1978년 5월 20일부터 2011년 12월 31일까지 KIST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한국 유일의 ‘과학기록 사진가’라는 이 특이한 이력의 사내는 렌즈를 통해 33년의 과학사(科學史)를 적었고 이전의 역사를 복원했다.
◇"사진은 정직하다"
불과 보름 전까지 이순재가 일하던 5평 사무실 벽엔 필름과 슬라이드가 빼곡했다. 20만장이 넘는다고 했다. 한쪽 책상은 방송 장비였다. 정년(停年)의 벽이 그를 떠나게 했으나 그 머릿속에 남은 기억만큼은 나이와 관계없이 선명했다.
―왜 기록이 중요합니까.
"원진레이온 사태가 문제가 되자 KIST가 뛰어들었어요. 고품질에 저렴하면서도 공해 없는 레이온 제작법을 개발해 한일합섬에 전해줬는데 얼마 뒤 '일본 도레이에 매각된다'는 얘기가 돌자 노사분규가 일어났어요. 100m나 되는 생산라인(line)이 죽창 든 노조원들에게 망가질 뻔했어요. 기록을 남겨야 할 것 같아 달려갔죠. 한참 사진 찍는데 노조원 대여섯명이 둘러싸더군요. 필름을 내놓으라면서요."
―자기들 얼굴 촬영한 줄 안 모양입니다.
"함께 간 연구원은 겁에 질려 '이형 그냥 돌아가자'고 했지만 저한텐 필름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잖아요. '현상해서 당신들 얼굴 없으면 돌려달라'고 했죠. 몇 시간 기다려 인화해보니 제 말대로였어요. 몇년 지나 레이온 생산라인이 재건됐습니다. 그 바탕이 제가 찍은 사진이었어요. 그 공장 재가동되던 날 다시 촬영하러 갔다 절 협박했던 노조원들과 만났습니다. '그때는 미안했다'고 하더군요. 몇년 만에 사과를 받은 거죠."
- 국내 유일 과학기록 사진가 이순재
―필름 하나로 수백억을 아낄 수도 있군요.
"가천의대로 간 조장희 박사와 KIST와 KAIST가 합병됐을 때 함께 일했어요. 그분의 MRI가 세계적인 수준인데 그걸 제가 촬영했어요. 한참 사진찍는데 의전(儀典)행사가 있다는 연락이 왔어요. 가려고 하니 조 박사가 호통을 치더군요."
―왜요?
"'이게 더 중요한데 왜 그런 델 가!'라며. 의전촬영을 포기했는데 그게 조 박사가 만든 첫 번째 모델이었어요. 얼마 전 조 박사가 낸 책에 그 사진이 수록됐습니다. 고마워하시더군요. '나도 없는 자료인데 자네 덕에 찾았다'면서요."
―사진은 정직하군요.
"제가 정년 전까지 하던 일이 5대 국새(國璽) 제작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3대 국새 보수(補修)작업도 했었는데 이 사진 보실래요?"
―금이 심하게 갔습니다.
"이렇게 확대해야 비로소 크랙(crack)이 보이죠. 눈으론 절대 확인할 수 없는 겁니다. 국새는 석고로 본을 떠 주물을 만들고 그 안에 금을 녹여부어 만드는데 본 자체에 문제가 있으면 엉터리 국새가 나옵니다. 제가 남긴 국새 관련 기록만 1만장 분량이에요. 그 인연으로 고대(古代) 철 관련 기록도 남길 수 있게 됐고요."
―국새와 고대 철(鐵)이 무슨 관계가 있나요.
"3대 국새를 만든 분이 최주 박사였습니다. 고대 금속 관련 연구의 권위자였지요. KIST에 전통과학연구센터가 생긴 것도 그분 고집 때문이었어요. 경기도 용인에 고로(高爐)를 만들고 고대 철을 재현하고 기자들과 논쟁하는 장면도 녹화했습니다. 이런 기록은 정말 귀중한 것이지요."
―사진을 보면 같은 물체인데 빛의 각도에 따라 달라 보입니다.
"'사진은 빛'이란 말이 있지요. 전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KIST에 처음 입사해 난관에 부닥쳤는데 그 해법이 바로 빛이었어요. 지금 독일의 대학교수와 인하대 교수가 된 연구원 둘이 자동 납땜 로봇을 만들었는데 납땜이 제대로 되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아무리 찍어도 납땜의 세밀한 부분이 안 보여요. 접사(接寫)의 차원이 아니었던 겁니다. 며칠 밤샘 끝에 담배를 피우러 나갔습니다. 그때 KIST 타워에 떠오르는 새벽 햇살이 비치는 겁니다. '아! 빛이 답이구나'하는 생각이 번쩍 들더군요. 트레이싱 페이퍼로 돔(Dome)을 만들어 씌우고 거기 구멍을 내 빛을 통과시켰죠. 빛을 이용하면 아무리 미세한 부분도 찍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 현재 개발 중인‘에어로젤’은 강력한 단열효과를 낸다. 밑에서 토치로 화염을 뿜어도 에어로젤 위에 얹힌 꽃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 KIST 제공
―KIST 내의 모든 과학자가 33년 동안 선생을 찾은 격입니다. 다 분야가 다른데 어떻게 적응할 수 있죠.
"누가 우리나라한테 항공모함을 공짜로 주면 어떨 것 같습니까. 경험이 없으니 운용을 못할 겁니다. 과학사진도 마찬가지예요. 다 경험이 있어야 해요. 장비를 스스로 만들어야 할 때도 있고요."
―직접 만들기도 합니까.
"옛날 카메라에 달린 '자바라'라고 불리는 주름통이나 발광(發光)에 쓰는 스트로보(플래시)에 모터를 달아 주기적으로 자동으로 터지게 하는 장비며 반자동 현상기도 만들어 서울대 의학사진실에 기증한 적도 있어요. KIST 공작실에 재주꾼이 많거든요."
◇한국사를 바꾼 4대 과학기술
"역사를 바꾼 4대 과학기술이 있다. 한글창제, 개항(開港), 원자력 도입(이승만)과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박정희)이다. 그에 따라 KIST 설립, 과학기술처 발족, 고리원자력발전소 건설이 연쇄추진됐다."(정진익 고대 객원교수)
―실패한 촬영도 있습니까.
"고 윤한식 박사가 '아라미드 펄프'를 개발했어요. 방탄(防彈)소재, 단열재로 쓰이는데 펄프가 비커 안에서 섞이는 걸 찍어야 했는데 너무 빨라 실패했습니다. 지금 다시 도전하면 성공할 것도 같은데…. 그분은 희귀한 연구를 많이 했어요. 물방울이 튈 때 생기는 왕관(Crown)을 찍어달라고 한 적도 있었죠. 그걸 물리학적으로 증명해내겠다면서. 기발한 분이었습니다."
―이 파일엔 정말 희귀한 사진이 많네요.
"이게 1979년 국내에서 처음 개발한 납전지 전기차고요, 이건 1978년에 만든 태양열을 이용한 솔라하우스, 이건 1980년에 만든 태양풍력복합발전소와 저상형(低床型)버스, 86아시안게임 때 도핑테스트하는 사진도 있고요."
필름 한 장이 수백억 가치
생산라인 없어졌는데 사진 통해 재건한 적 있죠
수십년前 전기차·태양열… 값으로 매길 수 없습니다
과학은 기록이다
필름·슬라이드만 20만장
독일 같은 선진국에선 매우 중요시한다는데
내 기록 귀하게 쓰였으면…
―이건 대우의 VTR?
"93년 대우전자가 '탱크주의'를 내세우며 만들어낸 VTR의 다이아몬드 헤드가 바로 이겁니다. 이건 일진그룹을 일으켜 세운 인공 다이아몬드죠. 크기가 모래알만 한데 제가 찍는 데 성공했어요. 그것도 마이크로 렌즈가 아니라 광각(廣角)렌즈로요."
―제1호 세종컴퓨터(1975년) 같은 역사적인 발명품 못지않게 역사적인 인물의 기록도 많습니다.
"포항제철이나 삼성의 반도체 산업 같은 것의 모체가 사실 KIST입니다. 이 사진 보실래요? 고 이병철 삼성회장, 홍진기 회장 뒤에 젊었을 적 이건희 회장이 보이죠. KIST연구실 곳곳을 눈을 번득이며 살피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작업모 차림의 정주영 현대회장도 보입니다.
"현대그룹의 주력업종이 건설에서 자동차로 바뀐 것도 KIST의 제안이 있었기 때문이죠. 정 회장에게 우리 연구진이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장년기 때 모습이죠."
―젊었을 때의 구자경(LG), 최종현(SK), 김우중(대우) 회장도 있군요.
"구 회장께선 KIST에서 개발한 필름산업을 하려 했는데 중간에 접길 잘했지요. 나중에 필름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었으니까요. 최종현 회장의 1978년 모습인데 VTR에 관심이 많았고 같은 해에 방문한 김우중 회장은 자동차에 흥미를 보이셨죠. 이런 사진들이 의외로 제값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가 정년퇴직하기 며칠 전, 그러니까 작년 12월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야마니 장관이 KIST를 찾았습니다. 그때 뭔가 머리를 스치더군요. 1979년부터 84년 사이에 사우디 연구원들이 KIST에 공부하러 온 적이 있었거든요. 당시 필름을 다 찾아보니 학생 때의 야마니장관이 있었습니다."
―좋아했겠습니다.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선물하니 그렇게 감격할 수가 없었어요. '이런 게 아직 남아있느냐'며. 이 사진 보면 KIST 공사할 때 한 인부가 불도저를 찍은 건데 더 중요한 건 그 배경들입니다. 옛 경춘선 철도며 동덕여대 건물이 다 나오죠. 그 인부가 일부러 찍었을 리는 없을 텐데 지금 와선 배경이 더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거죠."
- 오늘날 삼성이 세계 최고 기업으로 발돋움한 데는 KIST의 역할이 컸다. 고 이병철 회장(맨왼쪽)과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오른쪽 끝)이 KIST의 연구실을 둘러보고 있다. / KIST 제공
―이건 뭡니까, 빵 만드는 장면 같은데.
"KIST에서 제빵공장을 한 적도 있습니다, 모르셨죠? 이분이 김성호씨라고 제빵제과협회장까지 지낸 분입니다. 당시 국내엔 변변한 연구소가 KIST밖에 없었어요. 그러니 필요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밖에요."
―기업인 못지않게 대통령도 다 보셨겠군요.
"박 대통령은 KIST 설립자이셨으니 많이 찾았는데 제가 입사한 78년 이후엔 오신 적이 없어요.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에 한 번, 며칠 전에 한 번 왔고 국회의원 때 강연하러 오신 적이 있고요. 노무현 대통령은 변호사 시절 노조 파동이 있었을 때 오신 적이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당선자 시절에만 한 번 오셨죠."
―그럼 KIST를 한 번도 안 찾은 '비(非)과학 대통령'도 있단 말입니까.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인데…, 무슨 바쁜 사정이 있었겠지요."
◇"아버지의 사업 실패가 나를 이 길로"
이순재의 선친은 동대문시장에서 큰 사업을 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에 물감을 들이면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5남매의 맏이로, 종로구 연건동 토박이인 이순재의 삶은 그가 여섯살 때 '으르릉'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군인도 많이 보입니다.
"박 대통령 시절엔 영관급 이상을 의무적으로 KIST에 보냈거든요. 이 사진이 전두환 대통령의 대령 때 모습인데 말석(末席)에 있지요. 이건 노태우 대통령이 준장(准將) 때인데 당당한 자세가 대령 때의 전 대통령과 다르죠."
―박 대통령 말고 KIST에 제일 애정을 보인 분이 누굽니까.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였죠. 모두 4번 KIST를 찾아오셨습니다. '나도 KIST 설립에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휴먼로봇 개발할 때 JP가 연구센터 지원을 해준 게 큰 힘이 되기도 했고요. 아까 얘기했던 레이온 공장이 되살아난 것도 JP 덕이었어요."
―그렇습니까.
"한일합섬이 고전한다는 이야길 듣더니 '5·16혁명 한 후 제일 먼저 1억불 수출의 탑을 받은 회사인데…'라며 안타까워하시더니 지원책을 마련해보라고 지시했거든요."
―기인(奇人)들도 많이 만났겠습니다.
"고대 철 연구한 최주 박사는 혀가 짧아요. 문 부장께서 근무하는 회사의 모 기자도 혀가 짧은데 둘이 대화하면 가관이었어요. 조장희 박사도 그랬고요. '학생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며 그 당시에도 생수를 먹이고 학용품도 최고로 지급해주고 실험실에 카펫을 까는 통에 뒤처리하느라 애를 먹었지요. 일찍 돌아가신 분들도 많아요. 대부분 암으로…, 스트레스가 심했겠지요."
- KIST가 납전지를 이용해 만든 최초의 전기자동차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에 우리나라에도 이 같은 신기술이 있었다. / KIST 제공
―원래 집안이 부유했지요.
"아버지 친구분이 방직기계를 들여오면 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제안을 하기 전까지는요. 아버지께서 앞뒤 안 재고 모든 재산을 쏟아부었다가 그만 사기를…. 그 충격으로 쓰러지신 뒤 곧 돌아가셨어요."
―가세가 기울었겠네요.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못 먹지도 않았어요. 아버지가 워낙 급하게 재산을 정리하느라 빠트린 집이며 땅이 꽤 됐거든요."
―지금은 없어진 수송고 출신입니다. 명문 공고였죠.
"제가 전기과 출신입니다. 3수를 했는데도 대학을 못 갔습니다. 태권도를 했는데 그것도 오른쪽 무릎 근처 뼈가 부러지면서 그만뒀고요. 접골원에서 대충 맞췄는데 잘못돼 지금도 이렇게 뼈가 돌출돼 있습니다. 그 때문에 징집면제도 받았고요. 졸업 후 DP점을 했습니다."
―DP점?
"제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았어요. 우연히 동네 DP점을 보고 하도 신기해서 방과 후엔 매일 놀러 갔습니다. 거기서 '페트리7S'라는 중고 카메라를 빌려 매일 창경궁에 촬영하러 다녔고요. 그 인연 때문에 시작한 DP점이었는데 장사가 꽤 잘됐어요."
―그런데 왜 접었습니까.
"2년 반 뒤 점포 주인이 '내 아들이 군에서 제대하는데 여길 써야겠으니 나가라'는 겁니다. 권리금도 못 받고 쫓겨나다시피 나왔지요. 새로 가게 얻을 돈도 없어 고민할 즈음 KIST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얘길 듣고 응시한 거죠."
―그때 이 일을 삼십년 넘게 할 생각을 했습니까.
"그럴 리가요. 한 6개월쯤 하다 말 생각이었습니다. 아직 젊을 때여서 직장에 매이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하다 보니 이 일이 정말 재미있는 겁니다. 그래서 정식 사원이 되고 계속하다 보니 세월이 그렇게 흘렀네요."
―원래 선생의 선임자가 있었겠지요.
"주의식씨라고 초기부터 사진을 하신 분인데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후임으로 1년6개월간 대타를 고용했는데 그분은 사진을 전혀 모르는 분이었고요. 그래서 제가 들어온 후엔 직접 찍고 예전 자료 복원하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 KIST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태양열을 이용한 솔라하우스를 만들어 실험했다. KIST 부지에 설치됐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 KIST 제공
◇'KIST에 다닌 게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박 대통령은 '청계천 다리 밑에 사는 사람도 나와 보통의 집에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대덕단지가 만들어질 즈음엔 근처 언덕에서 '여기 세계적인 전자단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재미과학자 김완희 박사)
―대외직함이 홍보팀 섭외과 직원이었는데 실제론 사진가입니다. 사진전도 두 차례나 열었지요.
"제가 한 일이 과학사진, 의전사진 외에 KIST의 구석구석을 담는 건데 평일에는 차와 사람이 많아 촬영하기가 힘들잖아요. 토요일에 매번 출근했는데 하다 보니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촬영 지점들이 달라지는 거예요. 연구소 전경(全景)은 태풍이 지난 뒤 가을 초입의 낮 12시부터 1시 사이가 제일 멋있게 나옵니다. 그러다 보니 자투리 시간이 자꾸 생겨 꽃 사진을 찍게 된 겁니다. 꽃사진과 과학사진이 비슷한 점이 많아요. 근접촬영을 많이 하거든요."
사진은 나의 인생
원래 6개월만 하려 했는데 일이 재미있어 정년까지…
한국 과학史 한복판에 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결혼도 사진 때문에 했다면서요.
"디지털 카메라는 인간관계를 삭막하게 만듭니다. 필름카메라 시절엔 한 번 찍을 때도 세 번 이상 생각해야 하고 현상, 인화할 때도 사진 전해줄 때도 정성이 필요하잖아요. 요즘은 이메일로 보내주면 끝인데. 아내가 친구와 놀러 왔기에 사진 한번 찍어준 게 인연이 되긴 했죠."
―이게 1990년 나온 첫 사진집 '우리 직장의 꽃들'이군요.
"KIST가 원래 임업연구소 자립니다. 모두 30만평인데 생태계가 아주 잘 보존돼 있지요. 이 사진 중엔 지금 사라진 게 많아요. 이 박태기꽃은 냉해로 죽었고 무궁화나무는 작년에 태풍으로 쓰러졌습니다. 능소화나 배초향도 지금은 볼 수 없고요. 이거 촬영하는 데 7년이 걸렸어요."
―그게 계기가 돼 1996년 두 번째 사진집 '홍릉수목원의 야생화'가 나왔습니다.
"산림청에 근무하는 분들이 제 사진집을 보고 부탁해서 만든 겁니다. 역시 매주 토요일에 홍릉수목원에서 가서 살았지요. 6년 동안을 그렇게요. 처음엔 아이들도 데리고 갔는데 제가 사진만 찍느라고 놀아주질 않아서 그런지 다음부터는 안 따라오더군요. 가족에게 그게 제일 미안해요."
―대한사진가협회 이사까지 지낼 정도의 실력인데 왜 전문사진가의 길로 나가지 않은 겁니까.
"기로에서 고민했지요. 제가 어렸을 적부터 꽃과 사진을 좋아해서 시작한 건데 정말 승부를 보려면 KIST를 그만둬야 할 것 같았아요. 그런데 KIST를 떠나기가 정말 싫더라고요."
―이제는 다시 시작해도 되지 않습니까.
"카메라를 잡긴 잡아야겠지만 이 방면에 워낙 대가가 많아서요. 배병만 선생도 그렇고, 김정명 선생도 대단한 분이지요."
―아무리 정년이지만 일터를 떠나는 게 쉽진 않겠지요.
"제 자식을 남겨놓고 떠난 것 같은 생각은 들지만 전 정년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자기 자신을 한번 되돌아볼 기회가 되니까요."
―지금까지 거쳐 간 카메라가 몇대나 됩니까.
"아사히펜탁스 포토마틱, 라이카M3, 브로니카645, 테크노라마, 최근엔 니콘D3X를 썼으니 10대쯤 되겠네요. 그중에 몇대는 셔터가 녹아버린 것도 있지요."
―선생이 떠나면 KIST의 기록관리는 누가 합니까.
"원(院)에 사정이 있겠지만 저도 그게 제일 아쉬워요. 후임자가 있으면 자료도 넘겨주고 구전(口傳)할 것도 많은데….(임환 KIST문화홍보실장은 "데이터베이스화를 못한 게 너무 안타깝다"며 "방법을 강구하고있다"고 말했다.)
―외국에는 백발성성한 과학기록 사진가가 꽤 많을 텐데 우린 왜 등한시할까요.
"외국엔 많죠. 특히 독일이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우린 왜 그럴까, 아무래도 기록의 중요성을 모르는 게 아닐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대화가 오후 7시 끝났다. 드넓은 과학의 산실에 장막처럼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일행과 근처 낙지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순재는 "우리 KIST 주변에서 제일 맛있는 집"이라고 했다. 그에게 KIST는 인생의 전부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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