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의 '내가 겪은 전쟁'] 中

여동활 2011. 7. 26. 08:25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의 '내가 겪은 전쟁'] 中
6·25 2년전부터 전투 시작 - 고지의 적 토치카 기관총에 소대장·분대장 전사하자
대원들이 포탄 안고 돌진… '육탄 10용사' 잊을 수 없어

나와 공산주의의 전쟁은 6·25가 일어나기 2년 전인 1948년 시작됐다. 1951년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게 개성 송악산의 '육탄 10용사' 전투,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와 조우, 닭 한 마리 때문에 부대원 전원이 몰살당할 뻔한 일이었다.

1949년 나는 11연대 4중대장으로 송악산 주봉을 경계로 인민군 1사단과 대치했다. 5월 3일 인민군이 기습을 해왔다. 아군은 다음 날 새벽 즉각 반격했다. 나는 송악산 좌측, 김영직 대위의 하사관교육대는 우측 비둘기고지가 목표였다.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오른쪽에서 두번째 앉은 사람)이 훈련 중인 7사단 5연대 장병들과 대화하고 있다. 맨 왼쪽이 밴플리트 장군이며 두 사람 건너가 채명신 대령이다. 지난주 사진 설명 가운데 채명신 소장(20사단장)은 대령(20사단 60연대장)의 잘못이다. /채명신 장군 제공
비둘기고지에선 격전이 벌어졌다. 적이 쏴댄 기관포에 소대장과 분대장이 전사했다. 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그들은 육탄 공격을 결심했다.

분개한 1소대 1분대장 서부덕 상사, 박창근 하사, 윤옥춘·황금재·오제용·박평서·이희복·김종해·윤승원·양용순 상병이 자진해서 나섰다. 이들은 81㎜ 박격포탄을 안고 적 토치카로 돌입했다. 자폭 작전이었다. 이들이 그 유명한 '육탄(肉彈) 10용사'다.

이 전투에서 나는 네 살 위로 형처럼 생각했던 김영직 대위를 잃었다. 호국(護國)의 표본, 군인정신의 정화(精華)인 그들은 경기도 파주 육탄 10용사 충용탑에 동상이 돼 서 있다. 송악산전투 후 나는 경북 안동 25연대로 전속됐다.

1950년 6·25가 터지고 영천 방어전에 임하던 내게 9월 16일 북진 명령이 내렸다. 죽령터널~충북단양~황해도곡산~평남덕천까지 파죽지세로 올라가면서 점점 '너무 빨리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처럼 적들도 무슨 작전을 쓸 것 같았다.

파주 통일공원에 있는 육탄10용사상.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팽덕회(彭德懷)가 이끄는 중공 4야전군이 밀고 내려온 것이다. 나는 평북 희천에서 처음 중공군과 교전했다. 그들은 주로 밤에 공격했다. 기분 나쁜 피리 소리에 이어 파란 신호탄이 올라가면 벼락처럼 함성을 질렀다. 마치 해일 같았다.

돌이켜보면 아군은 청천강 목 좁은 전선에서 강한 방어선을 쳐야 했다. 그런데 '누가 먼저 압록강 물을 떠먹을까'라는 경주만 벌였다. 전략 요충을 그냥 지나친 것이다. 우리와 동해안 전선은 텅 비었다. 중공군은 그 틈을 타고 남진했다.

11월의 낭림산맥은 추웠다. 정신없이 후퇴하다 보니 연대 지휘부와 떨어지게 됐다. 통신마저 끊겨 결국 적진에서 우리 대대(북진 중 승진)만 독자 행동을 해야 했다. 며칠 뒤 겨우 통신이 연결됐다. 3대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연대장이 중공군에게 포위됐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리 달려도 5시간 거리에 있었다. 대대 병력을 끌고 갈 수 없어 특공대 50명을 이끌고 갔다.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연대장을 구출했다. 생존자가 80명에 불과했다. 참패였다.

"닭 한 마리만 잡아먹고 가자"는 유혹에 후퇴 늦어 전멸될 뻔

생사 넘나든 퇴각 작전

패잔병을 끌고 1주일째 남하하는데 김영노 연대장이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채 소령, 닭 한 마리만 먹으면 원이 없겠소. 병력 몇 명 데리고 별도 행동이라도 해 원기를 회복하고 싶소." 그 닭 한 마리 때문에 부대는 전멸 위기를 맞는다.

고기 때문에 작전을 바꾼 건 전쟁을 하면서 처음이었다. 우리는 20여호쯤 되는 마을을 포위했다. 주민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억지로 협박해 1인당 한 마리 이상씩의 닭을 삶아 먹었다. 주린 배를 채우자 병사들이 이내 코를 골았다.

연대장마저 주저앉았다. 나는 연대장에게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며 행동하자고 했다. 주민들이 호의적이지 않은 것도 꺼림칙했다. 그러자 연대장은 "이 사람아! 왜 급하게 그러나"하며 화를 냈다. 권총을 뽑아 연대장에게 겨눴다.

"연대장님 때문에 떼죽음당할 순 없습니다.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쏘겠습니다." 이렇게 난리 친 끝에 지친 부대원을 깨워 1시간 남짓 이동하다 중공군의 매복에 걸리고 말았다. 정신없이 포위망을 뚫고 나와보니 인원이 8명뿐이었다.

그것으로 연대장과 영원히 이별하게 됐다. 지금까지 연대장은 실종으로 기록돼 있다. 그 뒤 잇따라 인민군과 중공군을 만나면서 일행은 3명으로 줄었다.

며칠 뒤 또 위기가 왔다. 그날도 젊은 여인과 아이가 사는 집에 들어가 '당 직속 정찰대'라 속여 밥을 얻어먹었다. 졸음이 쏟아지는데 밖에서 눈 밟는 소리가 났다. 포위당한 걸 직감했다. 변소에 있던 여자의 남편이 신고한 것이다.

나는 부하 둘에게 "투항하든가 기회를 봐 도망가라"며 권총을 머리에 갖다 댔다. '철컥' 소리가 들렸는데 불발이었다. 다시 장전하고 머리에 갖다 대는데 부하 정용식 상사가 손을 붙잡는 것이었다. "죽지 말라는데 왜 죽습니까?"

기묘한 말이었다. 그 순간 "손들엇!"하는 소리와 함께 인민군이 총을 겨누며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리와 함께 녀석이 고꾸라지자 2탄을 쏘며 밖으로 나왔다. 나를 향해 개머리판을 휘두르는 적병에게 3탄을, 도랑으로 피하는 다른 녀석에게 4탄을 명중시켰다. 1951년 1월 나는 마침내 연백평야를 거쳐 강화도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박정희 대령, 낡고 피묻은 내 점퍼와 자기 고급 점퍼 바꾸자고 해

게릴라부대 백골병단 시절

군은 극비리에 게릴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민간인 300명을 선발한 배경엔 미군의 힐난이 있었다. 그들은 신성모 국방부장관을 비꼬았다. "북한은 게릴라전에 능한데 남한은 대체 뭐 하는 거요?" 그 말을 듣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유격부대가 전멸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인사국장에게 조건을 달아 지휘를 수락했다. "숫자는 50명입니다. 전과를 올리면 GO(게릴라 군번)를 정규 군번으로 바꿔주십시오." 정일권 참모총장도, 신 장관도 "OK"라고 했다.

인민군 복장, 소련제 AK소총, 북한 지폐를 지닌 유격결사 11연대가 마침내 51년 1월 말 강원도 영월 북방 적진에 잠입했다. 그런데 뒤이어 유격12연대(160명), 13연대(120명)가 따라왔다. 계획과 달리 유격대는 500명의 부대가 됐다.

유격부대로 적진에 침투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백골병단’의 생존 용사 26명이 지난해 6월 25일 계룡대 육군본부 연병장에 모였다. /신현종 기자

내키지 않았지만 부대명을 백골병단(白骨兵團)으로 바꿨다. 2월 하순 대위가 포함된 적 연락병 5명을 만났다. 그들은 인민군 중좌 차림의 내가 반가운 듯했다. "동무, 어딜 가오?" "전 2군단 예하 69여단 사령부 연락장교입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나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렇소? (주위를 둘러보며) 이놈들 무장해제시키시오!" 그들은 진짜 월척이었다. 69여단장이 인민군 최현 2군단장에게 보내는 극비문서와 부대 배치가 표시된 지도를 갖고 있었다.

정보를 아군에게 보내 2군단을 폭격한 뒤 후퇴 도중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기린리 군량밭이란 마을에 인민군 거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는 조선공산당 제2서기이자 현역 중장이며 대남유격대 총사령관 길원팔이었다.

그가 거처하는 곳에 잠입했다. 의외로 일행은 외팔이 참모장 강칠성 대좌를 포함해 15명과 무장 자위대원 30명뿐이었다. 나는 200명을 선발해 그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일단 무장 자위대원부터 처치하기로 하고 대장에게 접근했다.

여기서도 인민군복과 '당 직속 정찰대장'이라는 거짓말이 통했다. 영문도 모른 채 모인 자위대원을 무장해제한 뒤 길원팔이 사는 세포위원장 집을 포위했다. 그는 돌연한 국군의 출현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죽기 전까지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에 여기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는 말을 수십번 했다. 길원팔은 거물이었다. 남으로 끌려가기보다 자결을 원했다. 그에게 김일성이 선물했다는 권총에 총알 한 발을 넣어줬다. 2군단이 폭격당하고 길원팔이 살해됐으니 이젠 우리가 도망칠 차례였다. 예상대로 적의 부대가 끈질기게 쫓아왔다.

우리는 설악산 능선에서 죽을 고비를 맞았다. 적에게 쫓기다 절벽 아래로 뛰었는데 2m 넘는 눈 덕에 살아나 강릉 9사단에 인계됐다. 당시 9사단 참모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대령)이었다. 그는 유격대의 활약상을 흥미있게 들었다.

어느 날 박 대령이 날 불고깃집으로 초대했다. 그러면서 적군의 핏자국이 얼룩진 누더기 점퍼를 자기 고급 점퍼와 바꾸자는 것이었다. "이봐, 그거 역사적인 점퍼잖아"라면서. 자기 깨끗한 옷을 내게 선물하려고 배려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