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외국이 새마을운동에서 모방할 수 없는 것

여동활 2011. 6. 9. 17:52

외국이 새마을운동에서 모방할 수 없는 것
▲1976년 7월 6일 수원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을 방문한 박 대통령이 점심식사 자리에서 연수생들과 담소 중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이 잠자던 농촌을 흔들어 깨울 때 지방 군수와 면장들이 청와대에서 걸려온 전화에 깜짝 놀라 벌떡벌떡 일어났다.
“나 박정희요.”
대통령은 지붕개량을 했는지, 길을 고쳤는지, 다리를 놓았는지를 꼬치꼬치 물어 확인했다. 새마을연수원에 가서는 새마을지도자 연수생들에 대한 교육평가를 A, B, C로 나누어 A를 받은 수료생에게는 농림부에서 특별지원을 해주고, 반면에 C를 받은 수료생을 추천한 군수는 문책하라고 지시했다.
군수와 면장들이 사무실에 앉아 있을 경황이 아니었다. 면사무소 직원들은 밤낮없이 담당 지역에 나가 새마을운동을 독려하고 실태를 파악했으며, 군수와 면장들도 작업복 차림에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돌며 새마을 지도자를 만나 협의를 하는 등 긴장의 연속이었다. 


새마을연수원장 김준도 과로로 몸이 쇠약해졌다.
“김 원장에게 보약 좀 보내줘. 내가 보내더란 말은 하지 말고.” 
대통령이 보약을 챙겨준 김준에게는 새마을운동이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새마을운동을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를 사람들은 ‘새마을의 교주(敎主)’라고 불렀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1970년 초의 전국의 농가는 3만5천 마을에 2백50만 가구였다. 농가의 80퍼센트는 초가지붕이었고, 전기가 들어가는 집은 겨우 20퍼센트, 나머지는 등잔불이니 라디오도 들을 수 없었다.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마을은 30퍼센트에 불과해 나머지는 비좁고 꼬불꼬불한 고샅길에 가난이 엉켜 있는 형상이었다.
박정희 정부가 새마을운동으로 처음 시작한 사업이 농촌의 환경개선이었다. 우물과 빨래터를 고치고, 길을 닦고, 다리를 놓는 등 농민들의 협동을 필요로 하는 공동사업이다. 


1970년 가을 정부는 1차로 전국 3만5천 마을에 시멘트 3백~3백50부대씩을 무료 공급해 침체된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내무부는 대통령의 뜻에 따라 우수한 성과를 올린 마을부터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는 원칙 아래 전국 3만5천 마을을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로 구분해 1만7천 마을에 이듬해 시멘트 5백부대와 철근 1톤씩을 더 보내주었다.
박정희는 주민 참여도가 낮고 성과가 나쁜 1만8천여 기초마을은 일체 지원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빈곤을 자기의 운명이라 한탄하면서 정부가 뒤를 밀어주지 않으므로 빈곤은 어쩔 수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농민은 몇백년의 세월이 걸려도 일어설 수 없다. 의욕없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은 돈의 낭비다.게으른 사람은 나라도 도울 수 없다.”
단호히 말했다.


이 같은 지시가 알려지자 여당인 공화당이 술렁거렸다. 지원을 못받는 기초마을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다음 선거를 어떻게 치르느냐며 난리가 난 것이다.
“이로 인해 설령 선거에서 표를 얻지 못해 정권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이 신상필벌 원칙만큼은 바꾸지 않겠다. 누구를 막론하고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
서슬퍼런 일갈에 끽소리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그는 전기도 전봇대에서 가까운 마을부터 가설하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멀리 떨어진 외진 산골이라도 새마을사업의 성과가 좋기만 하면 그곳에만 전기를 넣어주라고 지시했다. 전봇대에서 가깝다고 앉아서 전기 들어올 날만 기다리는 게으른 마을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니 새마을사업에 소극적이었던 마을들이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이 낙오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절박감과 함께 남보다 더 잘 사는 마을을 만들어야겠다는 경쟁심리가 작용해서 농촌마다 새마을운동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하여 1977년에는 전국 3만5천 마을에서 기초마을이 사라지고 98포센트가 자립마을로 승격되었다.


한국 농촌에는 ‘두레’라는 독특한 문화코드가 있다. 농사는 농번기에 집약적인 노동을 요구하는데 그때에 마을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여 공동 작업을 하는 것이 두레이다. 공동으로 하는 농사일을 두렛농사나 두렛일이라고 하고, 거기에 참여한 농사꾼을 두레꾼, 공동으로 부치는 논을 두렛논이라 한다. 부녀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길쌈하는 일을 두레길쌈이라 하고,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게 만든 두레상도 있으며, 우물에 놓아두고 누구나 함께 사용하는 두레박도 있다. 이처럼 두레는 한국의 뿌리깊은 전통문화 현상이다.
이 두레문화를 자조, 자립, 협동의 근대화 코드로 업그레이드시킨 것이 새마을운동이다. 전통 두레에서는 공동의 비용을 조직원으로부터 갹출하기도 하고, 부락 소유의 논밭이 있으면 그것을 함께 경작하여 그 소출로 비용을 쓰기도 했다. 그것을 갈음한 것이 새마을금고이다. 또 두렛일을 할 때는 농악대가 ‘農者天下大本’ 깃발을 앞세우고 한바탕 풍물을 칩는데 그것과 더불어 새로 등장한 것이 ‘새마을노래’인 것이다.
두레는 곰살스러운 인정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전통임에도 그러나 농촌은 절대빈곤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오랜 국가적 고난과 지도력의 결핍,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빈곤 등 여러가지가 복합된 가난이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농촌의 가난을 동정하지 않았다. 게으르고 저축도 할 줄 모르며 협동심도 부족하다고 냉정히 비판했다. 오랜 가난으로 인한 무력감과 좌절을 결코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박정희 혁명정부가 등장한 1960년대 초만 해도 춘궁기에는 채 여물지 않은 보리이삭을 태워 가루로 만든 다음 초근목피를 넣어 끓인 죽으로 연명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가 없어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이들이 넘쳐났다.
그 무렵 5.16혁명 1주년 기념 예술제에 쓰일 노래를 지어달라는 요청을 받은 극작가 한운사는 “도대체 이 가난이 뭐냐? 이게 나라냐? 이게 백성을 다스려 간다는 것이냐?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힘이 없어 그 고개를 넘기가 어렵다. 너무나도 가난하다. 미국 원조물자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창피하기 그지없다. 우리가 무슨 노동을 해도 좋으니, 열심히 일만 하면 세 끼 밥은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만 한다. 그거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해달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잘 살아보세’ 노랫말을 지었다고 했다. (월간조선 2001년 12월호)


박정희는 1972년 4월 전남 광주에서 열리는 새마을소득증대촉진대회를 앞두고 가벼운 낙상을 입어 요양케 되었다. 모처럼 쉬는 동안 한가지 생각에 골몰했다. 농민들이 고된 줄 모르고 일할 수 있는 힘차고 신명나는 노래를 지어보기로 한 것이다. 먼저 가사를 만들고 악상을 둘째 박근영에게 피어노로 치게 하여 음정을 잡고 손으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불러 보았다. 수차례 녹음을 하고 수정 작업을 거쳐 국립교향악단 지휘자 홍연택에게 보내 다듬도록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새마을노래’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새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박정희가 작사, 작곡한 ‘새마을노래’는 그의 육성과도 같은 것이다.
농촌이 조용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확성기에서 힘찬 노래가 흘러나왔고, 새마을 모자에 완장을 찬 사람들과 주민들이 새마을 사업에 신바람을 일으켰다.


공동 작업에 의한 농촌의 인프라 개선으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1972년부터 소득증대사업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새마을운동은 한마디로 ‘잘 살기 운동’입니다. 소득이 증대돼 농촌이 부유해지고 보다 더 여유있고 품위있는 문화생활을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1972년 4월, 광주 새마을 소득경진대회)
이렇게 말한 박정희는 농촌 소득증대에 직접 기여하는 사업들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새마을 부녀회에서는 절미(節米) 저축 운동을 시작해서 쌀을 공동으로 판매한 대금을 농업협동조합에 예금하고 통장을 받았다. 이때의 예금통장은 농촌에 주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 전까지는 예금통장을 가져본 농가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농촌 주부들이 통장을 갖게 된 기쁨과 이자가 불어나는 보람을 알고부터 근검 절약하고 저축하는 습관이 생겨난 것이다.
소득증대사업으로 농가소득이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1967년의 경우 농가소득은 도시가구의 60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꾸준한 소득증대사업의 성과로 74년에는 도시 노동자의 소득을 상회하기 시작했다. 실직 액수로 보면 70년에 평균 25만6천원에서 75년 87만3천원, 78년 1백60만원으로 8년 사이 6배 이상 증가했다.
이와같은 농가소득의 급증은 통일벼 계통의 다수확 신품종으로 쌀 수확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이 큰 요인이었다. 1977년 쌀 수확량이 4천7백10만6천섬으로 4천만섬을 돌파하여 오랜 굶주림과 가난의 대명사인 보릿고개를 말끔히 해결하고 해마다 수백만섬의 쌀이 남아돌게 된 것이 이때부터였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의 열풍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연인원이 71년 7백20만명에서 새마을운동이 정점을 치닫던 78년에는 무려 2억7천만명으로 늘어난 사실이 그 열기를 말해주고 있다.
대통령 박정희는 ‘잘 살아 보세’라는 시대적 화두(話頭)에 대해 “당장 오늘의 우리가 여유롭고 품위있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일의 후손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든다는 데 보다 큰 뜻이 있다”며 항상 후손과 역사를 의식하고 강조했다.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 (1967년 1월17일)
“후세에 우리 자손들이 너의 조상이 누구냐고 물으면 나의 조상은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에 앞장서서 알뜰하게 일한 바로 저 마을의 농민이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유산을 후손에게 남겨줍시다.” (1973년 11월, 제1차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그가 지향했던 대로 새마을운동은 후대의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1998년 조선일보사와 한국갤럽이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으로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에서 새마을운동을 역사상 우리 국민이 성취한 가장 큰 업적으로 꼽았다.
새마을운동은 1972년부터 외국으로 퍼져나가 30여년 동안 70여개국에서 약 2천명이 새마을연수원에서 정규교육을 받았으며, 1백60개국의 4만명 가까운 인원이 새마을운동중앙회를 방문해 새마을운동을 견학하고 돌아갔다. 유엔개발계획(UNDP)에서는 새마을운동을 농촌개발 및 빈곤퇴치 모범사례로 평가했다. 또 그 조직이 유엔 공보국(DPI) 등의 회원으로 가입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활약함으로써 이 운동의 확산에 탄력이 가해지고 있음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한류(韓流)’라는 말이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아시아 지역에서 일기 시작한 한국 대중문화의 유행 현상을 일컫는 말인데, 이를 외국에서 유행하는 한국 현상으로 확대하면 그 원조는 새마을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하는 나라들을 보면 한국의 새마을기를 그대로 쓰기도 하고, 농업 인구 9억을 가진 세계 최대의 농업국인 중국에서는 새마을운동을 그대로 중국 말로 옮긴 ‘신농촌운동’을 제11차경제개발5개년계획(2006~2010)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다. ‘신농촌운동’은 중국이 낙후된 농촌을 발전시켜 도시와 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해 2005년에 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 간부들을 한국에 보내 새마을운동을 연구한 끝에 수립한 것으로, 국가주석 후진타오는 이어 2006년 2월 최고지도부 2백여명이 참석한 ‘신농촌운동’ 대토론회에서 “신농촌운동만이 중국 농촌을 구할 수 있다”고 강조해서 강한 집념을 보였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 모델을 연구하는 각국의 전문가들은 한국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두가지 요인으로 지도자 박정희와 새마을운동을 지적하고 있다. 외국이 한국의 새마을운동에서 모방할 수 없는 것이 ‘박정희’라고 한다. 외국에는 “박정희가 없다”는 것은 지도자의 마인드가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일찍이 중국의 덩샤오핑은 1980년대에 실권을 잡은 후 번역된 새마을운동 관련 서적을 당간부들에게 나눠주며 “박정희를 배우라”고 지시했었다.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가 2005년 5월 중국을 방문해 극진한 예우를 받아 화제가 되었는데 그를 초청한 공산당 측은 “후진타오 주석이 새마을운동을 공부한 사람이니 박정희 대통령의 딸에 관심이 깊은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의 최고지도자였다. 왜 박정희만이 성공할 수 있었는지, 지도자의 집념과 의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1974년 8월 국무위원들이 새마을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국무위원들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므로 절반씩 두차례에 나누어 새마을연수원을 다녀오기로 되어 있었다. 먼저 교육을 받은 국무위원들이 새마을연수원을 나온 이튿날 8월15일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서거했다.
이튿날 새벽 2시 대통령 박정희는 부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청와대 접견실로 내려와 오래도록 서럽게 통곡했다. 그때 국무총리 김종필이 들어오자 울음을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김총리! 나머지 국무위원들도 예정대로 새마을 교육 받으러 입소하는 거지?”
나머지 절반의 국무위원들이 새마을연수원에 입소할 차례였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대통령 부인이 죽어 온나라가 비탄에 빠졌는데 새마을운동이라니!
당시 청와대에서 새마을운동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경제담당 특별보좌관 박진환은 그 경황에 대통령의 그런 모습을 보고 ‘새마을운동에 목숨을 걸었구나’하는 생각에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새마을운동의 한류(韓流)에서 외국이 모방할 수 없는 것이 ‘박정희’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

출처 : 김인만 <임자, 막걸리 한잔 하세>   글쓴이 : 김인만 (작성일 : 2009-04-22 오전 11:22:00)